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대미궁의 변화
“캬아아악!”
“컹!”
하나같이 눈을 붉게 물들이고 덤벼드는 놀들.
더군다나 그 수가 얼핏 봐도 천은 훨씬 넘는 듯했으니, 그 개 대가리 인간형 괴물의 파도에는 그야말로 사람을 질리게 하는 살벌한 기세가 있었다.
하지만 정령과 함께 그 괴물의 파도에 달려드는 인간에게는 한 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인상은 쓰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 드러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짜증이나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더럽게! 많네!”
“크와아아앙!!”
성난 고함 뒤로 이어진 월랑의 살기에 찬 포효에 미친 듯이 달려들던 놀들이 멈칫하는 순간.
노을빛 마나가 이글거리는 워해머가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콰아앙!
“깽!”
전력을 다한 강렬한 스윙은 굉음과 함께 놀들을 날려 버린 뒤, 마치 관성이 없는 것처럼 다시 반대로 휘둘러지며 그 뒤에 있던 놈들까지 단번에 휩쓸었다.
콰아앙!
“끼에엑!”
쾅!
“끄륵.”
박살이 난 놀들의 잔해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사이로 진득하게 남은 노을빛 마나가 무채색의 공간을 점차 점유해 갔다.
“컹!”
우두득.
콰직.
워해머의 궤도에 어설프게 휩쓸려 중상을 입고 쓰러진 놀들은 지나가는 월랑의 발에 밟혀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
“전부 꺼져!”
꽈아아앙!
몸뚱이가 터져 나간 놀들의 전열이 그대로 무너지고, 그 사이를 번개처럼 파고드는 늑대와 기수. 그들이 만들어 낸 기세는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았다.
광기에 차 달려들던 놀들이 일순간 주춤할 정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 캬아아아! 컹!
멀리서 다시 우두머리의 포효가 들려오자, 주춤하던 놀들의 파도가 더욱 거칠게 밀려들었다.
“컹!!”
“크와앙!”
쾅!
“흐. 귀찮게.”
그에 또 짜증이 치밀었지만, 타이니는 혀를 차면서도 연신 워해머를 휘둘렀다.
자신의 전진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이목이 이쪽에 쏠린다면.
‘오히려 환영이지.’
이미 육체의 강건함은 전생을 넘어섰고, 거기에 더해진 영혼의 힘 덕분에 전투 지속력도 상식을 초월한 지 오래.
거기다 초월무구 아니무스와 월랑까지 더해졌으니, 지금의 그는 전생보다 역량은 부족할지언정 다수의 약자를 상대하는 데는 오히려 강점이 있었다.
그러니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덤벼 준다면.
“나야 좋지! 모조리 죽어라!”
살기에 찬 고함이 울려 퍼지고, 노을빛 폭풍은 끊임없이 전진하며 사방에 피 보라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타이니의 성에 차지는 않았다.
‘느려. 너무 느려! 이 망할 마기 때문에.’
그러나 그의 노을빛 마나가 사방에 가득한 마기를 밀어 내면서 퍼져 나가다가, 마침내 일정한 패턴을 되찾은 그 순간.
“전부! 뒈져라!”
타이니식 전투 살법 2식, 폭풍 휘두르기.
콰콰콰콰콰콰콰!
주변의 핏물과 마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직경 100m에 가까운 노을빛 회오리바람이, 말 그대로 폭풍처럼 날아가며 전방 수백 미터를 초토화시켰다.
콰콰콰콰콰콰.
달려들던 놀들 수백 마리가 노을빛 마나의 회오리에 한순간 갈려 버리고, 그 잔해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광장 전역에 피의 비가 쏟아져 내렸으니.
투두두두둥.
“캬악!”
“캭!”
“크륵!”
그 압도적인 폭력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는 광기에 휩싸였던 나머지 놀들까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그래, 이거지.”
타이니가 뒷걸음질을 치는 놀들을 보며 차갑게 웃던 그때.
