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벼락의 주인
문나이트, 실버 팽.
그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늑대 수인족 전사는 두 가지 사실로 유명했다.
첫 번째는 당대의 수인족 중 유일하게 오러를 깨우친 초인이라는 것.
거기엔 인간 사회에서 칭하는 7대 기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순수 인간 상태(Human Form), 수인화(Beast-human Form), 짐승화(Beast Form)의 세 가지 방식으로 의태할 수 있는 수인족들은 그 특별한 능력만큼의 부작용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지는 정체성 혼란에서 기인한 광기였다.
고대 최초의 수인족, 라이칸스로프의 핏줄을 이어받아 늑대인간의 형질이 발현되는 것은 오직 왕족들뿐.
대다수의 수인족들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높은 확률로 부모와 다른 짐승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어떤 이는 수인의 모습으로, 어떤 이는 또 짐승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분명히 같은 피를 이었을진대 부모와도 다르고, 형제와도 다르다.
주변의 같은 종족이라 칭하는 이들과도 다르고, 심지어 어렸을 때는 자의와 상관없이 세 가지 형태 중 하나로 모습이 수시로 변하기까지 한다.
태어나자마자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정체성 혼란. 그것은 그 뛰어난 육체 능력과 섞여 높은 확률로 폭력적인 광증을 동반한다.
그러다 보니 그중 많은 수가 성장기에 자살하거나 폭주하여 죽고 만다.
그래서 수인족은 세 가지 변신 형태를 자신의 의지대로 완벽하게 다루게 되는 순간부터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만월이 떠오르는 밤에는 발작하듯 날뛰며 폭력성이 강해지는 수인족이 태반.
아스란 제국이 ‘짐승과 섞인 자들은 교류할 대상이 아니다’라며 그들을 무시하는 것도 그 사실에 기인했을 정도니, 광기는 수인족의 숙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수인족이 높은 경지의 주술이나 마법을 다루거나 마나유저가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단순히 마나를 다루는 것을 넘어 그것을 극한까지 압축하고 정제함으로써 파괴의 권능을 발휘하는 오러까지 발현하는 것은 인간에 비해 훨씬 어렵다.
일반 기사급 전력은 그 어떤 종족에 비해도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보유한 수인족이, 인간의 제국이나 오크와의 종족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에 하나 혹은 몇 세대에 걸쳐 한둘 정도 그 한계를 벗어나는 수인족이 탄생하였으니, 웨어비스트 왕국에서 그런 수인들을 극도로 공경하고 받드는 문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오러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대장군의 위를 받고, 한 가지 속성을 지배하여 마도사의 위에 오르는 것만으로 재상직을 얻으며, 영물의 능력을 완전히 체화한 대정령사는 왕국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다만 그조차 마땅한 인재가 없어 몇 대씩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중에서도 수인족의 광기를 자극하기 쉬운 전사 계급의 정점, 오러유저는 더욱 드물었으니.
달빛의 기사(улайдсвьд кдел), 은빛 바람(вьыйдс йлалф)은 무려 백오십 년 만에 나타난 오러유저, 수인족의 대장군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무려 두 가지 초월무구의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флывтоа влащ ылыьы фтцоквдул!(달빛 아래 나는 무적이다!)”
우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앙.
달빛 아래 샛노란 빛을 머금은 거대한 도끼 창(Halberd)이 어마어마한 벼락을 토해 내며 전면의 공간을 온통 휩쓸었다.
“끄아아악!”
“끄륵!”
“ущцлвктывдб елаетаьа Еьыул!(대장군이 살수를 쓴다!)”
“пьчвоцг!(흩어져!)”
백여 명에 가까운 추격조가 일격에 뼛조각까지 재로 변하자, 그 뒤에서 용케 살아남은 이들이 제각기 비명을 토해 내며 흩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초월무구, 벼락의 주인(Lightning Lord)에서 쏟아진 샛노란 번갯불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숲속으로 숨으려던 이들을 통째로 불태웠다.
“끄아아악!”
우르르르릉.
꽈아아아앙!
벼락 속성을 개화한 수인족 오러유저만이 쓸 수 있는 초월무구이자, 주인의 스피드를 몇 배나 끌어올리며 번개 속성력을 대마법 수준으로 극대화하는 능력을 가진 할버드, 라이트닝 로드.
그뿐만이 아니었다.
“флйойвьа Ео!(마법을 써!)”
“прлела! прлавьа Еоал!(화살! 활을 써라!)”
파바바바박.
타다다다당.
