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실버 팽
“하하, 꼭 그렇게 섭섭하게 얘기하실 필요는 없지요. 그저 동맹을 확고히 하자는 뜻입니다. 실제로 로히터의 도움도 필요한 상황이지요.”
“아무리 문나이트라고는 하나, 웨어비스트의 총력으로도 그 초인 하나를 못 잡는다?”
노인의 변명에 가브리엘, 아니 라프탄은 빈정거리듯 쏘아붙였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고대의 순수 라이칸스로프에 가까운 은혈의 수인족이 웨어비스트 왕국에 등장해 후계위까지 올랐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발렌티아의 ‘정보’에 의하면 그 후계자가 말룸의 하수인일 확률이 높고 문나이트와 대립하며 반란을 일으킬 틈을 노리고 있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현실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허허. 웨어비스트의 율법을 이용해 빈틈을 찌른 것일 뿐, 그 왕국 내부에는 아직도 문나이트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으니까요.”
“그러니 우리 가문의 힘을 빌리겠다?”
“겸사겸사 삭풍의 기사님의 존안도 뵙고 말이죠. 관계도 돈독히 할 겸.”
어이쿠, 이렇게 감사할 때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프탄은 한 번 더 참았다.
‘지금 나는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 그렇다면…….’
그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애써 인상을 썼다.
“그럼 나는? 나라면 뭔지 모를 흑마법이 담긴 계약서에 피의 서명이라도 할 것이라 생각했나?”
“허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도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라프탄은 내심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저희는 그저 저희와 대공자님이 함께 있는 영상을 남기고 싶은 것뿐입니다. 계약서에 마법이 담겨 있지 않았다고는 하나, 영상까지 남겨 둔다면 공작 각하께서 저희를 쉽게 잘라 내실 수는 없겠지요. 대공자님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라프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겉으로는 고민하듯 짐짓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신 그 영상구를 하나 더 만들어서 내게도 줬으면 좋겠군.”
“예?”
그 제안에 주변 모든 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약점이 기록된 영상구를 가지고 있겠다? 뭐 하러?
주변인들로서는 그게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에 라프탄은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속내를 감췄다.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너희가 약속을 어길 수도 있지 않겠느냐?”
“호오, 그 말씀은…….”
“너희 쪽에서 약속을 어겨 우리 가문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경우도 생각해야지.”
“리엘 님!?”
“어찌 그런 불길한……!”
“그만! 이곳의 모든 일은 내가 결정한다. 잊었느냐?”
순간적으로 놀라 목소리를 높였던 검은 장미의 정예들이 그 날카로운 일갈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데, 흑마법사는 홀로 웃으며 의문을 표했다.
“허허, 그 콧대 높은 로히터의 대공자께서 그런 생각을 하신다고요? 공작 각하께서도 계약서를 요구치 않으셨기에 저희만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럴 리가? 귀족들은 다 저들이 영원할 줄 아는 멍청이들인데?
라프탄은 순간 뜨끔했지만, 표정만큼은 확실히 관리했다.
“만일의 경우를 말함이다. 그럴 경우, 절대 우리만 죽지는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네놈들이 보장하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려 줘야지. 다시는 네놈들에게 속는 협력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 말에, 내내 웃고 있던 노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 *
“Црсвлал(쫓아라)!”
“вд кьысовзео елалцгЕул(이 근처에서 사라졌다!)”
“цоЦрквдул!(저쪽이다!)”
파바바바박.
은빛 털을 휘날리는 거대한 늑대인간이 멀리에서 들리는 요란한 음성을 뒤로한 채 숲속을 질주했다.
내리쬐는 달빛을 그대로 반사하며 빛나는 은빛 털, 2m를 훌쩍 넘어가는 키, 드넓은 어깨에서 이어진 거대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상반신.
그의 등 뒤에는 덩치에 걸맞은 거대한 할버드가 상서로운 노란 빛을 뿜어내며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어깨와 하반신의 급소 및 정강이를 가린 청록색 파츠 갑옷은 치열한 추격전 와중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은 듯했다.
얼핏 보기만 해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 무구들의 주인은, 은빛 털이 수북한 사나운 얼굴을 숙여 자신이 안아 든 한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버텨라, 친구.”
그에 쿨럭하고 피를 토해 낸 인간이 창백한 안색으로 애써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얼마든지…….”
그에 늑대인간의 표정이 살짝 무거워졌다.
