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챌린저
크라켄을 그대로 축소시킨 것 같이 생긴 촉수 괴물, 그레이트 옥토퍼의 등장은 예상하던 범위 내였다.
그러나 수중에서 첫 일격을 때렸을 때부터는 뭔가가 이상했다.
촉수가 20개도 넘는 괴물 문어에게 타격을 준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순간 숨이 탁 막혀 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라?’
전생에는 이 정도 힘을 투자하면 괴물과 자신 사이의 물이 일시에 분해되면서, 호흡할 수 있는 공기가 주변을 넘치도록 메우는 현상이 일어났었다.
솔직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괴한 현상이었지만, 몇십 번이나 경험했으니 그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도 나중에 숨 쉬는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에는 이런 지하 호수를 발견하는 대로 뛰어들어 물을 ‘박살’ 내기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강렬한 충격에 물살이 요동치면서 그레이트 옥토퍼의 신체 일부가 터져 나가는 것은 전생과 비슷했다.
다만 정작 그에게 필요한 공기가 생기지 않았다.
위력은 비슷했다. 물론 전생에는 가볍게 휘둘렀던 일격의 위력을 내기 위해 지금은 전력을 다했다는 점은 달랐지만, 분명히 비슷한 힘이 담긴 타격이었다.
그렇다면…….
‘속성 문제인가?’
- 물을 터트리니 공기가 생겨났다? 놀라운 발견이로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현자의 탑 할배가 뭐라고 말을 해 줬던 것 같긴 했다.
그땐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한 귀로 듣고 흘렸었는데, 막상 그것과 관련된 극한 상황에 직면하니 어렴풋이나마 떠오른 것이다.
- 내가 연구해 봤는데, 아마 그건 자네 속성이…….
전생에 발현했던 폭발 속성. 그것을 불 속성의 상위 호환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고 했던가?
물론 마나를 주입해 타격 대상을 터트려 버리면 그 결과가 불꽃이 퍼지는 듯한 현상으로 나타나기는 했다.
하지만 할배는 그게 본질은 아니라면서, 폭발이란 구조 자체를 흔들어서 붕괴시키는 과정이라고 했다.
불꽃은 그 과정에서 열기가 더해지기 쉬운 탓에 따라붙는 현상일 뿐이고, 동방어로 표현해도 폭발은 본질을 ‘거칠게(暴)’ 흔들어 ‘터트리는(發)’ 것이라고.
즉 폭발 속성은 불꽃의 상위 속성이 아니라, 타격 대상의 본질 자체를 붕괴시키거나 분해하는 파괴 속성의 상위 속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솔직히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그래서 당시에도 자신은, 그 현상을 원래의 파괴력을 ‘몇 배 이상’ 증폭시키는 것 정도로 쉽게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그 할배는 그것을 매우 아쉬워했었다.
- 이 빡대가리 새…….
- 뭐요?
- 아니, 아닐세. 흠흠. 아쉬워서 그러지. 속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확실히 이해만 한다면, 자네가 전력을 다한 일격은 그야말로 천벌에 준하는 힘을 낼 수도 있을 텐데…….
무슨 뜻인지 이해도 못 하겠고, 안 그래도 일격의 힘은 지상 최강이라 자부하던 시절에 들은 얘기라 무시했었다.
천벌의 기사, 그 영예롭지만 금세 잃어버린 이름을 자꾸 상기시키는 조언이라서 애써 외면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냥 내가 세다는 칭찬으로만 생각했는데.’
물론 이론 같은 거 몰라도 전투에서 나타난 결과는 같았지만, 지금과 같은 경험을 하고 보니 뭔가 다른 게 있긴 한 것 같았다.
‘폭발 속성에 뭔가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건가?’
빌어먹을.
하지만 어차피 이제 와 후회하기에는 늦은 일이었다.
꾸르르륵.
꿍.
우르르르릉.
타이니는 다시금 힘을 끌어모아 자신의 다리를 휘감는 촉수를 몇 번이나 연달아 후려쳐 끊어 냈다.
- 퍼어어어엉!
촉수를 끊어 내고도 남은 힘이 물결의 파장을 만들며 호수의 표면을 터트릴 때.
생전 처음 물속에 들어온 탓에 당혹스러워하던 월랑이 뒤늦게 그레이트 옥토퍼의 뒤쪽으로 달려들어 놈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 컹?
