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엘븐하임의 드워프
엘븐하임에 머문 기간은 짧았다.
애초에 필요로 했던 것은 정비와 휴식, 그리고 변한 상황에 대한 정보뿐.
크게 걱정할 만한 변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타이니는 딱 이틀 동안 장비의 점검을 마친 뒤, 다시 대미궁으로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들을 찾아왔다.
바로 수염 없는 드워프가.
“그란돌?”
“하하. 놀랐나, 친구? 난 자네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멋쩍게 웃는 그란돌의 시선이 슬쩍 타이니의 등 뒤로 향하다가 이내 놀란 눈의 루나와 마주쳤다.
“엘븐하임에 하프 엘프가?”
“드워프가, 엘븐하임에?”
서로 놀라고, 동시에 저들끼리 째려보는 순간.
타이니가 그 어색한 대치에 끼어들었다.
“그란돌, 네가 왜 엘븐하임에 있지?”
“그, 그게. 하하. 자네가 준 세계수 님의 가지가 있지 않나. 자네 친구라면 괜찮다길래 눌러앉았네. 뭐, 수염이 없으니 드워프도 아니라나 뭐라나…….”
말을 하다 말고 우울한 표정이 된 그란돌이었지만, 어쨌거나 타이니로선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하긴 수염이 없으니 키 작고 뚱뚱한 엘프 꼬마 같기도 한데…….’
왜 엘븐하임에 남을 수 있었냐는 둘째 치고.
“재료 구하러 열심히 돌아다녀야 한다면서?”
세계수의 가지를 비롯해 희귀한 재료들이 있어야 초월무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란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눌러앉았다?
“설마 포기한 거냐?”
“아, 아니야! 절대!”
실망감이 섞인 의심쩍은 눈길을 보내자, 그란돌이 바로 펄쩍 뛰었다.
“아, 아직은 엘븐하임에 필요한 게 있어서 그래. 정확히는 엘븐하임의 서쪽에.”
“서쪽?”
타이니가 설마 싶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그란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마역에…….”
“마역에 뭐?”
“그, 그게 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들어가도 될까?”
그 티 나게 얼버무리는 태도에 타이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 자식,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어서 왔다기보다…….
“……내가 대미궁에 간다는 걸 알고 왔구나.”
“응, 수호자님이 말해 줘서…….”
어색하게 웃는 그란돌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지금은 드워프 부탁이나 들어줄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만나서 반가웠고. 잘 가라.”
냉정하게 문을 닫아 버리려는데, 그란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 우리 친구잖아!?”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친구?”
턱도 없는 소리에 타이니가 콧방귀를 뀌는데.
“초, 초월무구 얘기야!!”
이어진 그란돌의 고함에는 타이니도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호로록.
“고마워, 친구. 이래서 친구 좋다는 게…….”
“자, 무슨 얘기인지 자세히 말해 봐.”
차를 마시며 눈치를 보는 그란돌에게 타이니는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길 재촉했다.
“그, 그게…….”
그럼에도 쉽게 말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그의 작은 체구와 어우러져 정말 고민 많은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겉모습이 그럴 뿐 속은 159세의 늙은이다. 장생족인 드워프 기준으로도 청년기를 지나고 있는 성인.
“어려운 일이냐?”
“……초월무구의 핵이 될 만한 재료가 필요해.”
대충 들어도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돌려보내자.’
타이니가 바로 그란돌을 내보낼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루나가 눈을 빛냈다.
“초월, 무구?”
“그래, 초월무구. 내가 초월무구를 만들면 이 친구에게 먼저 팔기로 했거든.”
그에 루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제게 향하자, 타이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들면 말이야, 만들면.”
그 대답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득 들어있었다.
솔직히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스탬프를 만든 장인이자 렌돌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었었다.
초월무구를 만들겠다는 그 무모함이 내심 기껍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좀…….’
회의적이었다.
스탬프는 분명 뛰어난 아티팩트긴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불량품으로 남았을 물건이다.
결정적으로, 전생에는 그란돌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전생에서 그란돌은 초월무구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뜻.’
그 생각이 타이니로 하여금 부정적인 마음을 품게 한 것이다.
하지만.
“초월무구, 만들 가능성, 있어?”
루나의 그 물음에 그란돌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 거침없는 대답에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는데, 그에 그란돌이 살짝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는 중얼거렸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한데…….”
그 모양새가 상당히 불쌍해 보였는지 루나가 타이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
“루나, 지금 우리 코가 석 자야.”
“들어 보고, 할 수 있는 거면, 괜찮잖아?”
그 말에 타이니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란돌이 화색을 띤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전에 타이니 친구 망치 만들었다. 실력은 증명했어!”
그에 루나의 눈이 더욱 반짝였지만, 타이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초월무구는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만약, 만들 수, 있으면?”
루나의 천진난만한 반문에 타이니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전생에는 그란돌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어.’
그 속삭임을 듣자 루나도 마주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유는 그와 좀 다른 것 같았다.
아니,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쏘아보는 대상이 타이니였던 것이다.
“그런 너는?”
“응?”
귓속말로 전한 말이 큰 목소리의 반문으로 돌아오자 타이니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너도, 실패했었잖아. 정확히는, 우리가.”
이어진 그 말에 타이니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그렇……지.”
“그럼, 이번에도, 실패할 거야?”
“아니지. 절대.”
“그럼, 저 드워프, 안 도와줄, 이유는?”