“ервнввойеул! ыщкл ытктыцд вдцвоЕыл йрктыл, фовсовплы коеуьа!(소용없다! 내가 누군지 잊었나 보구나, 멍청한 것들!)”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쏟아지던 불덩이와 화살의 세례가 그의 털 자락에 부딪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양어깨와 허리, 정강이만을 가리고 있는, 그 일견 허술해 보이는 청록색 파츠 갑옷이 부여한 강철 같은 전신 방호력 덕분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두 번째 초월무구이자 은빛 털을 가진 늑대인간 오러유저만 착용할 수 있다는 달빛의 갑옷, 문 아머의 ‘두 번째’ 효과였다.
역대 대장군 중 극소수만이 다룰 수 있었던 두 초월무구를 모두 온전히 다루는 자.
그렇기에 그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여유롭게 추격자들을 박살 내 버린 실버 팽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나를 쫓는 데에 고작 이 녀석들만 보냈을 리는 없는데?’
추격조들이 너무 약한 녀석들뿐이라는 점이 내심 찜찜했던 것이다.
해골 기사들이야 대놓고 내보일 수 없는 전력이라 하더라도, 다른 장군이나 정예들을 보낼 수는 있었을 텐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추격조의 생존자들을 쫓으려 한 순간.
그를 향해 번개처럼 쇄도하는 한 족제비 수인족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던 찰나, 달려온 족제비 수인은 그대로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음? 추격조가 아닌가?”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저는 갈색 바위(клаещк йлвтд) 장군님 휘하의 정찰대 소속입니다. 저희 장군님께서 대장군님께 전하는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호오? 곰탱이가?”
그 뜻밖의 소식에 실버 팽의 굳은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맺혔다.
갈색 바위는 제국의 병사들에게는 갈색의 공포 혹은 괴수 곰 따위의 흉명으로 불리는 웨어비스트의 곰 수인족 장군이자 자신의 친우였다.
그 ‘곰탱이’라는 호칭에 족제비 수인이 움찔한 것도 잠시, 이내 그는 각 잡힌 자세로 천천히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뱉어 냈다.
“일곱 장군님 중 갈색 바위 님과 잿빛 번개 님, 그리고 푸른 주먹 님 세 분은 대장군님을 추살하라는 명을 따르지 않겠다 표명하셨습니다. 그분들 모두 이 사건이 그 ‘후계자 놈’이 저지른 반역 사건이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증거가 없을 텐데.”
“그래도 대장군님과 함께한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세 장군님 외에도 많은 병사들이 이번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친우들의 의견인가, 아니면 자네…….”
“갈색 바위군 정찰조 십인대장, 질풍(цдамтв)이라고 합니다, 대장군님.”
“그래. 질풍, 자네의 의견인가?”
“아닙니다. 저뿐만 아니라 자각 있는 왕국 병사들 모두가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가.”
추측을 말하면서도 하등 망설임이 없는 것을 보니 적어도 저 병사, 질풍은 확실히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적어도 헛산 건 아니었군.’
우울하던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 생기는가 싶었는데, 질풍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희 장군님께서는, 대장군께서 저희와 합류해 그 수상한 후계자를 밀어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실버 팽은 순간 움찔했지만, 잠시 머리를 굴려 보고는 이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더러 왕국을 반쪽 내서 내전을 벌이라는 건가?”
“그게 정의로운 방향 아니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왕국은 결국 그 수상한 놈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대장군님 같은 구심점이 없다면, 세 분의 장군님들도 더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을 테니까요.”
질풍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고대 순수 라이칸스로프의 은혈을 보인 수인족.
아무리 수인족이 부모와 상관없는 짐승의 종과 능력을 타고난다고는 해도, 혈육들과 아예 피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고대 라이칸스로프의 은빛 피를 보이는 순혈 종의 등장이라니, 왕국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더랬다.
하지만 웨어비스트 왕국은 수인족 특유의 광기를 억제하기 위해 법과 율법으로써 통치되는 나라.
고대부터 전해 온 율법을 어길 수는 없기에, 일단 그 순혈을 후계자 중 한 사람으로 삼은 것이다.
‘그놈이 이따위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지. 대체 악마추종자들이 무슨 수로 고대의 라이칸스로프를 재현한 걸까?’
실버 팽은 이미 그렇게 심증을 굳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안 돼.”
“예?!”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게 그놈들이 원하는 거겠지.’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악마추종자들이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 상황에서 왕국을 두 쪽 내 내전을 벌여 가며 누명을 벗는다 한들 무엇이 남겠는가.
피폐해진 왕국과, 더욱 피폐해진 국민만 남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 마음은 잃지 말고 간직해 달라 전해라. 나는 외부에서 왕국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놈을 몰아낼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대장군님!”
“그만 가거라, 병사. 괜히 다른 이의 눈에 띄어 친우들에게 내 말을 전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이미 각오를 굳힌 그의 얼굴과 흔들리지 않는 기세는 눈앞의 질풍에게 여실히 전달되었다.
더 이상의 부언이 없어도 확연히 전해지는 그 결심에, 족제비 수인은 그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보중하십시오, 대장군님.”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질풍은 조금 전 이곳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바람처럼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제국, 아니 발렌티아로 간다. 거기서…….’
