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201화 (201/500)

201화. 외로운 정령의 사투

“크르르르.”

서걱!

검붉은 기운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손톱에 자신을 감싼 투명한 검은 기운이 쉽게 찢겨 나가며, 살가죽이 살짝 베였다.

상처는 얕았지만, 동시에 스며드는 불쾌한 기운 때문에 상당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프다.

놈의 공격을 연달아 허용할수록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진짜 죽는 것이 아니라 해도, 그 고통은 쉽게 볼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킁!”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달의 늑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용맹하게.

“크와아아앙!”

콰아아아앙!

한껏 무게를 실은 앞발을 휘두르자 동굴 일부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혼의 경지가 오르지는 않았지만, 주인이 강해지며 자신의 신체 능력도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일격.

그러나 적은 너무도 손쉽게 그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그사이 다시 자신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손톱.

쩌어억.

주인이 ‘검은 그림자 갑옷’이라고 이름 붙인 새 능력, 그 거대한 거북이의 공격도 막아 냈던 갑옷이 놈의 일격에 허무하게 갈라졌다.

스각.

그에 다시금 생겨나는 상처.

“크르르.”

즉시 아물긴 했지만 불쾌한 통증이 여전한 걸 보면, 적의 저 강력한 손톱에는 특별한 힘이 부여된 것이 틀림없었다.

주인과 그 형제가 최근 들어 다루기 시작한 ‘빛이 어린 기운’보다 더 특별한 힘이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인 일행은 하루 거리 뒤에 있었다.

거의 자신만큼 똑똑한 주인이 겁이 많아진 탓이다.

그러니 지금은 혼자 힘으로 이 강적을 처리해야만 했다.

“크와아아앙!”

월랑은 다시금 포효를 내질러 전의를 돋우었고.

“찍!”

그 강적, 가소롭다는 듯이 자신을 비웃으며 내달리는 ‘작은 다람쥐’를 뒤쫓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치열한 격전은 몇 시간째 결판이 나지 않았다.

월랑은 월랑대로 덩치가 작고 빠른 적을 잡지 못했고, 적은 적대로 계속해서 회복하는 월랑을 끝장낼 수가 없었다.

“찌직.”

“크르르르.”

월랑은 화가 났다.

분명 덩치 차이는 수십 배였는데.

쾅!

스각.

“킥!”

이 작디작은 것의 앞발이 꽤 매웠던 것이다.

“크르르.”

게다가 자신의 공격은 또다시 헛방을 쳤고, 그사이 놈에게 배를 한 번 긁혔다.

아까 전부터 반복되는 패턴.

같은 수법에 계속 당하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작지만 기분 나쁠 정도로 강한 적은 성격도 더럽기 그지없었다.

이 근처에서 수도 없이 보아 온 가죽이 잘게 찢어진 마물들의 시체가 어찌 생긴 것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더하여, 하필 그중 대다수가 자신과 닮은 돌 같은 피부를 가진 늑대들이라는 사실은 월랑의 분노를 더욱 돋구기에 충분했다.

먹지 않을 사냥감까지 죽이는, 마수의 그 고약한 특징이 극대화된 형태.

즉, 녀석은 월랑이 가장 혐오하는 마물이었다.

‘끄응.’

결국 월랑은 결단을 내렸다.

주인을 등에 태워 ‘연결’이 강해진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혼자서는 놈을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결심했다.

집채만 한 크기와 질량을 바탕으로 47층의 강력한 마물들을 압도하며 질주해 온 월랑의 육체가, 그 순간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찍!?”

본래대로라면 덩치가 줄어든 만큼 질량도 줄어야 했지만, 몇 시간 동안 얻어맞아 온 월랑의 분노가 기존에 없던 방식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멀리서 빙의를 통해 상황을 지켜본 주인이 확실한 방향까지 제시해 주었다.

- 무게는 그대로. 집중해!

어마어마한 질량을 다시 압축하는 방식으로.

스스스스슥.

이미 주인의 특성에 따라 꽉 압축된 육체가 그 한계마저 넘어 더욱더 단단해지더니, 그만큼 강력한 힘과 탄성을 지닌 ‘작은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찌지직!”

스사삭.

그러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적이 빠르게 주변을 배회하며 연달아 손톱을 휘둘렀다.

그에 살가죽이 베였다가 다시 회복되는 시간의 반복.

“크르르.”

월랑은 그 고통을 분노의 연료로 삼아, 평상시라면 불가능했을 ‘극단적 압축 형상’을 완성했다.

우두두두둑.

- 그래, 잘했다. 드디어 7단계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

주인의 칭찬과 감탄 따위, 잠시간 뒤로 미뤄 두었다.

이제 응징의 시간이었으니까.

