202화. 조우
애초에 가정했던 최악의 경우는 전생에 보았던 49층, 50층의 계층주에 더해서 그들보다는 ‘약할 것이라 추측되는’ 46~8층의 계층주들과 그 부하들까지 모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려오면서 처리한 초월급 마수나 마지막 광장에 남겨져 있던 흔적을 보아하니, 위층의 계층주들이 부하들을 이끌지 않고 혼자 내려간 것 같았다.
하여 최악이 아니라 차악의 상황 정도이지 않을까 기대했더랬다.
하지만 월랑의 눈으로 본 광경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비관적인 상황.
“다섯이 아니야. 최소 계층주로 보이는 개체만 열…… 놈 정도 되는 것 같아.”
“뭐!?”
그에 루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잘못, 본 거, 아냐?”
“……그랬으면 좋겠는데.”
타이니는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희망적인 상상을 해 봤지만, 이내 한숨을 푹 쉬며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월랑이 흑영갑을 쓸 생각도 하기 전에 당했어. 처음 보는 놈 하나한테.”
지금의 월랑은 흑영갑으로 오러를 어느 정도 버텨 낼 수도 있고, 지난번엔 그 작은 초월마수와 싸우며 압축 강화 육체까지 개발했다.
경지는 6.5단계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전투력은 이미 초월급 마수에 준하는 수준.
아니, 지난 2개월간 몇 차례나 증명했듯 웬만한 저급 초월마수는 혼자서도 죽일 수 있는 정령이 바로 지금의 월랑이었다.
“그, 그럼, 그놈 하나가, 특별한 거, 아닐까?”
“아니야.”
타이니는 다시 인상을 쓰며, 월랑의 눈으로 본 마지막 광경을 떠올렸다.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커다란 새. 아니, 그걸 새라고 불러도 될까.
깃털 대신 갑옷 같은 비늘을 두르고, 세 개의 발로 번개처럼 공간을 이동하는 괴물을.
‘그놈은 확실히 8단계급이야. 벤투스, 그 썩을 놈보다 빠른 거 같진 않지만…….’
타이니의 시선이 루나에게 슬쩍 향했다.
극속의 벤투스, 그 난적을 처리했던 사신이라면 놈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루나한테 맡길 수는 없어.’
루나가 전생보다 전투에서 훨씬 유용한 특성을 개화한 것은 맞지만, 지금의 그녀가 그때의 사신보다 강하냐고 묻는다면 그는 바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오러라는 엄청난 특성을 얻은 대가로 다소 떨어지게 된 육체 능력을 아직 보완하지 못했고, 경험도 월등히 부족하다. 십수 년의 세월이 새삼 크게 와닿을 정도로.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월랑을 역소환시킨 놈은 확실히 악마급으로 보여. 거기다 월랑의 감각이 느끼기로는 그보다 강한 놈이 49, 50층의 계층주를 포함해서 최소 다섯이 더 있어.”
“그게, 말이 돼? 지금 우리, 48층, 인데?”
“50층보다 더 아래의 계층주, 혹은 그에 준하는 괴물들도 합세한 거야. 빌어먹을.”
“으…….”
그리고 8단계에 걸친 것인지 아직 7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건지, 그 악마급 여섯보다 조금 약해 보이지만 각각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괴물이 또 여섯.
그리고 앞서 언급한 놈들에 비하면 약해 보이지만, 명백히 초월급으로 보이는 마수 열세 마리가 더 있었다.
앞서 말한 열두 놈이 계층주라면, 아마도 나머지 열세 마리는 직속 부하 같은 것일 터였다. 아니면 악마급 여섯만 계층주고, 나머지 열아홉 마리가 부하든지.
“이게 뭐야, 대체!”
빌어먹을,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절로 짜증 섞인 고함이 터져 나오는데, 루나 역시 할 말을 잃은 듯 굳은 안색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심각한 안색으로 고민에 잠긴 그 공간을, 널브러진 마물의 시체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가득 메울 때쯤에서야 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타이니.”
“응?”
“이건, 무리야. 자살행위, 이상의, 의미 없어.”