다시금 멀리서 우렁찬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캬오오오……!
아니, 퍼지다가 끊겼다.
마치 포효를 내지르다가 갑자기 허파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 맥 빠지게 사그라드는 소리.
아마 사실도 거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루나.’
타이니가 그 원인을 예상하며 사납게 웃는데, 그사이 붉게 물들었던 놀들의 눈동자가 다시금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거대한 늑대와 기수의 모습이 들어오자마자.
“크르르르?”
“컹!?”
“컹! 컹!”
놀들이 무언가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쯧.”
패닉에 빠진 놀들 사이로 당당하게 내달리는 월랑과 타이니.
“가자.”
그 질주의 끝에는 다른 놀보다 두 배는 큰 거대한 놀의 시체가 있었다.
예상대로 심장 부근이 휑하니 뚫린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개 대가리 괴물의 시체가.
그리고 그 시체를 만들어 낸 암살자가 그를 향해 턱짓을 했다.
“다, 안 죽여?”
사방으로 도망치는 놀들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암살자가 아니라 학살자 같은 섬뜩한 말이었지만, 어차피 마물과 인류는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
단순히 서로 적대하는 걸 넘어 언젠가는 한쪽이 멸절해야 끝이 날, 신화시대부터 이어진 숙적이었으니까.
하지만 타이니는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다 죽여? 귀찮게. 어차피 목적지가 여기도 아닌데.”
“그럼, 동의.”
“그러나저러나, 문제는 남은 놀들 따위가 아니야.”
타이니는 다시금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대광장의 너머, 마기가 조금 더 진하게 느껴지는 아래로 향하는 거대한 검은 구멍을.
‘분명 여기가 맞는데…….’
새삼 놀들이 사라져 훤해진 공간을 보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대미궁의 도처에 있는 나무뿌리를 어설프게 엮어 지은 저 움집들을 어디서 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고블린이 아니라 놀이지? 그것도 이렇게 많이?”
“……기억, 확실해?”
고개를 갸웃하는 루나의 표정에서 ‘네 머리를 믿냐?’라는 뜻이 읽혔다면 자격지심일까.
“확실해!”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물론.
“그런데, 왜?”
“……나도 모르지.”
이어진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미래를 바꾼 것이 대미궁에도 영향이 있었던 걸……까? 아냐, 그럴 리가.’
대미궁은 인외마경으로 불리는 지역.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건, 그게 이 안의 사건에까지 영향을 줬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그렇다면.
“전생보다 15년 정도 빠르게 온 게 문제라는 건데…….”
대체 그사이에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단순히 의문의 사고 등으로 인해 놀 부족이 전멸한 뒤, 그 자리를 고블린 부족이 차지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긴 한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전생에 자신이 방문했던 시기와 지금 사이에, 이 층뿐만 아니라 대미궁 전체에 본질적으로 어떤 변화가 생긴 거라면?
마물의 대지에서 상대적으로 강력한 놀 부족이 갑자기 박살이 나고, 약한 고블린 부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 곤란한데…….”
“뭐가?”
“응?”
“뭐가, 곤란?”
“아…….”
타이니는 그제야 자신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음을 깨닫고 루나에게 자신의 고민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그 고민에 대한 속 시원한 해결책을 들을 수 있었다.
“왜, 고민해?”
“응?”
“원인을 알면, 어떻게, 할 건데?”
“그야…….”
그 말에 골똘히 생각해 보니 답은 금세 나왔다.
그래, 안다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달라지는 게 없네?”
“그렇지. 그런 고민, 시간 낭비야.”
“오…….”
“고민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가자.”
그 말과 함께 미련 없이 돌아서는 루나.
‘제법인데?’
현생의 사신이 처음으로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타이니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킁?”
어이없다는 듯 자신들을 쳐다보는 월랑의 모습도.
검제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속이 터진다며 드러누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애써 무시해 가면서.
* * *
- 그릉?