“내가 네 말을 믿지 못했다. 다시 한번 사과한다, 친구.”
“그, 그럴 수 있다. 상황이 급박했으니 이해한다, 친구.”
곤경에 몰린 자신을 돕겠다며 느닷없이 찾아온 기사.
-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나이트. 저를 따라오시지요.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의 신분이 문제였다.
그가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제국의’ 기사.
수십 년간 제국과 싸워 온 그가 어찌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기사는 자신을 잡기 위해 마련된 함정에 스스로 몸을 내던져 가며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고, 결국 그를 곤경에서 구했다.
‘산 것 자체가 기적이지.’
- 흐, 흐흐. 친구가 되겠다…… 했잖습니까.
기사가 털썩 쓰러지면서 남긴 말.
그 무식한 행동과 실행력이, 수십 년간 쌓인 편견을 깨트렸다.
일반 기사도 아니고 ‘신속의 기사’라면 발렌티아에서도 절대 버릴 수 없는 패이니, 고작 명령 때문에 몸을 던진 건 아닐 터.
그 정도 인물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 줄은 더욱 몰랐으니까.
“제, 제국은, 몰라도, 우리 발렌티아는 친구를 환영한다. 반드시, 제국으로.”
“……그래, 믿는다.”
금발이 잘 어울리는 갈색 눈의 중년인, 가렌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이용해 부상을 다스리는 것도 지금 그에게는 버거웠으니까.
하지만.
“그래, 믿어라. 더는 왕국의 병사라고 사정을 봐주진 않을 테니.”
이어진 문나이트, 실버 팽의 말에는 다시 억지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럴 필요 없다.”
“뭐?”
“나 때문에, 네 신념을, 꺾지 마. 그렇게 만들어서야, 후욱. 친구가. 아니다. 면목이, 없어.”
“……알겠다. 쉬어라.”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실버 팽은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기사 친구의 배려가 고마워서 대답만 그리했을 뿐.
‘솔직히 이제야 그러는 것도 늦었지.’
자신이 그 해골 기사들을 막지 못해서 왕이 죽었을 때, 그리고 그 누명이 오히려 자신에게 씌워졌을 때.
자신을 쫓는 병사들을 해치면 그 누명을 인정하는 꼴이 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틀어진 뒤였고, 자신이 병사들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도망치는 경로가 노출되고 말았다.
누명을 벗기도 전에 죽어서야 본말전도가 아닌가.
실버 팽, 고향의 언어로는 ‘은빛 바람(вьыйдс йлалф)’이라는 본명을 가진 달빛의 기사는, 친구를 안고 내달리면서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후회가 몰려왔다.
‘애초에 그 소문을 그렇게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어.’
오크와 제국의 은인이라 소문난 자가 고작 어린 인간이라길래, 수인족을 적대하는 두 국가들이 작정하고 어림없는 소문을 퍼트린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무시해서는 안 되었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다.
‘처음에 정신만 차렸으면 그 해골들 따위한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형님도 살렸을 텐데…….’
다 내 잘못이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 해골 기사들은 난생처음 보는 검은 오러를 사용하긴 했지만, 실제로 자신보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초월의 경지에 오른 괴물답지 않게, 놈들은 분명 상황 대처 능력이 현격히 떨어져 보였다. 왕이 죽은 뒤 자신이 도망치는 것도 막지 못했을 정도로.
물론 그 전에.
‘그 검은 오러에 마나를 흐트러트리는 침습 효과가 있다는 걸 미리 알고만 있었어도.’
자신이 그렇게 쉽게 당했을 리도, 왕이 죽었을 리도 없다.
달빛의 기사라는 고결한 이름이 이렇게까지 추락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제국과 오크, 엘프가 퍼트린 소문에 그 해골 기사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데스 나이트라 했던가…….’
그런데도 무시했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자신의 실력과 왕실의 방비만으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도망치는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번뇌를 고스란히 인정하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머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인간 친구의 부상이 심해. 이쯤에서 추격조를 전부 정리하고 간다.’
마음을 정한 순간, 그의 거체가 한순간에 높다란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뭐……?”
“잠시 쉬어라, 친구. 뒤를 정리해야겠다.”
탁.
굵직한 나뭇가지 위에 기사 친구를 내려놓은 실버 팽은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허공으로 뛰어올라 지면을 향해 낙하했다.
밤하늘 가득 달빛이 충만한 지금, 육체적 컨디션만큼은 최상이었다.
