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193화 (193/500)

193화. 그때, 바깥에선…….

- 간신히 알아낸 정보다.

- 이 기회에 확실히 꼬리를 잡아야 한다. 반드시!

- 늙은 뱀이, 아니 황제 폐하께서 더는 어떤 구실로도 외면하실 수 없게.

머릿속을 울리는 차가운 목소리.

그 말에 담긴 의지는 반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X발, 그걸 왜 내가 해야 하는 건데…….’

라프탄은 머릿속에 떠오른 은발의 기사를 향해 속으로 쌍욕을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는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 즉시 사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였으니까.

그때, 숲속 공터에서 사방을 둘러싼 채 그를 보호(?)하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그의 앞에서 슬쩍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그자들이 올 겁니다, 대공자님.”

대공자. 그 낯선 호칭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조여 왔지만, 라프탄은 태연하게 안색을 굳히며 제게 말을 건 안내인을 노려보았다.

“호칭.”

눌러쓴 로브의 후드 아래서 번뜩이는 ‘붉은 눈’이 차가운 목소리로 안내인을 압박하자, 상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조, 조심하겠습니다, 리엘 님.”

그런 상대의 모습에도, 그는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싸늘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고만 있었다.

귀에 인이 박이도록 설명을 들은 ‘삭풍의 기사’, 가브리엘 폰 로히터의 성정상 그리 움직이는 것이 옳았으니까.

- 명심하세요. 내가 정말 그 사람이 되었다고 믿어야 남들도 믿는 겁니다.

자신에게 스파이 수업을 해 준 제이(J)라는 작자의 말에 내심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그것이 위안이 되진 않았다.

‘고작 스파이 수업 몇 달 하고 사지에 던져놓는 게 말이 되냐!?’

너무 억울했다. 지금 그는 로히터 가문의 대공자로 위장해서 말룸이라는 흑마법사 집단과 마주하기 직전이었으니까.

어느 한쪽에라도 발각된다면 그냥 제발 곱게만 죽여 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다.

‘이건 미친 짓이야, X발!’

심장이 쪼그라들다 못해 소멸할 것 같은 기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의 위험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왜 나한테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건데!? 내가 발렌티아에 투신한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그 부담감이 그를 더욱 위축되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제나스는 무려 그와 같은 ‘7대 신성’ 중 한 명을 아예 박살 내고 포박한 채로 감시하고 있는 상황.

이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제나스와 발렌티아 가문이 지게 될 정치적 부담은, 그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삭풍의 기사는 로히터도 언제든 발렌티아와 ‘검제’에 대항할 만한 초인을 배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징.

가문의 역사와 영향력을 제외하고도 로히터가 발렌티아에 맞설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제나스한테 일방적으로 발리는 것을 보니 그것도 그냥 헛소문 같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7대 신성이라 해 봤자 그건 제국과 왕국 연합의 경쟁 끝에 탄생한, ‘인간족’을 중심으로 뽑은 이름일 뿐.

그중 온전하게 오러유저까지 성장하는 이가 한 세대에 둘 이상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그 이름에 거품이 낀 것은 분명하다.

뭐, 그 ‘새로운 별’들조차 챌린저급에서 오러유저로 거듭나지 못하는 건, 그만큼 그 벽이 뚫기 힘든 것이라는 증거라고 봐야겠지만.

‘초인은 챌린저급에서도 유독 수준이 다른 사람만 되는 거겠지, 그 제나스 경처럼…….’

얼마 전 제나스가 가브리엘을 개 패듯 때려잡던 광경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 방식 역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절대 북풍의 기사한테 개기지 말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했을 정도로.

‘으으, 그 차분한 얼굴로 예의 바른 말만 하는 사람이 그런 미친 짓을 할 줄이야. 역시 그 깡패 기사랑 어울리는 데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레 검은 머리, 검은 눈의 깡패(?) 녀석에게로 이어졌다.

그래, 더한 놈이 있었다. 사람을 무기처럼 잡고 휘두르는 놈.

