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내게 가족이란…….
“루…….”
“괜찮아, 할 수 있어.”
“셋이야.”
“……할 수 있어.”
셋이라는 말에 다소 동요하기는 했지만, 루나의 뜻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타이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차라리 원래대로 듀라한 기사단 30기 정도였다면 그냥 루나한테 맡겼겠지만…….’
지금 그들은 20층의 끝에 있었다.
타이니의 정령술 5단계 각성 이후 자연스레 월랑의 능력치가 올라간 덕에 그들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으니,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10층을 더 내려오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그리고 성장한 타이니를 보며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루나는 20층의 계층주를 홀로 상대하겠다며 나서던 참이었다.
문제라면 그 계층주가 섀도 핀드(Shadow fiend) 3마리라는 것.
그림자 악마. 바로 루나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숨 쉬듯 쓰는 괴물들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누나, 믿어, 봐.”
“정말?”
“계기가, 필요해. 곧, 가능.”
걱정이 되어 말리려 했지만, 그 보랏빛 눈에 보이는 결연한 각오가 결국 타이니를 물러서게 만들었다.
“끄응, 그래 그럼. 하지만 혹시나 잘못되면 바로 끼어든다?”
“응.”
다행히도 저 그림자 악귀들은 갑자기 벽을 뚫고 나온 자신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포식자들이, 마기가 주는 광기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탐색까지 하는 듯한 느낌.
‘섀도 핀드라면, 벽을 넘지 않은 괴물 중에서는 최상급이야.’
저 정도 그림자 악마가 벽을 넘어 격이 상승하면 바로 전설에나 나오는 괴물, 도플갱어가 되는 것이다.
칠죄종 중 그림자의 왕, 탐욕의 군주 등으로 불리는 마계 대공의 최정예 병력이.
‘그나마 도플갱어는 아니라 다행인가.’
역시 10층 단위의 계층주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 걱정스러운 기색을 느꼈을까.
전방을 주시하며 마나를 흩뿌리던 루나가 타이니를 곁눈질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림자의 법, 그림자 악마들,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비전.”
“뭐?”
“우리 시조가, 그림자의 왕, 탐욕의 군주를, 죽이고자 만든 비전. 사연, 나중에, 말해 줄게.”
‘탐욕’이라면 분명히 그 글러터니와 같은 칠죄종, 마계 대공 중 하나일 텐데?
‘그 시조라는 작자,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어지간히 미친…….’
아, 내 조상이지……? 흠. 흠.
“……훌륭한 분이군.”
“얘기는, 나중에.”
스스슥.
그 순간 탐색이 끝났는지, 밀려오기 시작하는 어둠을 응시하던 루나의 몸이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타이니는 속으로 바랐다.
‘한두 놈 정도는 나한테 와라.’
루나와의 약속 때문에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타이니는 그렇게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마친 채 전방을 주시했다.
* * *
‘이대로는 안 돼.’
루나는 어둠 속을 이동하면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동생’은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왔으며, 당시에도 자신보다 강했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누나야.’
그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버릴 수 없는 강박이 있었다.
동생에게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뒤로 아빠가 거둬 주었기에 괜찮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 루나, 우리는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반드시.
- 혼혈인 네가 온전히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 그러니 맹세해다오. 가문의 부흥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자신을 거두었다는 아빠 역시, 딸에 대한 사랑보다는 무너진 가문의 부흥시키고자 하는 집념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바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 쟤 귀가 이상해. 눈동자도.
- 아들, 가까이 가지 마라. ‘섞인 거’니까.
자아를 인식할 때부터 주변에는 온통 적의 어린 시선뿐인 삶이었다.
그런 와중에, 목적이야 조금 이상하더라도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 준 단 한 사람의 바람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가문을 위해 자신에게 그림자의 법을 가르쳤다.
그것도 모자라서.
- 이, 이것이, 이 아비의 모든 것이다. 가져가라, 루나.
- 너라면, 네 재능이라면 시조님 이상의 초인이 될 수 있어, 반드시!
- 홀로 남게 되면 일단은 황실로 가라. 연이 닿은 이에게 말을 해 놓았다. 황실의 그림자 훈련은 우리 가문 방계의…….
‘전승’을 통해 아예 모든 마나와 생명력까지 자신에게 넘겨 버린 그 이기적인 사랑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것마저 외면해 버리면,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았다.