그 말에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루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놈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대미궁의 마물들이 마계 대전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지만, 이곳을 미리 정리하고 싶어도 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여야 시도해 보지 않겠는가.
여기서 더 가겠다고 우기는 것은 단두대에 스스로 목을 집어넣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한 가지가 그의 입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녹턴이…….”
그랬다. 타이니는 월랑의 눈을 통해 똑똑히 보았다.
웨폰 마스터의 다섯 초월무구도 부럽지 않게 만들어 주었던 자신의 애병 녹턴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놈의 손에 그대로 들려 있는 광경을.
그걸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한다고?
타이니의 눈동자가 극심한 갈등 속에 격하게 흔들리는데, 루나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 왔다.
그가 흠칫하는 순간.
“안 돼, 타이니”
단호한 기색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나친 욕심이, 사람을 죽여.”
얼마 전에도 들었던 이 말은 암살자의 격언 같은 것일까.
그 단단한 눈빛, 그리고 붙들린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에 타이니는 결국 심중의 갈등을 흩어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리고 또 자연스레 피식 웃고 말았다.
‘회귀했으니, 내가 더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이지만 루나가 정말 누나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이 아직 미숙하다는 뜻일 터.
그 반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욕심과 미련의 잔재를 털어 내 주었다.
“응, 일깨워 줘서 고마워. 바보짓 할 뻔했네.”
“그래. 역시, 똑똑해. 내 동생.”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루나.
그 모습이 조금 어색한 것은 자신뿐일까.
‘그렇게 쓰다듬어 달라고 하더니.’
왜인지는 몰라도, 루나에게는 이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이 특별한 칭찬 같은 의미인 듯했다.
어린아이나 좋아할 법한 스킨십이 아닌가 싶어 또 웃음이 새어 나오는데, 문득 루나의 모습 위로 아련하게 겹쳐 보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어린 시절, 자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사람.
‘에리나 누나…….’
그 순간, 낯설고 미묘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감정이 들었다.
왜 그럴까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루나에게서밖에 들어 보지 못한 어색한 단어 하나가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근데, 내가 똑똑해?”
“응, 상황 판단, 빨라.”
……내가 그래?
아니, 그렇다 쳐도.
‘그건 똑똑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 않나?’
그 의문 어린 시선에 루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동방어도, 할 줄, 알고.”
보여 준 적도 없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타이니는 ‘흡’ 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켠 후 루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대미궁 탐험은 여기까지. 돌아가자. 영감한테 이상 상황이나 전해야지.”
“잘, 생각했어.”
웃으며 대답하는 루나의 표정을 보니, 마음 정리가 더욱 쉬웠다.
생각해 보면 대미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현생의 나이로도 이미 성년인 열여섯이 된 데다가, 얼마 안 있으면 거기서 한 살을 더 먹는다.
그동안 대충 요령을 피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치열하게 달려왔다.
원했던 모든 것을 얻진 못했지만,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미궁에 온 보람은 차고 넘쳤으니.
‘녹턴은 포기한다.’
여전히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녹턴이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지금으로선 차라리 밖에 나가서 대미궁 마물들의 변화를 전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만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가자.”
“응.”
그렇게 결심하고 홀가분하게 돌아서는 순간.
- 겁을 먹었느냐, 하찮고 불쾌한 것들아.
두 달 전에 들었던, 그 불쾌한 파장의 정신파가 그들이 있는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 새끼가?”
그 정신파에 담긴 미묘한 불쾌감 자체는 차치하더라도 열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자신도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이 기분이 좋을 리 없었으니까.
“겁먹고 뭉쳐 있는 것들이 지금 누구한테 헛소리냐!!”
이내 타이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통로를 메웠다.
정신파로 의지를 전하는 놈들에게 응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대상을 떠올리고 강렬한 의지를 담아 소리치는 것.
마족을 상대하며 익혔던 방식대로 놈에게 응수하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 헛소리. 이것은 연습. 쓸데없는 전력 낭비를 줄이고자 함일 뿐.
사소한 도발에 바로 제 입장까지 설명하며 응대해 오는 놈.