‘광휘의 기사는 무슨, ‘꽝! 휘릭’의 기사겠지. 쌍.’

잡히는 순간 발목이 으스러지고, 그와 동시에 내장이 온통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내달리던 그 끔찍한 기억.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발목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히 다 나았는데……!

부르르.

“왜 그러십니까, 리엘 님?”

“……아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군.”

그 말에 안내인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젠장, 실수했나?’

순간 속으로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아직도, 이 일에 회의를 느끼시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 가문의 결정이니.”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무거운 눈빛까지 쏘아 주니, 안내인은 그저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새삼 제이의 수업이 효과 만점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덧붙인 다른 말들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말이다.

-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능력은 정말 탐나는군요.

- 변장이 필요가 없다니! 마법으로도 탐지가 안 된다니!

- 연기에 대한 재능도 있어요! 확실합니다. 당신은 스파이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이럴 수가!

‘에이씨, 이건 결국 라미 능력이라고. 난 정령사일 뿐이고.’

그로선 이런 능력도 없으면서 수업할 때마다 다른 외모와 목소리로 나타났던 제이라는 작자가 더 신기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 깡패 기사는 단숨에 자신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도 솔직히 많이 긴장되었다. 지금 만나야 하는 놈의 조직에는 그런 능력자가 한두 명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 크릉.

아, 아니야? 그건 그 늑대 정령 능력이었다고? 그럼 좀 안심이긴 한데…….

영혼의 반려인 라미의 뜻을 전달받아도 긴장감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일이 잘못되면, 진짜 자살하는 게 최선일지도.’

그 상상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 왔는데, 그 순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안내인과 눈이 마주쳐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너무 원통해하지 마십시오. 리엘 님이 가문을 이어받으신 후에 전부 쳐 내기만 하시면 됩니다.”

이 새끼가 멋대로 착각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랐다.

그러던 와중.

- 크릉.

라미가 신호를 보내 왔다.

확실한 방향은 모르겠지만, 정령이 가장 싫어하는 불쾌한 기운이 근처에 다가와 있는 것 같다고.

‘X발.’

결국 올 것이 왔다.

다시금 몸이 떨렸지만, 애써 덤덤한 표정을 연기했다.

“……왔나 보군.”

“예?”

“나와라! 괜히 신경전으로 힘 빼기 싫다.”

그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데, 이내 숲속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역시 삭풍의 기사. 허명이 아니었군.

동시에 전면의 숲이 일렁이더니, 불쾌한 검은 빛이 어두운 밤하늘로 사라지며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챙!

라프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 아무런 문양도 없는 평범한 여행자 복장을 한 이들이 동시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

로히터 가문, 그 음지의 일을 처리하는 ‘검은 장미’의 정예들이었다.

그들은 그러면서 감탄한 눈빛으로 가브리엘, 아니 라프탄을 바라봤고, 그것은 저벅저벅 다가오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6서클의 은신 마법을 정면으로 꿰뚫고 나를 보다니. 7대 신성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로히터 대공자?”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보이는 하관에 흰 수염이 수북한 노인. 그의 노쇠한 음성에는 실제로 감탄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 뒤로 늘어선 복면인들이 미동도 없이 그를 따르는 것과는 달리 풍부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

하지만 라프탄은 담담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았다.

“별말씀을.”

물론 속마음은 전혀 차분하지 못했다.

‘깜짝 놀랐네.’

운이다, 새꺄. 그냥 쳐다보고 있던 방향에서 너희들이 튀어나온 거야.

그렇게 놀란 마음은 전혀 티내지 않으면서, 그는 가장 중요한 말부터 꺼내 들었다.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고, 나를 직접 부른 이유나 말해 주시오. 이 시국에 북쪽 국경이면, 예상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오.”

“역시 영민하시군요, 공자.”

“그 말은 내 짐작이 맞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굉장히 곤란한 부탁인데.”

영민은 무슨.

