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폭발 속성
쩌어어어억!
천장에 달려 있던 종유석이 갑자기 단검 같은 이빨이 촘촘히 박힌 괴물로 변하더니, 거대한 주둥이를 쩍 벌린 채 떨어져 내렸다.
놈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타이니의 몸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 순간.
“흥!”
콰앙!
노을빛을 머금은 해머가 거대한 주둥이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쩌저저적.
쿵.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파묻힌 놈을 보며, 루나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몸통보다 머리가 큰 괴상한 몰골이 끔직하기도 했지만, 마역이나 대륙의 깊은 숲속에서도 본 적이 없는 몬스터인 탓이었다.
“이건, 뭐……?”
“아귀(餓鬼, Starving ghost). 동대륙에선 꽤 흔한 몬스터인데, 우리 대륙에는 대미궁에밖에 없는 것 같아.”
평소엔 바위로 완벽하게 위장하고 있다가, 쉬어 가는 여행객이나 동물을 덮쳐 그대로 삼켜 버리는 괴물이었다.
지금은 천장의 종유석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떨어져 내린 것인데, 애초에 은신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루나와 소울 사이트를 체화한 타이니에게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수작일 뿐이었다.
위험하지 않다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수련…… 안 되지?”
기껏 루나에게 나서지 말라고 한 것이 무색하게, 다섯 층을 더 내려오는 동안 위기는커녕 곤란하다 할 만한 일도 겪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소울 사이트를 체화하며 지나치게 발달한 감각 때문이었다.
“응. 벽을 부수기도 전에 어떤 놈들이 나올지를 다 아는데 긴장이 될 리가 있나…….”
그에겐 은신하고 있다가 기습해 오는 괴물보다는 스스로의 전투력을 믿고 막무가내로 덤비는 놈들이 그나마 자극이 되었다.
예를 들면 바로 전 층의 그 개떼들, 악마견처럼 말이다.
“슬슬 통로 부근인데, 아귀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을 보니 이번 층 계층주도 대략 예상이 되는데…….”
“응? 뭔데?”
“뭐, 아닐 수도 있고. 일단 가 보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미 확신을 내린 듯, 타이니의 얼굴엔 지루함만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대미궁은 분명 인세 최악의 마역이지만, 그곳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마기와 섭식의 문제를 극복한 그들에겐 초인급 이하의 마물은 더 이상 긴장감조차 주지 못했다.
그리고.
우르르르릉.
이번 29층의 끝, 대광장에서 만난 괴물들의 모습에 타이니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대광장에 듬성듬성 자리한, 인간형의 몸뚱이에 박쥐 날개와 도마뱀의 머리가 붙은 석상들을 본 것이다.
“역시 가고일이네.”
한숨을 푹 내쉰 타이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저것들이 왜 은신 몬스터의 최고봉으로 불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동의. 섀도 핀드가, 훨씬 위험.”
일행에게 완벽하게 무시당하는 석상, 아니 몬스터들.
하지만 이 가고일들은 사실 그렇게 무시당할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기에 괴물 조각상과 구별하기가 힘든데, 막상 움직일 때는 실제 석상보다 단단한 물리 방어력과 마법 내성을 지닌 육체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심지어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라 바위도 녹여 버리는 불꽃까지 토해 내는 마물이 바로 가고일이었다.
자유로운 비행 능력과 한자리에서 수년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생을 유지하는 강력한 생명력은 그저 덤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
거기다 동급의 섀도 핀드와 달리 태양 아래 나서지 못한다는 약점도 없다. 개체 하나하나가 6단계 상위의 몬스터로서 부족함이 없는 괴물인 것이다.
다만, 이곳이 대미궁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버려진 고성이나 유적 같은 곳에 한 마리 정도 있으면 모를까, 대미궁에 이렇게 모여 있으면 바보라도 안 속지.”
드넓은 광장에 울려 퍼지는 타이니의 목소리.
그의 초월 감각은 가까운 곳에 있던 석상 몇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고스란히 포착했다.
아마 녀석들도 오랜만에 본 외부의 생명체들이 신경 쓰이는 것일 터였다.
‘말을 알아듣진 못할 테니, 아직 안 들켰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괜히 더 한심하게 느껴져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빨리 끝낼게.”
“이번에도, 혼자?”