- 매, 맹세할게요! 가문을 위해 뭐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으며 고개를 떨군 아빠.
그때부터 아버지의 아집은 그녀의 삶이 되었다.
아무리 힘들고 무거워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짐이자 삶의 목적.
하지만 본질부터 어긋나 있던 그 목적은, 언젠가부터 가슴 한편에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가져왔다.
- 나는 왜 여기…….
인간의 나이로는 성년이 지났다지만, 하프 엘프의 수명을 대략 300년으로 잡는다고 한다면 그녀는 아직 유년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벌써 삶 자체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루하루를 버텨 갈수록 영혼이 깎여 나간다는 느낌이 들던 그때.
그녀의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혈연이 등장했다.
그것도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힘을 넘겨준 자신보다 더욱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생’이 나타난 것이다.
혼자 지기엔 한없이 무겁기만 했던 짐을 나눌 수 있는 존재.
- 누님……? 나?
- 내가, 누나…….
그 순간,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올랐다.
- ……가족, 있어.
- 더는, 혼자 아냐…….
그날은 어울리지 않게 울었다고 생각했다.
그저 무거운 짐을 나눠 들 존재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피의 증명’을 마친 뒤에 스스로 갖다 붙인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 나…… 외로웠구나.
나를 이해해 주는 누군가가.
나를 감싸 주는 누군가가.
함께 살아가며, 함께 울고 웃어 줄 사람이.
평생 가져 본 적 없는 ‘진짜 가족’이 필요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 동생이, 날, 속여야 할 이유, 없다. 그러니, 믿을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동생이 말해 준 전생의 이야기나 그 진실에 대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그 목표는 그녀와 동생이 같이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따라올 명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바람까지 넘치도록 채워 줄 수 있을 테니까.
- 아, 알았어. 그, 그러니까. 누……나?
누군가에게 가족으로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 하나뿐인 가족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평생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 준 사람, 아버지가 그녀에게 해 주었던…… 아니, 보여 주었던 것.
- 재능이 뛰어난 너를 위해, 어른인 내가 희생한다. 그게 옳아. 가문을 위해…….
가문 대신 가족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뒤에 붙었던 ‘그러니 가문을 부흥시켜라’, ‘네게 맡긴다.’ 등의 말들은 떼어 내더라도, 그 말만큼은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족에 관해 다른 것은 배운 적이 없으니.
‘내가 누나, 내가 어른. 그러니까. 힘든 일은 내가 해야 해.’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다.
동생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었다. 바깥에서도, 이곳 대미궁에서도.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빨리 강해져야 해.’
다른 사람들은 동생에게 머리가 나쁘다고, 무식하다고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똑똑하기만 했다.
‘동방어도 할 줄 알고. 또…… 음……. 뭐 어쨌건, 똑똑해.’
재능도 무력도 뛰어난데 똑똑하기까지 한 동생.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그의 칼이 되는 것뿐이다.
‘더는 짐이 될 수 없어.’
그 강박이 그녀의 정신을 칼같이 벼려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어둠을 보면서 각오를 다졌다.
스스스스스.
그림자 악마는 보통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어둠 속에 숨겨진 핵과 그 주변을 감싼 마기가 그림자 악마의 본신이다.
그리고 놈들은 상대하는 대상에 따라 물리적인 형태를 바꾸는데, 보통 사냥감의 그림자에 숨어든 뒤 마기를 특정한 방식으로 응집시켜 공격해 온다.
하급에 속하는 섀도 고스트는 형태가 없는 만큼 물리력도 약하기에 그저 통째로 뭉개 버리면 되지만, 최상위급 개체인 이 섀도 핀드 같은 경우는 형태는 없으면서도 순간적으로 응집된 마기의 강도가 강철을 찢어 버릴 정도였다.
바로 지금, 그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검은 마기로 형성된 손톱과 꼬리를 휘두르는 인간형 괴물처럼.
쩌어어어억.
그 일격이 만들어 낸 파동과 함께 어둠이 자리한 공간이 통째로 일그러지는 듯한 충격파가 퍼졌다.
- 크르?
인간형 그림자 악마 한 마리가 자신이 잘라 낸 어둠의 일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는데,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에 의아해하던 그 순간.
푸슉.