웨어비스트가 뒤집히고, 대륙 7대 기사인 문나이트가 축출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추격을 피해 동남쪽, 왕국 연합 방향으로 도망치는 중인 상황에, 제국 동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로히터의 정예들과 더불어 후계자이자 7대 신성 중 하나까지 만나려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심지어 그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까지 아는 입장에서는 그 의중을 모르기가 더 힘들었다.

‘문나이트를 잡기 위한 포위망 구축…… 혹은 척살에 동참해 달라는 거겠지.’

예상치도 못했던 문나이트의 축출 사건에, 웨어비스트 밖 모든 정치인들이 경악하고 있는 와중이다.

신전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황이 썩은 사제들을 뿌리 뽑겠다고 공언한 대사건마저 세상의 관심에서 차선으로 밀어낸 빅뉴스.

‘물론 그거야 신전에 대한 세간의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륙 7대 기사가 자국에서 축출당하는 것은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바보짓’이었으니 말이다.

문나이트가 왕을 암살했다는 충격적인 소문이 따라붙긴 했지만, 그건 음모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왕실의 방계임에도 이미 왕 못지않은 대우를 받으며, 그 군주와도 돈독한 우정을 자랑하던 문나이트가 아니던가.

- ‘정보’에 없던 일이다. 가능하면 그 사건의 내막도 알아내야 해.

- 그것 역시 로히터와 말룸의 연관 관계를 증명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 그러니 자네 역할이 막중하다, 라프탄.

정보 조직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가끔 틀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어째서 말룸과 공작가가 손잡은 것보다 중요할까.

그건 분명히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너무 막중해서 위가 헐어 버릴 것 같다고, 젠장. 투신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날 대체 뭘 믿고…….’

그 명령을 떠올리니 이내 속이 쓰려 와서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그러자.

“허허, 그렇게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으시면 안 되지요. 저희가 제국의 귀족들을 움직여 로히터를 발렌티아의 공격에서 구해 준 것은 잊지 않으셨을 텐데.”

그래, 그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

울컥할 수밖에 없는 사연. 다행히 지금은 그 감정을 참을 필요도 없었다.

그 기분을 다른 말로 쏟아 내면 되니까.

“……나를 직접 만나 증거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고?”

불쾌한 기색을 고스란히 담아 내뱉는데, 상대방은 오히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시니,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그려.”

그 말에 라프탄의 눈이 빛났다.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으니까.

“아버님이 직접 계약하신 서류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왜 말룸이 가브리엘까지 걸고넘어지려 하는가.

그것이 그의, 아니 발렌티아의 의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했고.

다행히 바로 답이 나왔다.

“버려진 3공자를 이용해 발렌티아에서 공격해 왔을 때도 이미 버린 인연이라며 칼같이 끊어 낸 분이 공작 각하 아닙니까. 그때는 저희도 좀 놀랐습니다. 검제라는 고고한 이명의 주인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도, 그걸 칼같이 끊어 낸 로히터 공작의 대응에도.”

“호오……?”

“다만 염려가 되더군요. 친자식한테도 그럴진대 저희가 필요 없어지면 신경이나 쓰실까 싶었습니다. 그러니 보험을 들어 놔야지요.”

그 말은…….

“공작, 아니 아버님과 한 계약에 흑마법이 섞인 게 아니었나?”

“오, 그것까지는 공자께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뭐, 어찌나 경계하시는지 그럴 수가 없었지요. 어쩌겠습니까? 아쉬운 쪽이 숙여야 하는 법이니…….”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노인의 하관이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본 라프탄의 얼굴에도 마주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아쉬운 것은 우리 로히터이니, 우리가 숙여라?”

짐짓 차가운 미소로 보였지만, 가브리엘이 아닌 라프탄의 입장에서야 거의 환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증거 남기자.’

당장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었지만, 진짜 삭풍의 기사 가브리엘 폰 로히터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라프탄은 더욱 인상을 구기며 노인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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