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더 깊이…….
“여응차.”
쾅.
“쯧.”
서걱.
회색빛이 가득한 세계.
두 남녀가 엄청난 돌무더기가 쌓여 거의 작은 산만 한 규모의 폐허를 발굴, 아니 파괴하고 있었다.
41층으로 내려가기 전, 타이니와 루나는 그야말로 박살이 나 버린 광장의 잔해를 치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육체노동의 강도를 말함이 아니었다.
“찝찝해.”
“조금만 참아!”
마나 샤워를 하거나 대미궁 지저 호수의 역한 물로 대충 씻어 내고는 있지만, 두 사람의 몰골은 꾀죄죄하기만 했다.
타이니의 초월무구 아니무스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조차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는 상태였고, 얼룩과 검댕으로 더러워진 얼굴 등은 이젠 그냥 일상이었다.
물론 지금 두 사람의 경지가 위생 상태 좀 불량하다고 병에 걸릴 수준은 아니지만, 이미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쌓인 정신적 피로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마기 섞인 공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은 지금쯤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굉장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 것이다.
‘전생에 내가 그랬으니까.’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때의 그는 찍소리만 들려도 가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그 소리를 낸 놈과 함께 주변을 모조리 박살 내 버렸었다.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 얼마나 미쳐 버릴 수 있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마물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는 것쯤이야 스트레스의 축에 끼지도 못할 터였다.
지금은 그나마 그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덕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는 것이다.
우드드득.
쾅.
바로 죽여 버린 마수의 신체 일부를 재활용하자는 생각.
그렇다.
지금 그들이 광장의 잔해를 치우는 데엔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를 만들기 위함도 있었지만, 타이니가 박살 내 버린 40층의 계층주, 그 이름도 모르는 괴물의 등딱지를 갑옷으로 만들어 보자는 루나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러는 와중에 나온 말이 타이니를 한숨 짓게 만들었다.
“근데, 이 대미궁. 내려갈수록, 점점 더 커져. 이상해.”
쾅.
“끙, 대미궁은 원래 그래. 지금은 다른 게 문제지.”
콰직.
“몬스터가, 네 말보다, 너무 세서?”
쿵.
“그래, 그거.”
쩌저적.
“전생에도 38, 39층부터 초월급 마물들이 계층주로 나오긴 했어. 그런데 아무리 40층의 계층주라도, 아까 그놈처럼 강하지는 않았어.”
“거의 8단계, 닿은 것처럼, 느껴졌어.”
“어, 나도.”
그 말이 잠시간 정적을 만들었고, 이내 타이니의 입에서 한탄 섞인 답이 튀어나왔다.
“좀 많이 위험해지긴 했지.”
이래서야 45층쯤에 8단계 악마급 몬스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 기준으로 이름을 가진 마족, 즉 악마. 마계 기준으로는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다섯 계급(Duke, Marquess, Count, Viscount, Baron)으로 나뉘는 8단계 마계 귀족들.
그중 최강급인 후작급 마족들은 마계 대공이라고도 불리는 칠죄종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마계 군단의 주력군을 이끄는 장군들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8단계 몬스터들 사이에서도 그 실력 차가 크게 나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최하 계급만 되어도 7단계와는 격이 다르다.
더구나 더욱 큰 문제는.
“……나도 두 놈밖에 못 만나 봤지만, 대미궁의 8단계 몬스터쯤 되면 이성도 있고 똑똑해. 웬만한 고위 마족들처럼 정신파로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그 말에 루나도 미간을 좁혔다.
본디 마기는 폭력성을 동반하기에, 이성을 가진 마물은 고블린이나 놀 같은 약한 몬스터들뿐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타이니에게 듣기론 마수병단의 고위 마족들은 죄다 이성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간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진짜……?”
“어. 뭐, 하는 말이라곤 죽이겠다, 잡아먹겠다 정도가 거의 전부긴 했지만, 둘 중 한 놈은 함정도 파고 속임수도 썼어. 부하들을 먼저 동원해서 간을 보기도 했고.”
그 둘이란 전생에 49층, 50층의 계층주들을 말함이었다.
특히 그중 후자는.
‘녹턴을 가지고 있던 그놈. 지독했지.’
여러모로 타이니에게 의미가 있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당장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히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툭 내뱉었다.