“응. 돌대가리들 같지만, 가고일 스무 마리면 전투력은 나름대로 강할 테니까.”
“알았어.”
루나의 얼굴에도 걱정스러운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동급의 정령이나 마법의 힘까지 가지고 있는 멀티 클래스라 한들, 보통 슈페리어급 기사는 6단계의 몬스터 한 마리도 겨우 감당해 낸다는 게 상식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런 그녀의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했다.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아 가고일 스무 마리를 완벽하게 박살 내면서 말이다.
쾅!
“끼에에…….”
우르르릉.
처량한 비명과 함께 검은 연기가 빠져나가면서, 마지막 가고일의 육체는 한낱 부서진 돌덩이가 되어 광장 바닥 위로 무너져 내렸다.
직전까지 수백 미터 높이의 천장 아래를 자유롭게 비행하며 불꽃을 뿜어내던 괴물의 최후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하기만 했다.
하지만 놈들을 단숨에 전멸시킨 업적을 이루어 낸 당사자의 표정에는 짜증만 가득했다.
“킁, 귀찮게 도망 다니고 있어. 먹지도 못하는 게.”
천장이 높다고 한들 결국 동굴 안, 가고일들은 월랑을 타고 질주하는 타이니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애초에 처음 다섯 마리가 석상 상태에서 박살 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한 돌대가리들이었으니 말이다.
“바깥보다, 약한 몬스터, 처음 봐.”
오죽하면 루나가 신기해하며 그리 말할 정도였다.
물론 실제 전투력은 대미궁의 가고일이 훨씬 강하기는 했다.
“환경 문제지. 상대가 나였다는 것도 문제고.”
말 그대로 상성이 매우 좋지 않았다. 한정된 공간, 간파된 위장, 선공의 허용 등 놈들에게 불리한 변수가 많았던 것이다.
죽은 가고일들이야 억울하기 그지없겠지만, 아쉬운 것은 타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써, 한 달이 또…….”
그렇다. 대미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반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사이에 그들은 다섯 개의 층을 더 돌파해 30층을 앞두고 있었다.
내려갈수록 더 넓어지는 대미궁의 특성을 감안하면, 점차 강해지는 몬스터들을 타이니 혼자 상대하면서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는 뜻이었지만.
“시간이 아까워. 다음 층에는 좀 더 자극이 될 만한 놈들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타이니는 한숨과 함께 나온 푸념을 내뱉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에 진입한 30층에서부터, 그는 말이 씨가 된다는 동방의 속담을 여실히 체감했다.
* * *
내려가자마자 마기가 한층 진해졌지만, 그건 이미 예상했던 바.
다만 조금 이상하다 싶은 것은 진득한 마기 속에서도 유독 눅눅하게 느껴지는 공기였다.
“……축축해.”
“하, 이거. 맞다, 이쯤 되면 나올 법도 하지.”
전날 29층에서와는 이유가 다른 듯한 짜증 섞인 한탄에 루나가 궁금증을 보였다.
“뭔데?”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호수 같은 것도 있다고 했잖아. 미궁 벽들 사이 간격이 넓어지면서 말이야.”
“아……. 그래서?”
“장점은 더 이상 마물의 피를 정화해서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조금 역하긴 하지만, 그래도 물맛은 나니까. 하지만 단점은…….”
“몬스터?”
“어. 물가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은 별거 아닌데, 간혹 상대를 수중으로 끌고 들어가는 놈들이 있어서 까다로워. 조심해.”
“알겠어.”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하는 루나는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그때 그 어린아이 보듯 하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 또 한마디 하겠구만.’
괜히 찔려서 시선을 돌리는데, 루나가 불쑥 물었다.
“혼자일 땐, 어떻게, 했어?”
“응?”
“네 몸, 비정상. 물에, 안 뜨지 않아? 전생엔, 달랐어?”
“……음, 조금 다르지만. 비슷해.”
“무슨, 말?”
“그땐 제법 묵직한 갑옷을 입고 있었거든. 당시 체격에 맞춘 거니까 크고 무거웠지. 그렇다고 물에 빠졌다고 버릴 만한 하품도 아니었고.”
“그럼, 어떻게, 했어?”
“그냥 날려 버렸어.”
“응??”
“웅덩이면 웅덩이, 호수면 호수째로 폭발시켜서 싹 정리했지.”
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루나가 입을 벌리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게, 돼?”