수인족들이 만월 아래에서 더욱 강해진다는 것은 이미 대륙의 상식.
그 중에서도 보기 드문 순혈에 가까운 은빛 늑대인간인 그는, 달빛이 충만한 밤에는 낮에 비해 1.5배의 힘을 낼 수 있으니.
‘아무리 문 아머(Moon Armor)가 항시 만월 효과를 준다 해도, 진짜 달빛 아래에서는 기분이 다르지.’
그 기분 탓인지, 실제로도 전투력이 상승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제아무리 초월무구라 해도 달빛이 수인족에게 주는 마력을 완벽하게 흉내 내기는 어렵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달빛의 마력과 수인화.
그것은 모든 수인족이 스스로를 선택받은 종족이라 여기는 이유이자, 신화시대의 계약, 그 전승의 흔적이었으니까.
쿵.
그 충만한 힘을 느낀 실버 팽은 착지하는 즉시 마나를 끌어모아 하울링을 터트렸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온 숲을 진동시키고, 기세를 숨김없이 드러낸 초인의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듯 밀려나며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전투를 시작하는 그만의 의식.
그리고 이내.
- врлал! ыщкл вгкд вдЕул(와라! 내가 여기 있다!)
엄청난 고함이 사방에 울리며 추격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ыщ цлафревьы ыщкл флыпрдплыулл, йлыуье!(내 잘못은 내가 만회한다, 반드시!)”
각오를 다진 달빛의 기사가 자신의 애병, 라이트닝 로드를 꺼내 든 순간.
“цокдул!(저기다!)”
“цтквг!(죽여!)”
그를 향해 멧돼지, 호랑이, 쥐, 오소리 등 다양한 형태의 수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뿜는 살기는 정말 자신을 향한 적의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그저 명령에 의한 것일 뿐일까.
‘아니, 그 갑자기 나타난 순혈 놈이 거절하기 힘든 대가를 제시한 거겠지.’
거기다 자신이 그동안 아무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무모한 용기도 있을 터.
같은 종족의 병사들을 보는 거대한 늑대인간의 푸른 눈에 순간 안타까운 빛이 어렸지만, 이어지는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цдврквзео йрцлКтыл, пвгвцзуьа(지옥에서 보자꾸나, 형제들).”
그의 거대한 할버드가 휘둘러지는 순간.
번쩍.
숲이 통째로 쪼개지는 듯한 착시 현상과 함께 샛노란 번개가 대지를 내달렸다.
파지지지직.
꽈아아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폭음이 근처에서 그의 종적을 쫓고 있던 이들의 이목을 대번에 집중시켰다.
* * *
“저기다!”
“공자님!”
“공자, 부탁드립니다.”
숲의 일각을 뒤덮는 소름 끼치는 전광.
하지만 그것을 목격한 무리는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한 것인지 오히려 흥분된 기색을 보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저런 걸 우리 힘만으로?”
저건 또 무슨 괴물이냐 싶어 경악하던 라프탄으로선 그 부탁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당연히 우리 쪽 전력도 준비해 왔습니다.”
“……그렇겠지. 그래, 가지.”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기껏 증거를 확보했는데, 진짜 전투까지 해야 한다고?’
라프탄은 먼 숲속 어딘가에서 터진 밤하늘까지 노랗게 물들이는 번갯불을 보며,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가까스로 떼었다.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튀어야 한다.’
그렇게 눈알을 굴리는데, 어느새 사방으로 모여든 검은 복면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노인의 뒤에 서 있던 복면인 수십 명이 순식간에 수백이 되더니, 이내 천 명에 가깝게 불어났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대체 숲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싶었다.
“저들은……?”
“우리 병력들이죠. 위대하신 분께서 새롭게 ‘개발한 것’들이니 제법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허허.”
자신을 2호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소개한 흑마법사 노인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라프탄은 그 순간 노인의 손이 새하얀 털로 뒤덮이는 것을 보았다.
‘수인족? 단순한 흑마법사가 아니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정보를 뇌리에 새겨 놓을 수 있었지만, 정작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앞에는 번갯불을 쏟아 내는 괴물,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천에 가까운 병력.
‘진짜 죽겠다, X발.’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일까.
- 크릉.
그가 제나스 곁에 남겨 놓은 라미가 또 다른 정보를 전해 왔고, 그 순간 라프탄의 눈이 다시금 날카롭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