정령이기에 호흡으로 인한 제약이 없다지만, 그래도 물속인 탓인지 월랑의 움직임은 평상시에 비하면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타이니는 이내 숨을 쉬기 위해 마나까지 동원해 수면 위로 올라갔다.
아니, 올라가려 했으나 다시 물속으로 끌어당겨졌다. 월랑을 상대하면서도 여력이 있었는지, 놈이 촉수 하나를 움직여 다시 그의 두 다리를 붙들었던 것이다.
꾸르륵.
‘빌어먹을.’
아무리 괴물같이 진화한 육체라도 허파에 채울 수 있는 산소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숨’이나 ‘물’ 등의 생체 에너지를 완전히 마나로 대체하는 것은 전생의 그에게도 불가능했던 일.
위기에 처해 억지로나마 시도하면 가까스로 해낼 때도 있었지만, 그 효과에 비해 마나 소모량이 어마어마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경지로는 그마저도 어려웠으니, 속수무책으로 숨이 가빠지고 손발이 꼬이기 시작했다.
황당하게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문어 따위가 나를?’
그 분노와 살짝 흐려진 이성 탓에, 타이니는 특별한 에너지를 쓰지 않는 육체파 괴물을 상대로는 그리 상성이 좋지 않은 소울웨폰을 굳이 꺼내 들었다.
쿵.
우르르릉.
그의 소울웨폰이 가진 세 가지 능력 중 하나인 검은 구체가 워해머의 끝에 맺히더니, 이내 마기보다 더욱 짙은 어둠을 발하며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지저 호수 안에 미량 퍼져 있는 마기부터 그레이트 옥토퍼의 촉수에서 나온 마기까지, 전부 무서운 속도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일순간 움츠러든 옥토퍼의 촉수가 황급히 다리를 놓은 것은 예상외의 소득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튀어나온 루나의 검은 오러가 놈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광경이 보였다.
순식간에 검게 물들어 가는 문어 대가리.
- 꾸우우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괴물다운 괴력을 발휘하던 촉수가 통제력을 잃은 것처럼 물속에서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타이니의 소울웨폰, 검은 구체가 그 촉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어?’
그 능력의 주인조차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상황.
원래대로라면 블랙홀의 힘이 흡수하는 것은 오직 무형의 에너지여야만 했는데.
꾸드드득.
사람 머리만 한 구체가 그 몇십 배에 달하는 부피의 문어 다리를 그대로 갈아 마셔 버릴 듯한 기세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오러에 당했으니 어차피 먼지로 흩어질 육체…… 때문인 것 같은데.’
머릿속을 스치는 영감에 따라 이 현상을 이해하고 있는데.
콰콰콰콰콰.
촉수의 일부가 흡수되자마자, 소울웨폰이 촉수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차 있던 물까지 같이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걸 먹을 수 있으니 저것도 되겠네, 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소울웨폰에 자아가 생긴 것은 아닐 테니, 타이니의 무의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뿐일 터였다.
‘주체가 없는, 그것도 구조의 결합이 약한 물질이라면 뭐든 흡수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허!?’
마치 작고 검은 구슬에 거대한 문어가 통째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거대 촉수를 반 정도 흡수해 버린 구체의 주인은 그제야 눈동자에 이성의 빛이 온전히 돌아왔다.
‘어, 이건……?’
그의 소울웨폰이 가진 두 번째 능력, 에너지 변환.
원래대로라면 흡수한 에너지의 일부가 자신의 마나로 치환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나온 결과물은 그에게 당장 필요했던 ‘공기’였다.
무형의 에너지가 다른 힘으로 변환된 게 아닌, 흡수된 물질의 일부가 생체에 필요한 자원으로 바뀐 것.
물 혹은 그레이트 옥토퍼의 촉수, 둘 중 어느 쪽에서 변환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장은 문제 상황이 영문도 모르게 해결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이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완전히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부터 조금씩이나마 다루어 왔던 챌린저급의 특징.
‘공간을 다루는 능력의 변화…….’
마나유저의 6단계, 챌린저급의 상징은 마나로 공간을 장악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손을 쓰지 않고도 약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으로 이해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핵심은 의지만으로 주변의 공간을 자신의 속성으로 물들이거나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
즉, 마법사가 아닌 마나유저가 주문 등의 수단 없이도 의지만으로 마법과 같은 효과를 즉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 힘은 본신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약한 물리력이나 속성력으로 한정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관철하여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에는 그 위력과 상관없이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바로 초월을 위한 준비 단계라는 뜻.