그 말에 타이니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다.
‘……모든 것은 바뀔 수 있다.’
아니, 바꿔 가야 한다. 그리고 모든 걸 바꿔야 하는 사람이 나다.
어질어질한 충격, 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뜻밖의 깨달음에 타이니는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미안.”
“알았으면, 됐어. 역시 내가, 누나.”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는 루나의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지만, 타이니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 내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때.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란돌이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실패할 거 같아서 그래?”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고 대답하기보다, 지금은 녀석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란돌, 혹시 네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하지만 그에 대한 그란돌의 대답은 이번에도 역시 망설임이 없었다.
“실패? 아니.”
순간 무슨 자신감일까 싶었는데.
“그런 거 생각하지 않아. 될 때까지 할 거니까.”
이어진 단순한 대답이 타이니를 웃음 짓게 했다.
심각한 물음에도 이렇게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둘 중 하나다.
진심이 전혀 없는 헛소리거나, 반대로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기에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진심이거나.
지금은 누가 봐도 명백히 후자였다.
“될 때까지라……. 그래, 그게 맞지. 나도, 너도.”
“응? 너도?”
어리둥절해하는 그란돌에게 타이니는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내가 오히려 네 마음가짐을 본받아야겠다. 나도 모르게 느슨해졌었나 봐. 미안했다. 그리고 고맙고.”
“무슨 소린지…….”
잠깐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란돌은 이내 그 안에 담긴 속뜻을 깨닫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 부탁 들어준다는 거지!?”
“그래, 내가 가능한 일이면.”
“내가, 아니고, 우리가.”
루나가 불쑥 끼어들었지만, 그 또한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가. 가능한 일이면 말이야.”
그 대답에는, 새삼스레 각오를 다지게 만들어 준 엉뚱한 방문에 대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타이니는 그란돌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부탁을 구체적으로 듣기 전까지는.
“그럼. 대미궁에 초월급 마수 있으면, 그 심장이나 정수 같은 것 좀 가져와 줘. 싱싱할수록 좋아. 강할수록 더 좋고. 헤헤.”
“……뭐 인마?”
* * *
“그, 그 마나의 자동 집적을 가능케 하고 능력의 한계치를 높일 핵이 필요하단 말이야!! 아니면 마물들의 정수를 끌어모아서 십수 년 동안 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무구의 성능이…….”
한바탕 칼부림, 아니 망치 부림이 날 뻔했던 상황은 그란돌이 고함을 치면서 진정되었다.
“핵?”
“그, 그래. 가장 쉬운 방법은 마도사가 죽을 각오로 원정을 쏟아 넣거나 대마도사가 전력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을 생각으로 영구히 마나를 투자하는 건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7단계 초인급 마법사의 목숨이나 8단계 마법사의 생명력 일부 혹은 전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당연히 그런 희생을 감내할 마법사가 있을 리는 없으니, 자연스레 귀가 기울여졌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 들어 올린 망치를 도로 내리지도 않는 무식한 놈의 협박에, 그란돌은 식은땀을 닦아 내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동급 이상의 마물의 정수라면, 세계수의 가지로 정화해서 역으로 마나를 끌어들이는 핵으로 만들 수 있어!”
“그래서 나더러, 초월급 몬스터의 핵을 뽑아 와라?”
그 핵을 박살 내서 죽이는 것도 어려운 판에, 괴물을 제압한 후 정수만 뽑아 내서 가져오란 말이었다.
“과, 광휘의 기사라면 그 정도는 할 수 …….”
자신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인지 모를 리 없는 그란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 안 되나?”
아니다.
중얼거리는 꼴을 보니, 그냥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망치를 든 타이니의 손에 힘줄이 더욱 불거지는데, 다행히 그 망치가 휘둘러지기 전에 그란돌이 개념을 일부나마 찾아온 듯했다.
“……가, 가능하면 말이야.”
그 겁을 잔뜩 집어먹은 불쌍한 표정이 타이니의 인내심을 조금이나마 늘려 주었다.
욱해서 망치를 들기는 했지만, 사실 그란돌의 말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우는 것이 대미궁행의 목적이 아닌가.
“후…….”
그 생각이 드는 순간, 타이니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확답은 못 하지만, 가능하면 그렇게 해 볼게.”
타이니의 그 말에 그란돌의 안색이 일순 환하게 바뀌었다.
“저, 정말!? 으하하하하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친구!!”
그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타이니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뭘. 그 대신, 만들면 나한테 먼저 팔기로 한 거 알지?”
“그럼! 난 내 이름만 높이면 돼. 광휘의 기사가 쓰는 무구라면 더할 나위 없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갈등하는 기색조차 없다.
그만큼 자신의 이름값이 올라간 것이라 생각하니, 이 또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구해 주면?”
“응?”
불쑥 끼어든 루나의 말에 그란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타이니, 말고, 다른 사람이, 구해 줘도, 만들어 줄 거야?”
“……어, 어음. 어, 허허. 누구든, 구, 구해 줄 수만 있으면?”
타이니의 눈치를 보며 슬쩍 나온 대답에 루나가 먼저 피식 웃고, 타이니 역시 실소를 흘리자 방 안은 어느새 웃음으로 가득 찼다.
뜻밖의 손님 덕에 다시 한번 각오를 새기면서 대미궁으로 향하는 목적이 하나 더 더해진 날.
그렇게 엘븐하임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