그가 사라진 직후, 실버 팽이 기사 친구를 뉘어 놓은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 이거 이거, 듣던 것과는 달리 동족들에게도 자비가 없으시군요, 문나이트.
귓가에 들려오는 불쾌한 목소리에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숲속 어딘가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 공용어.
하지만 그의 뛰어난 청각은 기괴한 울림 속에서도 말하는 이의 본래 목소리 일부를 감지해 냈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하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차자자자자작.
스스슥.
미약한 소음과 함께 수인족의 추격대가 물러간 자리를 새까맣게 메우며 모여드는 복면인들.
하나하나의 움직임은 다소 딱딱하지만 웬만한 기사급은 되어 보이는 속도였다.
게다가.
- 다른 이목은 전부 치웠습니다. 이곳에서 끝을 내 드리지요.
그 수가 얼핏 봐도 천이 훌쩍 넘는 듯했으니, 목소리에 어린 자신감이 이해가 갔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 수인족! 지금부터는 아스란 제국의 국경이다! 선을 넘는다면 참살하겠다!”
그가 가고자 했던 남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천의 병사들은 그의 표정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외진 곳에?’
황당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 대군이 펄럭이는 깃발에는 아스란의 정규군이 쓰는 황금용의 문양이 아니라 붉은 장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 선 푸른 머리, 붉은 눈의 젊은 기사가 버럭 고함을 지르는 광경에 그의 눈살이 또다시 찌푸려졌다.
제국과 수십 년을 싸워 온 그였다. 저 붉은 장미 문양이 어느 가문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저 푸른 머리에 붉은 눈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젊은 기사라면 그 정체는 당연히 삭풍의 기사일 터.
다만.
“……조금 이상한데?”
마나유저와는 조금 다른,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감각이 그의 육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당장 그보다는.
‘다른 이목을 치웠다는데, 로히터는 오히려 나타났다? 이것들이!’
로히터가 악마추종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쳐라!
이상한 목소리의 주인이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북쪽에서부터 검은 복면인들의 파도가 그를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흥!”
그 역시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몸으로 해결하는 것을 즐기는 타고난 전사였다.
“전부 태워 죽여 주마.”
우르르르르릉.
치켜든 라이트닝 로드에서 샛노란 번갯불이 번뜩이고, 이내 그 전광에서 이어진 벼락이 하늘이 아닌 지상을 내달리며 검은 복면인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르르르륵.
복면이 불타고 그 안에 살갗이 타들어 가다 못해 뼈까지 녹아내리는데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은 복면인들의 모습이 그를 섬찟하게 만들었다.
“미친!?”
소리 없이 달려드는 복면인들은 이내 바닥에 깔린 수많은 희생자를 발판으로 삼아 그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 미친 것들이!!”
콰아아아앙!
다시 또 쏟아 낸 일격에 모두 털어 냈지만, 놈들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 주, 죽어.
- 죽어.
- 죽어. 죽어. 죽어.
그 뒤쪽으로 그에게 익숙한, 해골마를 탄 채 투구 아래 푸른 귀화를 피워 올리는 기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
그를 이 지경에 몰리게 만든 주범들, 데스 나이트.
놈들이 복면인들의 파도 뒤쪽에서 그를 향해 쇄도하는 순간, 실버 팽의 눈이 뒤집혔다.
“이 개자식들이!!!!”
지금은 저번과 다르다, 박살을 내 주마.
꽈아아아아앙!
다시금 휘둘러진 라이트닝 로드가 최대치의 벼락을 뿜어내며 다가오던 데스 나이트들을 한 번에 밀어 냈다.
그러고도 남은 힘으로, 그는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며 감각을 한없이 가속시켰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한 번에 끝낸다.’
비전 오의, 천둥 늑대의 질주.
“아우우우우우!”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하울링과 함께 그의 거대한 몸이 샛노란 번갯불에 휩싸이더니, 해골마를 탄 기사 중 하나를 향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 죽……!
똑같은 말만 내뱉던 데스 나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쩌어어어어억.
놈의 장창이 미처 휘둘러지기도 전, 그의 라이트닝 로드가 놈과 그 해골마를 통째로 갈랐다.
콰아아아아앙!
일격이 휘둘러진 이후 터진 엄청난 폭음. 그와 함께 터져 나온 번갯불 섞인 오러가, 그의 몸으로 파고들려던 암흑 오러의 잔재마저 남김없이 태워 버렸다.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실버 팽은 이미 막대한 부하가 걸린 몸뚱어리에 한 번 더 힘을 끌어모았다.
무리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이럴 필요가 있었다.
‘이놈들부터 끝내야 한다.’
까드드득.