“크르르.”

거의 같은 크기로 작아진 자신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적을 보며, 월랑은 거세게 포효했다.

“꺄아앙!”

멈칫.

자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앙증맞은 포효가 터져 나오자 당황한 것도 잠시.

월랑은 그 부끄러움까지 분노로 바꾸며 녀석을 향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찌지직!”

스가가각.

강렬한 적의 손톱. 그 놀라운 절삭력은 여전했지만, 이 순간 월랑의 육체가 발휘하는 탄성과 속도는 직전에 비해 몇 배.

바람처럼 놈의 공격을 흩어 버린 월랑의 앞발이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놈을 가격했다.

뻐어어억.

쾅.

우르르릉.

그 일격에 놈은 단숨에 멀리 튕겨 나가 그대로 벽에 틀어박혔다.

흐뭇한 웃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쩌저적.

이내 놈이 박혀 든 벽에 금이 가는 것이 보이자, 월랑은 다시 인상을 쓰며 번개처럼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끼기……긱?”

돌벽을 뚫고, 아니 찢어 버리고 튀어나온 놈이 털썩 바닥에 내려앉는 순간.

어느새 그 바로 앞까지 접근한 월랑의 앞발들이 놈의 안면을 후려갈기며 번개처럼 좌우로 왕복했다.

빠바바바박.

몇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맞으며 쌓였던 분노를 일시에 쏟아 내는 양발의 불꽃 싸대기.

승패는 오래지 않아 갈렸다.

- 잘했다.

“킁!”

넝마가 된 강적의 시체 앞에서 월랑은 당당하게 승자의 콧김을 뿜어냈다.

- 앞으로 조금만 더 부탁해.

“크르.”

쫄보가 되어 버린 주인이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스스로 성장했음을 느낀 월랑은 마음 넓은 자신이 참아 주기로 했다.

“꺄아앙!”

다만 이 작고 강력한 육신으로는 적들에게 위협을 줄 수 없을 것 같으니, 다시 원래 크기로…….

- 지금 상태가 정찰에는 더 좋아.

“끼잉.”

전해져 온 명령이 불만스러웠지만, 이 또한 마음 넓은 자신이 참기로 했다.

덩치가 작아진 만큼 새끼 때 습관이 나오는 것 같아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 우리 월, 어쩜 이리 귀여울까.

주인이 굳이 해석해 주지 않아도 쓰다듬는 손길만으로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좋은 냄새가 나는 금색 털 인간 암컷을 떠올리면 참을 만했다.

멈칫.

그러고 보니, 지금 주인 곁에 있는 암컷은 덩치 큰 자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킁…….”

뭐, 일단은 주인의 의견에 따라 지금의 몸 크기를 유지한 채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자신만큼 똑똑한 주인이니까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었다.

총총총.

월랑은 작은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며 빠르게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 층의 끝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전방에서 풍겨 오는 냄새가 이미 알려 주고 있었다.

성장한 만큼 예민해진 영혼 탐지 능력은 착실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이내 그 결과는 멀리 떨어진 주인에게도 바로 전해졌다.

* * *

“음…….”

“왜? 괜찮아?”

타이니가 신음을 뱉자마자 루나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무려 하루 거리, 그것도 인간의 걸음이 아닌 월랑의 속도로 하루가 걸리는 거리까지 소환을 유지하는 것은 타이니에게 아직 힘겨운 일.

영체 상태로는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질 수 없고, 힘을 아주 조금만 투자한 소형화 버전의 월랑은 마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변 마물들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 결국 월랑을 완전 소환한 상태로 전투를 반복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랬기에 타이니가 이상 반응을 보일 때마다 루나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직전까지 몇 번 피를 토하는 것도 보았으니,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

물론 타이니는 오히려 그게 정령술 수련이 되는 것 같다면서 좋아했다. 실제로 직전에는 월랑이 극적인 변화를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신음한 것은 전투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여기도 계층주가 없어. 내려간 거 같아.”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나온 탄식이었다.

“싸운 흔적도, 없어?”

“그래. 같이 내려간 거야. 이거 진짜 최악의 상황이 맞는 거 같은데…….”

가정이 점차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데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위험, 하겠네.”

“응.”

“그럼, 취소? 돌아가?”

“아직은 아냐. 지금은 조금 더 거리를 늘리는 걸로 하자. 아예 아래층으로 먼저 가게 하는 것도 좋겠지.”

“월, 고생, 많이 해.”

“어쩔 수 없지.”

“돌아오면, 많이, 쓰다듬어, 줄 거야.”

“……그래.”

결정을 내린 후 영혼의 반려에게 바로 그 생각을 전하자 즉각적으로 답이 돌아왔다.