대미궁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진득한 마기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그곳을 어슬렁거리던 ‘그’는, ‘짧은 잠’을 청하려다 문득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만이 존재하는 공간의 회색 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벽 너머, 머나먼 위쪽에 등장한 새로운 존재감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의 최상층에,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 바깥의 생명체가 들어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고층에서는 간혹 몇 개의 층에 존재하던 예민한 먹이 중 일부가 바깥으로 탈주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가 ‘짧은 잠’에서 깨어날 때는 항상 있던 일.
먹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들이 안으로 들어온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이게 얼마 만인가?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선뜻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라는 것만 생각났다.
그분께서 이곳을 지키라 명하셨던 그때, ‘그’는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며 아득한 세월을 버티기 위해 스스로의 힘과 지성을 일부 포기하였으니.
더 깊이 생각해 봤자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추측하자면 아마도 지난 수면기 이전의 일이 아니었을까.
어쨌건…….
- 좋은 일이다.
‘그’는 홀로 존재하는 곳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안 그래도 ‘긴 잠’, 즉 휴면기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겪어야 할 폭식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지루하던 차에 이번에는 소박하게나마 별미를 맛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 것이다.
폭식의 때, 각층에서 ‘가장 잘 익은’ 놈들만 잡아먹는 것도 언젠가부터는 일정한 종만 먹잇감이 되는 패턴이 반복되던 중이었으니까.
다만 자신이 다시 움직이기 전까지 그 미약한 생명들이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가 조금 걱정이 될 뿐.
하지만 이내 바로 확신이 들었다.
- 쉽게 죽진 않을 것들이다.
스스로 영락하여 힘과 지성을 다소 잃었다고 한들 ‘그’는 한때 운명(Karma)의 힘에 닿았던 자.
이젠 흔적만 남은 영혼의 격으로도 ‘그’는 미약한 것들의 짧은 운명을, 그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다.
“크르르.”
“캭!”
“크륵.”
그 즐거운 예감에, 실로 오랜만에 세 머리가 동시에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
작은 음성만으로도 더욱 진득하게 터져 나오는 마기가 짙은 어둠을 움직였고, 자연스레 뜨인 세 쌍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빛이 한순간이나마 주위를 밝혔다.
그 순간 훑어본 자신의 모습.
전신에 촘촘히 박힌, 오랜 세월 상처 하나 없이 자신의 몸을 지켜 온 비늘에는 여전히 윤기가 흘렀고.
거대한 육체를 지탱하는 4개의 다리와 육중한 꼬리는 강력한 힘과 마력을 품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각 머리당 2개씩, 영락하며 하나가 줄어든 6개의 뿔과 굳이 날 일이 없어서 퇴화해 버린 작은 날개가 조금 아쉬울 뿐.
여전히 ‘그’의 육체는 과거 찬란한 영광의 때의 파편을 간직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 변화란 언제나 환영이다.
어쩌면 지금 저 먹이들이 들어온 건 그분이 다시 재래한다는 신호가 아닐까.
유예된 ‘집행’의 때가 비로소 다가온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짧은 잠’을 자는 기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태는 곧 수면기가 다가온다는 증거.
언제나 불쾌하기 그지없던 이 한없이 늘어지는 기분도, 이번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번 가장 긴 ‘짧은 잠’이 끝나고 나면, 그때가 바로 폭식의 때가 될 것임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다시금 긴 수면기에 들어서기 전에 영양분을 가득 채울 시기.
그리고 그때가 되면.
- 별미, 혹은 계시……. 어느 쪽이건 좋다.
기왕이면 이 길고 긴, 세월을 세는 것조차 잊어버린 기다림의 시간이 끝난다는 계시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작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실제로 바라는 것은.
지루한 이 삶에 그 작고 미약한 것들이 조금의 즐거움이라도 주기를.
- 나를 자극해 주기를.
‘그’는 그렇게 바라고 또 바라며 육중한 몸을 천천히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