절로 이가 갈릴 정도로 저릿저릿한 통증과 함께, 다시금 그의 몸에서 거센 벼락이 솟구쳤다.
이중 가속, 천둥 늑대의 폭주.
그의 거체가 그대로 샛노란 전광이 되어 두 번째 데스 나이트를 향해 쏘아지는데, 그 잠깐 새에 합세한 놈들이 그를 향해 암흑 오러가 담긴 무기를 휘둘렀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암흑 오러를 두른 대검과 할버드.
한없이 가속된 시간 속에서 그 움직임을 포착한 실버 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능이 없는 거 아니었나?’
하지만 이미 휘둘러진 공격을 거둘 여력은 없었다.
번쩍.
콰아아아아아아앙!
- 죽…….
- 주우…….
폭음과 함께 두 데스나이트의 해골마가 폭파되며 놈들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는 실버 팽의 얼굴은 오히려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한 놈도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온몸에서 전신의 신경이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 순간, 그는 결정을 내렸다.
‘한 번 더 간다.’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삼중 가속.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올라야 가능할 것이라 추측했던 기예.
지금 그것을 쓴다면 만월 아래의 늑대인간이 가진 재생력으로도 회복 못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어.’
가슴이 서늘해지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는 것도 잠시.
이미 수십 년간 전장에서 살아온 전사는 익숙하게 그 공포를 털어 냈다.
- 나는 전사다.
전장에서 죽는 것은 오히려 영광일 뿐.
죽음을 각오한 실버 팽의 푸른 눈에 붉은 기가 감돌더니, 이내 그의 얼굴에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그 순간.
‘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생각은 길었지만, 그렇게 느낀 것은 신경이 자극되며 한계까지 가속된 그의 감각 탓일 뿐 실제로 흐른 시간은 짧았다.
데스 나이트 한 놈을 참살한 뒤 나머지 둘과 충돌해 놈들을 튕겨 낸 그 짧은 틈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벌어진 것이다.
“로히터의 병사들은 복면인들을 공격하라!”
“예!?”
“공자님!?”
갑자기 칼을 빼 든 삭풍의 기사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에 로히터의 병사들이 우왕좌왕할 때.
- 크아아아아앙!
- 사자!?
숲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의 주인은 난데없는 포효에 당황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지는 고함을 토했고, 달려들던 복면인들 역시 어쩐지 기세를 잃고 주춤주춤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 길을 뚫어라!!
두두두두두.
갑자기 숲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복면인들의 측면에서 20여 기의 기마가 수풀을 뚫고 나타났다.
꽈아아아아아앙!
마치 푸른 날개를 단 거대한 은빛 독수리 같은 형상을 그려 내는 이들.
한순간에 복면인들의 측면을 뚫어 낸 기사단은 그대로 실버 팽을 향해 달려왔다.
연달아 벌어진 이변에, 목숨을 건 도박을 하려던 그의 몸이 멈칫했다.
“푸른 날개…….”
젊은 시절부터 수없이 이를 갈았던, 한 인간족 기사단 특유의 집단 전투 스킬.
하지만 지금은.
“문나이트! 이제부터 블루윙이 모시겠소!”
그 선두에 선 은발 머리 기사까지도 더없이 반갑게만 느껴졌다.
‘북풍의 기사, 제나스.’
당장이라도 그들의 힘을 빌려서 저 빌어먹을 해골 기사들을 모조리 박살 내고 싶었지만.
- 어디서 정령이……!
꽈아앙.
숲속에서 들리는 폭음과.
- 죽어.
- 죽어.
그새 두 발로 다시 돌진해 오는 데스 나이트들, 그리고 역시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복면인 무리를 보니 그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았는지.
“일단은 자리를 피합시다, 문나이트!”
그렇게 외치는 은발 머리 기사의 제안을, 그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리로 오시오!!”
“공자님!?”
발렌티아와 숙적으로 알려진 로히터의 삭풍의 기사가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에 서슴없이 그쪽으로 달려 나가는 제나스와 기사들의 행동이 그의 눈에 이채를 띠게 했다.
‘정말 제국 전체가 나를 도우려는 것인가?’
그는 그렇게 턱도 없는 오해를 하면서도 기사단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혼자 목숨을 걸어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전력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당장 위중한 친구도 있었으니까.
“흡!”
파아아앙.
실버 팽은 그대로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라, 생전 처음 생긴 인간 친구를 챙겼다.
“……왔군.”
“그래, 아군이다.”
창백한 안색의 가렌이 미소 짓는 것을 본 실버 팽은 황급히 그를 들쳐 멘 채, 멀어지는 블루윙 기사단의 뒤를 바람처럼 따라잡았다.
그날 제국과 웨어비스트의 국경의 숲에서 일어난 분란은 대륙의 정세를 크게 바꾸는 시발점이 되었다. 타이니가 대미궁에 들어간 지 고작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 대미궁 안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