- 컹!?

싫다는 뜻.

‘미안, 조금만 더 부탁해.’

타이니는 애써 녀석을 다독이며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아프게 하는 게 살짝 양심에 찔려 왔지만, 월랑의 통증은 자신도 일부 감당하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먼 거리에서 소환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었으니, 지금 그는 상시 수련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점차 우리 연결이 강해지고 있는 거, 너도 느끼고 있잖아.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

- ……킁.

지금 월랑의 무력이라면, 아까처럼 방어막을 관통하는 이상한 특성을 가진 초월마수가 또다시 나타나지 않는 이상 무난하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월랑의 걸음으로 하루 거리, 여기서 더 거리를 벌리면…….’

지금으로선 거의 작은 나라 영토의 끝에서 끝까지도 소환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충분히 층 하나 거리도 가능할 테고, 자신과 월랑이 집중하면 서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바로 전달받을 수도 있으니.

‘넌 최고의 정찰병이야. 월랑.’

- 킁!

‘네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어.’

- 킁. 킁!

‘그러니 조금만 더 애써 줘! 부탁해! 고마워!’

- 컹!

입에 발린 소리들을 늘어놓은 끝에 녀석에게 나만 믿으라는 의지를 전달받고서야, 타이니는 미안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작아진 월랑의 정찰 효과는 더욱 뛰어났다.

월랑이 그 작은 몸으로 빠르게 허공을 밟고 질주하면, 반 박자 늦게 녀석의 기운을 느낀 마물들은 미처 그 뒤를 따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커다란 덩치를 유지할 때와는 진행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 자연히 그 뒤를 따르는 타이니와 루나가 할 일이 많아졌다.

“간다!”

콰아아아앙!

“맡겨, 둬.”

스각.

“꾸에에에엑!”

“먹지도 못하는 놈이, 닥쳐!”

꽈아아아아앙!

거듭되는 전투.

워해머가 일으키는 노을빛 폭발음과 소리 없는 그림자가 만들어 낸 죽음의 침묵이, 48층을 연달아 물들여 가며 초월급 마수들조차 조용하게 만들던 그때.

한바탕 전투를 끝낸 타이니가 그나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슴 형태의 마수를 들어 올리려다 멈칫했다.

얼마 전에 잡았던 그 돌덩어리 같은 늑대는 월랑 생각도 나고, 몸 대부분이 돌이기도 해서 먹기 좀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사슴 마수의 시체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이놈……?”

“왜?”

“아니, 전생에는 이놈이 여기 계층주였던 것 같아서. 그때보다는 많이 약하지만.”

“어?”

놀란 루나를 뒤로한 채, 타이니는 전신에 뿔이 난 사슴 형태 마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래, 맞아. 덩치도 좀 작고 뿔 수도 적지만.’

그의 기억으로는 이놈이 거의 현생의 40층에서 만난 그 거북이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초월 마수급에 갓 오른 정도였을 뿐이다.

실제로 먼저 내려간 월랑은 진짜 이곳 계층주의 흔적을 확실히 보았었다. 지금 이놈보다는 훨씬 강력할 것이 분명한 놈의 자취를.

“그렇다면 미래에는 그놈이 사라지고 이놈이 계층주가 되었다는 건데, 대체 십수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을 해 보지만, 답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더, 내려가 봐야, 알겠지.”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그러던 그때.

- 컹!

영혼의 반려가 전해 오는 신호가 들렸다.

“잠깐.”

자연스레 하던 말을 끊고 월랑에게 빙의하는 순간.

“쿨럭.”

푸하학.

타이니는 갑작스러운 기침과 함께 입 밖으로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타이니!!”

쿨럭. 쿨럭.

그에 놀란 루나가 다가오려 하자, 연달아 기침과 피를 토해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은 타이니가 손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흐, 하. 후. 읍.

깊게 심호흡을 반복하길 잠시, 이내 그가 창백한 안색으로 살짝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괜찮, 괜찮아.”

“어, 어어.”

쿨럭.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한번 기침과 함께 옅은 피를 토해 낸 타이니가 그녀를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월랑 먼저 보내길 정말 잘한 거 같아. 놈들이 49층에 있어. 50층이 아니라.”

“그럼…….”

“어, 신호를 보내길래 빙의했다가 제대로 한 방 먹었네. 젠장.”

“월은?”

“타격을 크게 받았어. 삐진 거 같아. 뭐, 억지로 소환한다 해도 하루는 쉬어야겠지만.”

“그럼 역시…….”

최악의 상황인 건가?

루나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은 타이니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표정과 일치하지 않는 대답에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과, 달라?”

“아니, 예상보다 더 최악이야. 훨씬 더…….”

타이니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