그러니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 자체는 그저 그 대명제에 따라오는 작은 덤일 뿐이었는데, 지금 그 힘이 타이니에게는 굉장히 이질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이게 대체……?’
개발한 스스로도, 그리고 중력 속성의 정당한 후계자로 볼 수 있는 검제마저도 놀랐던 타이니의 소울웨폰.
애초에 공간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다루던 그 기술이, 이제는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진실로 강력한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물질도? 이건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그게 가능하게 된 것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능력의 한계는 이제부터 차차 몸으로 부딪쳐 가며 테스트해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발현되는 과정과 결과, 그 맥락과 힘은 영혼에 새겨졌다.
‘충분히!’
그것을 자각한 순간, 타이니는 자신이 또 하나의 벽을 온전하게 넘어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드디어!’
우우웅.
충만하게 차오르는 마나와 확장되는 의식, 다시금 한층 조밀하게 짜여서 재정립되는 듯한 감각.
그에게 있어 마나유저로서의 승격은 정령술과는 달리 옛길을 되짚어가는 것일 뿐이기에, 영혼이 승격되는 듯한 고양감은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변화하는, 진화하는 듯한 느낌만으로도 기분이 무척이나 짜릿했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능력까지 얻었으니, 자연히 기쁨이 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 원리도 모르면서 몸으로 체득한다고? 하. 정말, 네놈 몸뚱어리는…….
에이, 젠장. 그 꼰대.
왜 지금 떠올라서…….
- 네 녀석은 역시 몸으로 배워야…….
‘아냐!’
금발 머리 중년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반발.
그것이 타이니의 입에 거품을 물게 만들었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그가 소리치듯 입을 벌리는 바람에 정말로 공기 방울이 터져 나온 것이다.
뿌그르르.
‘윽!?’
산소가 단숨에 빠져나가는 바람에 식겁한 타이니는 의식적으로 소울웨폰에 힘을 더해 ‘블랙홀’의 능력을 강화시켰다.
루나의 오러에 의해 전부 분해되기 직전에 빨려들어 온 괴물의 촉수와 호수의 물이, 다시금 그의 육체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했다.
그리고 이내.
‘끝내자.’
워해머 끝에 달려 있던 구체가 새하얗게 변하며 충격파를 터트리자 순식간에 호수 전체가 뒤집혔다.
콰아아아아아앙!
* * *
쿨럭. 쿨럭.
연신 역한 물을 토해 내던 루나가 오랜만에 살기를 띤 눈으로 타이니를 노려보았다.
싸움도 다 끝난 마당에 갑자기 호수를 터트려서 맛도 좋지 않은 물을 잔뜩 먹게 했으니, 타이니로선 바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미안.”
상승한 경지나 변화한 소울웨폰의 힘 조절에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했다는 변명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잘못했을 때는 군말 없이 바로 인정해야 피해자가 덜 빡친다는 것은 인생의 진리니까.
그런데 노려보는 시선의 이유가 그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벌써, 챌린저급?”
“응? 어…… 어. 멀지 않았다고 말했잖아.”
“……괴물.”
“뭐래, 오러유저가.”
어쩌면 역사상 최강의 남매일지도 모르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이내 동시에 피식 웃었다.
“이제, 같이, 더 빠르게?”
“응. 솔직히 저층에서는 더 이상 수련이 필요 없을 것 같아. 이젠 나도 초월급 마수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같은 경지 내에서도 수준의 차이가 큰 것이 고수의 세계.
그러니 경지의 단계마저 더 낮다면, 그 무력의 차이는 개인이 극복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중에서도 6단계와 7단계 사이에는 한계를 넘은 이와 한계에 갇힌 이를 나누는 절대적인 벽이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반인과 초인을 가르는 벽이.
어떤 재능 있는 천재라도 벽을 넘지 않은 채로는 그 너머에 있는 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루나는 타이니의 말이 허풍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미궁을 정복하자고. 내가 오러를 터득하고, 누나도 경지가 깊어지고 신체 강화까지 마친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응. 그리고, 초월무구.”
“켁.”
각오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타이니는 그 한마디에 다리가 꼬일 뻔했다.
“없을 수도 있다니까!?”
“있을 거야.”
“헐…….”
“믿지 않으면, 생길 일도, 안 생겨.”
“대체 누가 그래?”
“세상의, 진리.”
“그러니까 대체 누가!?”
대미궁의 지하 30층.
세계 최고의 마경 한가운데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덕분에.
- 크륵?
- 케륵!
그 소음의 근원지를 향해 괴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