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천벌의 기사
“호오……!”
스스로 열린 덩굴 담장의 문 안으로 들어선 루나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숲의 도시. 그리고 그 안에서 뛰노는 동물들과 자신들을 바라보는 미형의 엘프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놀라운 광경일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타이니가 감탄하는 루나를 보다가 피식 웃으며 눈길을 돌리는데, 전에 왔을 때처럼 외부인을 향해 쏟아지는 엘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
“♬♬♪♪!”
어른 엘프들이 갑자기 아이들의 눈을 가리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타이니는 자신의 지나치게 예리한 감각 덕에 그들의 삐딱한 눈빛이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루나.’
정확히는 그녀의 ‘짧고’ 뾰족한 귀를 향한 시선이었다.
“♬♬♪!”
“♬♬♪!”
엘프들의 음성은 여전히 노랫가락처럼 들렸지만, 마치 전염병처럼 번지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엘프들의 모습은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이상하다 느낄 만했다.
“루드엘 님, 조금 빠르게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희가 조금 피곤해서.”
그 광경이 신경 쓰여 그렇게 말하자, 은빛 머리 엘프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조금 속도를 높이겠습니다.”
하지만 한번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루드엘 역시 굳이 루나 쪽을 쳐다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곤?”
“어, 내가 좀 피곤해서. 빨리 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의 루나를 보며 앞을 가리키는데, 그런 그에게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응?”
“난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마.”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에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순간 움찔하고 마는데.
“예상했던, 일. 그리고, 동생, 나 너무, 챙기려고, 해. 고맙지만, 괜찮아.”
“어……?”
“누나, 어른.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봤자 열아홉이잖아.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루나의 씁쓸한 미소 뒤에서, 이미 많은 시련을 겪으며 단단해진 마음이 느껴졌으니까.
미래가 바뀌면서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것만큼은 전생의 사신과 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 미안.”
“괜찮아. 고맙고.”
게다가 솔직하게 호의를 표하며 미소를 짓는 태도는 확실히 전생의 사신에게는 없었던 모습이었으니.
타이니는 자연스레 빙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루드엘이 안내해 준, 커다란 나뭇등걸 안의 집.
엘프답게 가구라곤 침대와 탁자뿐이라 소박하다 못해 다소 단출한 환경이었지만, 바깥에 보이는 녹색 풍경 덕인지 썰렁하기보다는 단아한 느낌을 주었다.
“나무가, 건물. 숲이, 도시. 예뻐…….”
루나는 창문, 아니 창문처럼 뚫린 옹이 틈으로 엘븐하임의 풍경을 감상하기 바빴다.
‘엘프의 피가 흘러서 그런가.’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그저 풍광만을 눈에 담는 모습.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사이가 좋네.”
풀잎을 엮어 만든 듯한 녹색 평상복과 물기가 다 마르지 않아 촉촉한 연녹색 머리가 어우러져 더없이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는 엘프였다.
“새삼 다시 봐도 신기해. 너희가 그렇게 사이가 좋다니.”
또르륵 찻물을 따르며 입을 연 에스티나의 말에 자연히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보여?”
“응. 우리, 사이 좋아.”
반문하는 타이니와 다르게 루나는 웃으며 인정했다.
“그런데, 왜? 이상해?”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물음에 에스티나는 눈을 크게 뜨고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너 말 안 했어?”
“뭐…… 구체적인 인간관계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 우울하고 힘든 이야기니까.”
절로 한숨이 나오는 진실이었다.
“……그렇긴 하지. 그럼 일단 우리 상황부터 되짚어 볼까?”
“그래.”
두 사람이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무슨 얘기?”
자기만 모르는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이 신경 쓰이는 듯, 루나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그 덕분에 일부러 빼놓고 말했던 전생의 관계를 다시 설명하느라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동생, 멀리하고, 수호자도, 경계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루나의 얼굴.
그에 타이니가 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우린 다 동료였어. 서로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었으니까.”