이성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뜻을 전하는 방식에는 그가 기억하는 전생의 놈처럼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저 놈이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일이 많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나 알았었다. 그 어리숙함에 어울리지 않는 교활한 함정에 몇 번 걸려 버린 후에야 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연습? 무슨 소리지?’
뭐, 몇 번 긁어 보면 알겠지.
“겁먹지 않았다면 네놈 혼자 올라와 보시지! 그렇다면 나 혼자 상대해 주겠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생의 경험상 놈은 어떻게 도발하더라도 절대 먼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 그 주둥이, 곧 찢어 먹어 주마.
예상치도 못한, 진득한 살기가 어린 정신파가 다시 전해져 왔다.
제대로 도발에 걸린 것처럼.
‘어라?’
이 정도에 걸려들 놈이 아닌데?
‘설마, 지금은 정말 어리숙한 건가?’
혹시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정말 놈이 혼자 덤벼 오려나 하는.
녹턴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의 싹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그 기대는 바로 무참히 깨어졌다.
- ‘우리’가 바로 찾아가겠다. 기다리거라, 겁 없는 놈.
그래, 그럴 리가 없겠지.
‘하, 씨. 이 X 같은 새끼.’
성격이 전생과 미묘하게 다른 듯했지만, 또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 듯했다.
“후.”
놈은 아마도 자신들이 말이나 행동으로 내뱉는 감정의 편린을 통해 정신파로 그 뜻을 읽고 있을 터였다.
아래층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이 대미궁에서 4~5층의 차이를 격하고 그게 가능하다는 것부터가 사기적인 능력이었지만.
“잘 있어라, 겁쟁이 놈! 우리가 좀 바빠서 어울려 줄 수가 없네!”
그만큼 긁어 대기에도 좋았다.
- 기다려라. 찢어 주겠다. 하찮고 이상한 놈.
곧바로 분노 섞인 영파가 느껴지자, 타이니는 씩 미소를 지으며 바로 돌아섰다.
“흥, 누가 기다려 준다더냐? 가자, 루나.”
“루나, 아니고, 누…….”
“어쨌건 가자.”
“칫.”
분하지만, 정말 여기서 끝이다.
다시금 그렇게 다짐하며 발걸음을 떼려는데, 놈의 정신파가 이어졌다.
- 불쾌한 놈. 하찮은데, 강한 놈. 이상하다. 경계한다.
‘예전보다 확실히 말이 많은데?’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나열에 이어.
- 우리의 ‘히%$’을 시험할 만한 제물. 놓아 주지 않겠다.
단어 하나는 불분명하지만 그나마 알아들을 만한 정신파가 진득한 살기와 함께 울려 퍼졌다.
‘우리의…… 힘? 아니면 제물?’
그 불쾌한 의지가 실린 영파에 타이니가 다시금 인상을 찡그리는데.
- 보여 주마. 우리의 ‘합’이 가진 힘을.
‘합(合)이라고?’
이전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의 그 파장이 분명하게 해석되는 순간.
저 멀리, 그들이 한참 전에 지나온 위층과 연결된 통로 쪽에서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그그그그그극.
마치 대지진이 일어난 듯한 소음이 어렴풋하게 들려오더니, 이내 그들이 딛고 선 바닥까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당황한 타이니와 루나의 눈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 길을 막았다.
- 도망쳐 봐라, 하찮은 것.
- 사냥의 시간이다.
살기와 더불어 짜릿한 만족감마저 여실히 느껴지는 정신파가 그들의 안색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타이니의 예민한 감각은, 그들이 있는 48층의 마지막 광장, 그 아래로 향하는 통로 너머에서 무서운 기운들이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월랑이 당한 건 그 층의 거의 끝이었는데?’
대체 어느새?
하지만 당장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제엔장…….”
“타이니?”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루나 역시 안색을 굳히는데.
“일단 튀자, 루나!”
“응.”
순식간에 합의를 본 그들이 지나왔던 방향으로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고, 일행이 뒤로한 아래층의 진원을 중심으로 대미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