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월랑 진화
“킁.”
타이니의 뜬금없는 명령(?)에 잠시 반발하기는 했지만, 월랑은 영혼의 반려가 전해 오는 의지를 이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근간은 계약자인 주인의 몸 안에 있으니, 현신한 상태로 싸우다 죽는다 해도 피해는 주인만 당한다.
물론 그렇다고 한번 X 돼 봐라, 하는 심정으로 싸우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현신체가 파괴되면 당장 더 아픈 건 월랑 자신이었으니까.
거기다 주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월랑 역시 이 전투가 또 한 번 성장할 기회가 되리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성장을 가로막는 벽의 너머가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으니.
“내가 같이 참전하면 자극이 안 돼. 알지?”
“컹!”
다소 얄미운 주인의 행태 또한 참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준비가 다 끝나기도 전에.
- 크와아아아아앙!
뿔 달린 검은 수사자의 포효와 함께, 보통 사자보다 몇 배는 큰 검은 마수들이 전면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도, 풍겨 오는 냄새도 하나같이 역겹기 그지없는 마수의 무리.
월랑은 이내 투지를 불태우며 그런 괴물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월랑은 그저 4단계의 정령만은 아니니까.”
타이니는 그렇게 루나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는 멀티 클래스가 크게 성장할 수 없는 이유를 대미궁에 들어와서야 확실히 체감했다.
자신처럼 이미 영혼이 길을 개척해 놓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7단계의 벽을 넘는 것이 몇 배는 더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사실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티나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당연히 그 어려움만큼 얻는 이득도 있었다.
- 너도 이젠 느끼고 있는 거지? 영혼의 힘.
‘그래, 알아.’
에스티나의 말대로, 두 갈래로 나뉜 이 길이 결국 하나로 합쳐지는 날이 오리란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생의 자신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하 10층에 이른 지금 첫 번째 벽 정도는 넘어야 했다.
“가라, 월랑!”
- 컹!
이미 순식간에 대광장의 앞까지 돌진한 월랑이 그 투지에 호응하듯 짖었다.
그리고.
쾅!
- 깽!
수사자보다 먼저 튀어나온 암사자 한 마리를 단숨에 날려 버린 후 호기로운 포효를 내질렀다.
- 아우우우!
그리고 곧바로.
- 켕!?
다른 네 마리의 암사자에게 순식간에 사지를 물어뜯겼다.
쿨럭.
“커흑……!?”
저 바보가…….
월랑이 흐릿해지는 것과 동시에 옅은 피를 토해 낸 타이니가 눈을 부릅뜨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타이니!?”
“아, 아직 괜찮아.”
쿨럭.
타이니는 월랑에게서 전해 오는 충격을 그대로 감내하며 다시금 영혼의 힘과 마나를 녀석에게 집중시켰다.
보통의 동물, 아니 영물이었으면 그대로 즉사했겠지만 월랑은 정령.
주인의 힘을 전해 받은 월랑의 현신이 다시금 빠르게 복원을 시도했다.
언젠가부터 이상해진 월랑이 기어이 싸움에서까지 겉멋을 부리다 당한 것인데.
‘왜 내가 쪽팔리지?’
나 때문에 저렇게 변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럼 누구 때문이냐! 음…….
아무튼 나 때문은 아니다. 절대.
“피, 피, 나는데…….”
“괘, 괜찮아. 진짜야!”
걱정이 가득한 루나의 눈빛이 그를 더 쪽팔리게 했다.
‘젠장.’
잘해라, 또 실수하지 말고!
‘이상한 짓 하면 이 마기 가득한 대미궁 안에 계속 소환해 놓을 거야.’
그 의지가 전해지자, 검은 사자 무리와 난투를 벌이는 월랑의 움직임이 확실히 빨라지는 것 같았다.
“크르르.”
월랑은 주인으로부터 전해지는 마나와 영혼의 힘을 느끼며 다시금 전신에 힘을 주었다.
쾅!