자신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검은 단검을 보고서야 놈은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둠 속에 허물을 남기고 적을 방심시킨 뒤 공격하는 ‘동족’의 수법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 키케케케.
그림자 악마는 이내 웃음소리와 비슷한 소음을 내며 스르륵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한 단검의 주인, 루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빗나갔다. 정확히 가운데를 노렸는데.
‘찌르는 순간 핵이 움직였어.’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대미궁의 그림자 악마는 생각보다 더 짜증이 나는 상대였다.
최소한 한 마리는 기습으로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초반부터 예상과 어긋났다.
- 키케케케.
- 크크크큭.
- 키키키키.
어느새 주변을 온통 새카맣게 물들인 짙은 어둠 속에서, 사람의 웃음소리와 비슷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항상 은밀함을 지키는 그림자 악마가 저런 소리를 낸다는 것은 자신을 경계한다는 의미. 어둠 속을 울리는 기괴한 소리로 사냥감의 감각을 혼란시키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사방을 자욱하게 물들이는 마기는 분명 좋지 않은 징조였다.
상대가 자신들과 비슷한 수법을 쓴다는 것을 깨달은 그림자 악마들이 어둠 속에 기운을 뿌린 것이다.
자신이 숨어들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은신할 만한 공간을 선점한 것일 터.
하지만.
‘얼마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걸로 자신의 은신을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녀의 몸이 스르륵 사라지는 순간.
- 키케?
- 키키?
- 크크?
어리둥절한 악마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루나는 확신했다. 놈들은 마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자신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 어둠과 그림자는 다르지 않으니, 그 근원은 같다.
- 그것을 깨닫는다면, 악마의 눈조차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마기의 마나 치환법. 우리 선조도 이걸 알았던 거야.’
전해 오는 비전, 그림자 은신에서 도통 그 의미를 알 수 없던 문구가 최근에나 해석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태 찜찜했던 한 가지 가정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아마 후작급 마수의 그림자에 일주일이나 숨어 있다가 놈을 죽였다는 전생의 자신도.
‘……이게 가능했던 거야. 그런데 타이니는 몰랐고.’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전생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확실히는 모른다.
어쩌면 동생이 말해 준 것 이상으로 동생과 그 동료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거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의 자신처럼 삶에 회의감을 품고 영혼이 썩은 채로 나이를 먹었다면 자신은 그 누구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 서로 목숨을 한 번 이상 구해 준 동료.
- 믿을 수 있는 동료였지.
아니,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라도 거인이었다는 동생에게 피의 증명을 써 보지도 않았을 테고, 어미에 대한 원망 탓에 세계수의 수호자도 색안경을 끼고 봤을 것이다.
서로 목숨을 구해 줬다면, 아마도 동생이나 그 동료들에게 먼저 도움을 받은 거겠지.
‘아니, 확실히 그랬을 거야. 받은 빚을 갚기만 했겠지.’
어쩌면 자신은, 신뢰에 찬 동생의 눈빛을 받을 자격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르기 시작할 때.
- 크크?
- 키키?
- 키에!
사방을 감싼 그림자 악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아닌, 뒤에서 멀쩡히 그 굳건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동생을 향하여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서야 먼저 나선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몸을 드러냈다.
- 키에!?
그리고 그 즉시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스사사사사.
스각.
스가가각.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 서 있는 듯,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칼날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섀도 스텝과 그림자 이동을 최대한 발휘해 보지만, 모든 공격을 완전히 피해 낼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갑옷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옅은 자상들이 무수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 크캬캬캬캬!
- 크크크크크!
- 키에에에에!
그림자 악마들이 내는 소리가 이번에는 확실히 웃음소리로 들렸다.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악마 특유의 비열한 감정이 느껴지는 웃음.
하지만 그 살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오직 감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고통으로 전생의 자신에 대한 찜찜함을 씻어 내자, 늘어졌던 정신이 다시 칼같이 벼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차분해진 머릿속에 동생과 검제가 전해 준 말이 떠올랐다.
- 루나, 아니 누나가 전생에 쓰던 기술은…….
- 오러를 각성할 때, 개성을 발현시키는 방법은…….
머릿속에 떠도는 수많은 말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정리되어 갈 때.
그녀의 손에 들린 단검, 가문의 신물 움브라(Umbra)의 검신에서 한없이 어두운 동시에 영롱한 검은빛이 눈길을 잡아끄는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