“난 아마도 엘프라서 그랬던 거 같아요, 루나 양. 아, 이렇게 불러도 되죠?”
혹여나 루나가 충격을 받았을까 에스티나마저 한마디 거드는데, 의외로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료. 좋아.”
“오?”
타이니가 웬일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이젠, 없던 일.”
루나는 그 시선을 보고 피식 웃더니, 명쾌한 대답으로 그를 납득시켰다.
‘이런 면에서는 또 어른스럽단 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성격이지만, 어쨌건 전생의 그 우울한 사신보다야 백만 배는 낫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에스티나 역시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히죽 웃은 루나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둘이, 웃는 거, 똑같아. 무슨 사이……?”
“그만 쫌!”
“음? 아마도, 좋은 사이겠죠?”
버럭 성질을 내는 타이니와는 달리 싱긋 웃는 에스티나.
루나는 그중 전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에스티나의 답변에 눈을 빛냈다.
“좋은 사이?”
“그럼요. 그리고 난 이제 루나 양하고도 그런 좋은 사이가 되고 싶네요.”
“에이…….”
이어진 말에 다시금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루나.
그 반응에 에스티나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젠장.’
진짜 왜 저러는데!?
루나의 엉뚱한 생각을 차마 설명해 줄 수 없는 타이니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일단 지금 상황부터 설명해 줘, 에스티나.”
“음……? 아, 그래. 그래야지.”
다시 만났을 때 피가 튄 전투 복장 차림이었던 것이 무색하게, 에스티나가 전해 준 상황은 제법 긍정적이었다.
“악마추종자가 아니라, 범죄자 조직을?”
“그래. 놈들이야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예 범죄 조직을 소탕할 겸, 놈들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벌인 일이지. 다행히 저릭이 중재를 해 줘서 오크 족장들도 흔쾌히 내 의견을 따라 줬어.”
“오?”
“사실 두 종족의 경계를 오가며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이 꽤 있었거든. 그 골치 아픈 놈들을 정리하는 셈 치고, 별 기대 없이 저질러 본 거였지. 그리고 다행히 성과가 있었어.”
자신만만하게 웃는 에스티나의 말에 타이니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성과?!”
“그렇게 잡힌 놈 중에 마기를 쓰는 놈들이 있었거든. 네가 말했던 대로 유도 신문을 해서 근거지 중 하나를 찾았어. 그리고 방금 그곳에 다녀온 거고.”
“그럼……?”
“6서클 흑마법사 한 놈이 지배하는 범죄 조직을 뿌리 뽑았지. 아쉽게도 그놈이 더 이상 입을 열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최소한 대륙 서부에서는 놈들이 다시 활개 치지 못할 거야.”
분명한 성과였지만, 애매한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서부……만?”
“제국에서는 네가 준 증거를 이용해 검제가 손을 쓰려 했는데, 그것을 빌미로 무슨 귀족가에서 정치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어. 로…… 어쩌구라고 하던데?”
“로…… 어쩌구?”
증거라면 아마도 라프탄일 테고, 거기에 관련된 귀족이라면…….
“로히터?”
“아, 그래. 그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쉽게 해결이 안 되는 듯하더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떠나오기 전 검제의 모습이 생각났다.
과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듯한 모습.
그리고.
- 약간 무리를 하더라도 하급 아티팩트 워해머 정도야 구해 보지. 며칠만 기다리거라.
- 죄송하지만, 그게 발렌티아 가문이 무리를 해야 할 정도인가요?
- 지금 상황이 좀 그래서 그렇습니다, 타이니 군.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한 귀로 흘려들었던 대화까지.
등 뒤에 메고 있는 워해머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괜히 검제가 걱정되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에스가르드 그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하겠지. 다만 나와 저릭과 함께 유동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하는 형편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제국의 일에 관여할 수도 없고.”
이어진 에스티나의 말은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제,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다. 내가 상관 안 해도 알아서 잘할 거야.’
그리고 정치 공작이라는 말을 들으니, 솔직히 도움이 될 자신도 없었다.