힘껏 휘두른 앞발이, 자신의 다리를 물고 있던 암사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캬아앙!”
쾅! 쾅!
우드득.
앞발과 뒷발로 두 마리를 더 날려 버리고, 남은 한 마리는 단숨에 목을 물어뜯었다.
콰드드드득.
“끼이이잉.”
이내 숨통이 끊어진 놈을 바닥에 팽개치자, 그때부터 사자 무리는 쉽게 덤벼들지 않았다.
- 또 바보짓 하지 마라. 진짜.
전해 오는 주인의 영파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따지고 들 때가 아니었다.
생전에도 꼭 이런 상황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며 잠시간 실수가 있었던 것뿐이다.
초원에 살던 사자 무리가 무엇 때문인지 마기에 오염되어, 자신이 있던 북쪽 숲까지 침범한 사건.
동족들을 수없이 잃어가며 수사자를 죽였던 그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며 잠깐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크르르르르!”
월랑은 자신을 포위한 암사자 무리 저편의 수사자를 노려보았다.
마나도 마기도, 그 기운을 받아들이는 건 어느 정도는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던 동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마나가 아닌 그런 더러운 기운을 받아들였는지, 왜 먹지도 않을 동물들을 살육하는지.
그때도 그것이 의문이었지만, 그 이유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저 혐오스러운 생물들을 죽이는 것뿐이다.
“아우우우우우!”
“크와아아아앙!”
호기롭게 지른 하울링과 그에 반발하듯 터져 나온 적의 포효.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달려드는 암사자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본 듯 ‘느끼며’, 월랑은 바람처럼 허공으로 높게 뛰어올랐다.
“킁!?”
“캥!?”
그러자 마물들도 자신을 따라 점프하며 공격해 왔지만, 허공을 다시 밟으며 그것을 피하고 도리어 놈들의 뒤를 잡았다.
우드득.
쾅.
가장 먼저 자신을 따라 뛰어올랐던 암사자의 목을 물어뜯으며 착지하는 순간, 다시 뒤를 노리는 것들이 ‘느껴졌다.’
다시금 시작되는 도약과 공중 회피의 기동.
“컹!”
“크릉!?”
생전에도 가장 자신 있었던 전투법이 오랜만에 홀로 발휘되고 있었다.
덕분에 잊고 있던 생전의 기억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북부 산맥의 차갑고 높은 나무들 사이를 거침없이 누비며 더러운 냄새가 나는 놈들을 사냥하던 기억이.
영혼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 그 어떤 영물이나 마물보다 감각이 뛰어났으며, 허공을 밟고 뛸 수 있기에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았던 거대한 늑대. 자신의 본래 모습이 말이다.
적을 파악하는 정보 처리 능력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기동 능력은 어떤 마물의 전투 특성보다 뛰어났으니, 그것이 그를 숲의 제왕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 그랬구나.
그렇다, 주인.
이것이 원래 나의 전투법이자, 북쪽 숲의 주인이 가졌던 진실된 역량이다.
자신이 주인의 특성을 받아들여 훨씬 무겁고 단단한 현신체를 얻었듯, 주인 역시 자신의 특성을 깊게 이해하고 체화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아니 ‘우리’는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달빛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테니까.
- 달빛의 냄새를 맡아? 그게 무슨 뜻…… 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동족이, 선조가, 새끼들이……. 그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가 이루어진 달.
그것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생전 그의 마지막 목표였고, 끝내 이루지 못한 한이었다.
내 동족들의, 가족들의 냄새를 보다 가까이서 맡고 싶었던 것.
- 네가 달빛을 좋아하던 것도 그럼…….
주인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다른 듯했다.
‘달’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는 과정에서, 서로의 영혼이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 네가 믿고 싶은 것을 믿어.
주인이 먼저 자신의 생각을 굽혀 주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리하면 될 뿐이었다.
달이란 낮에 뜨는 태양이 만나지 못하는 밤의 짝이라고?
그럼 주인도 믿고 싶은 것을 믿으라.
어차피.