“어. 그리고 마기로 가득한 물 밖에 비해, 차라리 물속에서는 마기가 적어서 편했어.”
“그게, 대체……?”
“바깥 공기를 마시려고 머리 위쪽 물을 통째로 박살 내니까 왠지는 몰라도 공기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오히려 물속이 더 숨쉬기 편할 때도 있었어.”
“물을, 박살 내?”
타이니의 답변이 이어질수록 루나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호수를 날리냐고 물은 거였는데…….’
그 상식을 초월한 대답은 애초에 방향이 한참 엇나가 있었다.
‘물을 박살 내니까 공기가 생겼다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이어지니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무슨 말?”
하지만 그 흔들리는 시선의 의미를 잘못 파악한 듯, 옛 추억에 빠진 기사는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생각났는데, 물 자체를 폭발시키면 공기가 생긴다는 건 마법사들도 모르던데? 내가 최초의 발견자였던 거지.”
엥? 그게 말이 돼?
물이 박살 났는데 왜 공기가 생겨?
“뭐 지금이야 그때 경지에도 못 미치고 폭발 속성도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제법 되니까. 혹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도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에이, 설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주장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도 당당한 타이니의 표정에 루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실제로 해 봤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도 혹시나 잘못될 것 같으면 바로 끼어들어야지.’
루나는 잠자코 동생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눅눅한 공기가 조금 더 진해진다 싶을 때,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끄어어어!”
회색빛에 비친 얼핏 봐도 물컹할 것 같은 피부에는 듬성듬성 비늘이 돋아 있었고, 머리에는 물고기의 아가미 같은 것이, 팔다리의 끝에는 물갈퀴가 붙어 있는 인간형 괴물들.
“머맨!”
바닷가에서나 가끔 모습을 드러내며 인간이나 동물들을 사냥해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간다는 이 괴물들은, 여성형 몬스터인 세이렌과 더불어 먼 옛날 여신과 대적해 저주를 받아 타락했다는 인어족의 후신으로 여겨진다.
도구를 사용하는 데다가 마치 인류처럼 개체마다 상이한 전투력을 가지기에 통합적인 등급은 매겨져 있지 않지만, 보통 소수로 출몰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나타난 직후에는 해일이 덮치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등 재앙이 벌어지는 일이 잦아 저주받은 괴물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쾅!
타이니의 망치 한 방에 터져 나가는 꼴을 보니, 지금 나타난 머맨은 그리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놈들을 처리한 타이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거 너무 약한데.”
“응?”
“중간에 나오는 몬스터들이 너무 약하면, 이상하게 계층주가 그만큼 더 강하더라고. 현생에서 그런 경우는 이 층이 처음인 것 같은데.”
불길한 소리를 늘어놓는 타이니 때문에 루나 역시 불안감이 짙어져 가던 그때.
계층주를 확인하기는커녕 통로의 중간을 채 지나기도 전에 일행에게 문제가 생겼다.
우르르르릉.
여느 때와 같이 벽을 무너트리자 눈앞에 나타난 호수.
지하에 있는 것치고는 꽤 넓고 지나치게 잔잔한 호수 위를, 타이니는 월랑을 타고 자신만만하게 질주했다.
그 순간 거대한 촉수가 튀어나와 그런 타이니를 잡아챌 땐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루나는 그때도 미소 짓고 있는 타이니의 얼굴을 보고는 당장 돌진하려던 몸을 멈춰 세웠다.
정말 자신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꽈아아앙!
쾅!
폭음과 함께 연이어 솟구치는 물기둥.
엄청난 물보라가 잔잔하던 호수에 격변을 일으키는데, 이상하게도 그 폭발은 강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물속으로 끌려들어 간 타이니의 힘이 점점 빠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마…….’
그리 자신만만하더니?
- 물 자체를 폭발시키면 공기가 생긴다는 건 마법사들도 모르던데?
동생의 말이 다시금 뇌리에 떠오르는데, 그가 짓던 자신만만한 표정과 자신의 상식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헛소리였던 것 같다.
‘물을 때리면 물방울이 되지, 왜 공기가 돼.’
하지만 호언장담하던 동생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 날 믿어.
쿵!
촤아아아악!
그러나 물속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똑똑한 애가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
루나는 그제야 입술을 깨물며, 수면에 비친 거대한 그림자를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