“그놈이 아니라 더한 놈이 나와도 좋으니, 녹턴 좀 들고 나왔으면 좋겠다.”
“녹턴?”
“음, 전생에 내 무기. 몇 번 말했잖아.”
“아, 그 초월무구.”
녹턴을 언급하자 오히려 루나가 눈을 빛냈다.
“나도, 초월무구, 얻을 거야.”
그 말 한마디가 다시금 두 사람의 의욕에 불을 지폈다.
“그래. 이전과 달라졌다면, 나올 때까지 미궁을 파고들면 되지. 혹시 알아? 녹턴보다 좋은 걸 가진 놈이 있을지?”
물론 그런 놈이 진짜 있다면 딱 그만큼 더 위험해지겠지만, 지금 두 사람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 따윈 떠오르지 않았다.
“동생 먼저. 그다음에, 나.”
“그래. 어차피 수련을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긴 하니까. 녹턴이든 뭐든, 보물 토해 내는 놈 나올 때까지 가 보자.”
“좋아.”
그렇게 두 사람이 투지를 불태우자 주변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단순히 비유적인 말이 아니었다. 이미 종의 한계를 초월하여 파괴의 권능을 손에 넣은 두 사람의 의지에 따라, 주변의 공기와 마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느끼며, 타이니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오러유저의 경지에 오르면서, 애초에 대미궁행을 택했을 때 상정한 최소 목표는 이미 이루었다. 실제로 지금 그는 전생에 비해 경지가 부족함에도 당시의 힘을 거의 따라잡았으니.
‘아니, 공간의 권능을 제외하면 오히려 지금이 더 강하겠지.’
머릿속에 개념만 잡힌 그 환상의 일격을 완성하진 못했지만 순수한 파괴력은 이미 전생을 뛰어넘은 것 같았으니, 이제 막 오러유저의 경지에 오른 입장으로선 상상을 초월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물론 8단계에서 터득할 공간의 권능 자체가 워낙 사기적이기에 전투력 차원에서 그 수준을 완전히 넘어섰다 말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목표는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만족할 때가 아니야.”
“응?”
“녹턴이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초월무구가 있다면 모르지만, 아직은 모자라.”
“그게 무슨 말?”
“음? 아, 그건…….”
지금의 경지로는 혼자서 글러터니를 잡는 것은 고사하고, 그 싸움에 끼기조차 힘들 것이란 말이었다.
9단계의 마족 칠죄종, 글러터니 하나만 해도 8단계의 초인이나 그에 준하는 초월무구를 가진 이들만이 대적할 수 있었으니.
오러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해도, 영혼살(靈魂殺, Soul killing)이 가능한 괴물 앞에서는 오러유저조차 일격에 죽을 수 있는 미물에 불과했다.
그러니 군단장을 상대하려면 8단계,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올라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거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효과가 있는 초월무구나 아티팩트가 필수였다. 오러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전생에 10대 기사는 그것을 막기 위한 무구를 지원받았어. 루나, 너도.”
“나도?”
“그래, 황실에서.”
놈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공격력이 있으면 뭘 하겠는가. 그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죽을 텐데.
‘아니무스라면 영혼살을 버텨 줄 거 같기도 한데, 확신할 수가 없네.’
하지만 설령 버틸 수 있다 해도, 전생의 그와 똑같은 한 사람 몫을 겨우 해내는 것뿐이니 안주할 순 없었다.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은 고작 전생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적어도 나 혼자 칠죄종을 잡을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해야 해. 그게 최저 목표다.”
그 마음을 굳이 말로 뱉어 내며 다시금 각오를 되새기는데.
“그럼 나도!”
불끈 주먹을 쥐는 루나를 보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데스 나이트들…….’
본래의 역사에서는 아마도 없었을 괴물들.
강림 이전에는 소환이 불가능하다는 초월급 마족이 벌써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솔직히 대미궁의 심부에서 뛰쳐나온 괴물들을 악마추종자들이 거둔 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건 너무 과한 낙관일 터.
뭔지 몰라도 전생에 비해 나쁘게 틀어진 것이 있다고 봐야 했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검제가 알아서 놈들을 뿌리 뽑겠다고 했다. 에스티나 역시 그랬으니 믿어야지. 저릭은…… 뭐 그렇다 치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좀 찜찜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 조금 서두를까?”
이미 질주하다시피 대미궁을 통과하고 있으면서도, 타이니는 조금 더 속도를 낼 것을 제안했다.