누가 자신에게 안 좋은 수작을 부린다고 하면, 그가 떠올릴 만한 방법이라고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로히터인지 뭔지, 그냥 머리를 깨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검제가 벌써 저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 그 검제니까.
‘믿는다.’
타이니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근심을 덜어 냈다.
“다른 쪽은?”
“왕국 연합도 연합이다 보니…… 그리드 그 양반이 통제가 안 되는 모양이더라고. 뭐, 웨어비스트나 테르티우스의 드워프들은 여전히 꿈쩍도 안 하고 말이야.”
“……상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동의.”
타이니와 루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에스티나는 그저 씩 웃어 보였다.
“좋은 거지. 적어도 네가 겪은 전생보다는 훨씬!”
그 단호한 말이 타이니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 이제 네가 말할 차례야.”
“응?”
“내 상황 설명은 끝났어. 검제한테 네가 대미궁으로 가고 있다는 통신도 받았고. 그런데 인간들의 통신은 비싸다면서 이유까지는 설명 안 해 주던데, 거기엔 왜 가는 거야?”
“아……. 더 빨리 성장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힘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지금 거기서 더 빠르게?”
에스티나는 눈을 크게 뜨며 어이없다는 듯이 타이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타이니가 엘븐하임을 떠났을 때보다 한 단계 성장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하, 동기야 그렇다 치고, 더 성장하고 싶다면 수련을 해야지 왜 대미궁에 가겠다는 거야? 너니까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사서 고생하는 거 같은데?”
“난 아무래도 다양한 강자와의 실전이 성장에 훨씬 도움이 되거든.”
마나바디의 적응 진화력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거라 믿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에스티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소리 같지만, 그 말을 하는 게 너라서 반박을 못 하겠네. 그런데 루나 양은?”
“루나도 벌써 벽을 마주하고 있어서. 수련만으로 뚫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특별한 계기가 필요해. 대미궁이라면 충분한 경험이 되겠지.”
“루나, 아니고. 누나.”
“하……. 그래, 누나.”
불쑥 끼어든 루나와 그 말에 억지로 대답하는 타이니.
그 모습을 보며 쿡쿡대던 에스티나는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은 전생에 비해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어. 그런데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는 거야?”
그 의아한 시선에 타이니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신전에서 자꾸 나를 찾아와. 이번에는 갓 핸드 경이 왔었거든.”
“아…….”
“어차피 내가 당장 검제를 도울 방법이 없으니 무력이라도 빨리 키워야지. 만약의 경우, 내 존재 자체가 모든 변수를 누를 수 있도록.”
어이없을 정도로 거만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에스티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타이니의 기억에서 보았던 전생의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으니까.
- 아무리 악당들이라도 그렇게 살육을 저지르고 다니시면 나라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타이니 경.
- 나라? 흥. 누가 감히 나를 건드려? 내가 작정하고 쳐들어가서 왕이나 황제 머리를 깨 버리면 누가 막을 건데?
- 그래도 신전의 율법상…….
- 왜? 교황 대머리 먼저 깨 줘?
사제는 그 무례한 말에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었다.
오직 개인의 무력만으로 세상을 움직이던 자. 그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던 자.
그리고 민중들에게는,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집행하는 ‘천벌의 기사’라고도 불리던 자.
그 민중이 안겨 준 영예를 깎아내리기 위해 권력자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이름이 바로…….
‘괴력의 기사였지.’
하지만 타이니는 그녀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한때 하늘을 대신한다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명예롭지 못한 이름으로 명예롭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 누구보다 명예로웠던 자.
‘아무것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 기사.’
그 자신은 알지 모르겠지만, 사실 민중의 지지야말로 국가가 그를 해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에스티나가 타이니의 기억 속에서 본 자신의 태도를 회상하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때.
타이니는 딱 그때 사제의 눈동자에 비쳤던 것과 같은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과거의 무력을 회복한다면 그 누구도 간섭 못 해. 절대.”
그 말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고, 에스티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