- 그럼 태양이 ‘나’이고, ‘우리’다.
- 짝,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같다.
우드득.
주인의 영혼과 더욱더 가까워져 간다는 것을 느낄 때쯤, 월랑은 거의 열 마리째 암사자의 목을 꺾었다.
그리고 그제야.
“크와아아앙!”
월랑이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회복한다는 것을 깨달은 검은 수사자가, 불쾌하고 섬찟한 마기의 안개를 사방에 내뿌리며 달려왔다.
암사자들이 몸에 비늘을 두르거나 말 그대로 지독(毒)한 입 냄새를 풍기는 것과 달리, 공간 자체를 물들이는 마기.
주인의 지식에 비추어 보니, 저것이 6단계에 이른 마물의 권능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는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 차라리 처음부터 같이 덤볐어야지. 안 그래, 월랑?
“컹!”
주인의 뜻에 격하게 동의했다.
놈은 너무 늦었다.
- 정령술사 5단계.
- 영혼 동화(靈魂同化, Soul assimilation).
우드드득.
단숨에 대량으로 주입된 마나가 월랑의 체고를 순식간에 10cm 넘게 키웠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견고해진 육체는 마기의 침습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으니.
애초부터 단계를 초월한 전투력을 발휘하던 정령, 월랑은 검은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수사자를 향해 한층 거대해진 앞발을 휘둘렀다.
영혼을 보는 자신에게 시야를 흐릴 뿐인 안개 따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 콰아아아아아앙!
“끼에에엑!”
요란하게 내지르는 그 마물다운 비명이 전투의 끝을 알려 온 그때.
거대한 몸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월랑은, 그리고 그 눈 속에 비친 타이니의 영혼은 동시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후으으으으.”
번쩍 눈이 뜨인 순간, 타이니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일순간 비틀거렸다.
한순간 전장에 몰입되었던 영혼이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은데, 그가 느끼는 감각이 너무 달라졌던 것이다.
“괜찮아?”
“……어.”
타이니는 자신을 부축하는 루나의 말에도 그저 멍하니 대답하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5단계부터가 진정한 정령술이라고 하던가.
정령이 가진 첫 번째 능력을 자신의 몸으로도 발휘하게 되는 경지.
전투 능력이나 라프탄 같은 특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늘 월랑과 함께 있으니 영혼을 보는 능력이 생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었는데.
“확실히 다르네…….”
“뭐?”
- 컹!
영문 모를 소리에 루나가 의아해했지만, 멀리 광장에서 달려오는 월랑은 신이 난 듯이 호쾌하게 짖었다.
새롭게 보는 세상이 어떠냐는 물음.
그에 타이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주변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마나 감응력에 영혼을 감지하는 능력까지 더해지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마치 기존의 감각이 몇 배로 확장되는 듯한 느낌.
그뿐만 아니라.
우우우웅.
정령술의 성장에 따라, 어깨의 아니무스가 반 박자 늦게 노을빛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후읍!”
초월무구의 특성이 다시 한번 그의 영혼을 강화시키며 한없이 고양되는 것이 느껴지는데.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
그 덕분에 본의 아니게 곁에서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루나의 영혼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승격의 순간 영혼이 한계 이상으로 고양되면서 새롭게 얻은, 영혼을 읽는 힘.
거기에 굳이 자신에게 감출 것이 없다는 듯이 열려 있던 루나의 마음.
그랬기에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그 너머에 담긴 ‘멍든’ 마음까지 조금 읽어 버리게 되었다.
정말로 본의 아니게 말이다.
“괘, 괜찮아. 그보다 루나…….”
“응? 루나 아니고 누…….”
“그래, 누나. 고마워.”
그래서 타이니는 굳이 말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응?”
“전생에도, 지금도 너무 큰 도움이 되고 있어. 항상 의지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그 말에 루나의 얼굴이 살짝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그냥, 그렇다고.”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마음은 묻어 둔 채로, 타이니는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미궁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지난 시점, 타이니가 목표로 했던 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