루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폐허를 뒤지는, 아니 부숴 가는 그들의 손길은 더욱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그 이름 모를 괴물의 등딱지는 예상대로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텅!
가볍게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반동.
“진짜, 말도 안 되게, 튼튼해.”
그 넓은 면적에 미약한 오러를 투사하는 것만으로 루나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내던 강도와 탄력은, 조각조각 부서진 상태에서도 여전했다.
“그런데, 이걸 전부, 한 방에…….”
루나의 감탄 어린 시선이 타이니에게 향할 때, 그는 팔뚝만 한 파편을 집어 들고 노을빛 오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우우우웅.
‘확실히 편해.’
폭발 속성을 재개화한 뒤인지라 불 속성을 만들어 내기도 한결 쉬웠다.
츠츠츠츠츠.
불꽃을 품은 오러에 의해 테두리가 타들어 가며 조금씩 그가 원하는 형태로 변해 가는 껍데기.
그것을 보면서 타이니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또다시 깊어져 갔다.
‘확실히 폭발 속성은 불 속성과는 다른 거였어.’
지금 그는 폭발 속성에서 불 속성을 분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두 가지 속성을 다루게 되면서 다른 속성을 다루는 게 더 수월해진 것뿐.
그리고.
“난, 이거, 녹일 정도는, 안 되는데?”
시무룩해진 루나의 표정을 보니 또 다른 것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미 속성이 정해진 마나에서 억지로나마 다른 속성을 뽑아내는 일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짓이라는 것.
또 거기에 오러까지 응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천재에 속하는 루나에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전생에는 당연히 폭발이 불 속성의 진화판이라서 가능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럼 이런 것도…….’
츠츠츠츠.
의지가 움직이는 순간, 불꽃을 담고 있던 오러가 일순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며 모양이 잡혀 가던 껍데기를 식히기 시작했다.
“……되네.”
맥이 탁 풀릴 정도로 쉽게 변환되는 속성.
물론 영혼에 각인된 주 속성이 아닌지라, 이런 식의 속성 활용을 급박한 전투에서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확히는 소모되는 정신력과 마나에 비해 효율이 굉장히 떨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의지를 상당히 집중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타이니는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수중 전투에서 머릿속을 스쳤던 폭발 속성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 마기의 마나 치환으로 얻은 에너지 본질에 대한 깨달음까지 더해지면서, 더 ‘위’를 향한 계단이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진 것이다.
“루나, 여기.”
가공이 끝난 껍데기가 허공을 지나 루나의 손에 잡혔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껍데기와 타이니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팔꿈치 보호대로 써. 딱 맞을 거야.”
“어?”
“많이 찢어졌잖아. 힘줄이나 가죽 남아 있는 거 봐서 끈도 만들어 줄게. 아니다, 이참에 의복도 대충 만들어 보자. 가죽도 꽤 질기고 강한 놈이었으니.”
“으응.”
그 말에 한껏 감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루나는, 천이 해어져 드러난 팔꿈치에 그 보호대를 대 보더니 다시금 눈을 빛냈다.
“내 동생, 재주 많아.”
그 지나치게 감탄한 듯한 표정에 타이니는 괜히 머쓱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살려고 배운 잔재주야. 진짜 장인들만은 못해. 재료가 원체 좋으니 어느 정도 질이 보장되긴 하겠지만.”
“네 거는?”
“나는 아니무스가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루나의 시선이 훤히 드러난 자신의 무릎과 해진 신발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바꿨다.
“……무릎 보호대나 신발 정도만 만들어야지. 나머지는 루나 갑옷 만들어 줄게.”
“응. 근데…….”
“그런데?”
“루나, 아니고. 누나.”
이미 지겹도록 들은 그 말에 타이니의 볼살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그 말 좀 그만하면 안 될까?”
“누. 나.”
“하. 그래, 알았어.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됐……. 하, 참.”
잠깐 심술을 부린 것인데, 오히려 누나 소리를 들을수록 좋아하는 루나를 보니 뭐라 더 말을 하기도 곤란했다.
‘그래, 이런 데 신경 쓸 때가 아니지.’
헛웃음이 나왔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세의 마경이라 불리는 대미궁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감정.
그것이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상당량 해소해 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암석을 부수고 그 파편을 가공하는 그의 손길은 점차 빨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