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다시 엘븐하임
“대수림…….”
황도 아세리안을 떠난 지 고작 10일.
성장한 월랑의 말도 안 되는 속력 덕에 그들은 벌써 대수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오히려 관도가 더 빨랐네, 거참.”
걸리적거리는 산적 강도들과는 달리 오크 전사들은 타이니를 보자마자 경의를 표하며 길을 터 주었다.
통행 관례조차 무시하게 만드는 명성의 힘.
‘제국에도 이 정도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신전 걱정 같은 건 하지도 않을 텐데.’
타이니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문득 미동도 하지 않는 루나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음…….”
“무리한 거야?”
그림자 이동은 분명 대단한 기술이고 효용성에 비해 마나 소모가 월등히 적었지만, 그렇다고 마나 소모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작급 마수, 벤투스를 처리할 때도 그녀는 일주일 넘게 잠복하며 완벽한 기회를 노리느라 거의 탈진할 뻔했었다고 들었다.
거기다 아직은 미숙한 상태인 만큼, 지금 일정만으로도 조금 무리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아니야, 괜찮아. 가자.”
대답하는 표정을 보니 그런 것은 또 아닌 듯했다.
‘그럼 역시…….’
타이니의 시선이 여태 굳이 신경 쓰지 않았던 그녀의 작고 뾰족한 귀에 잠시 머물렀다.
엘프의 특징이 일부나마 확연히 남아 있는 외모.
먼 조상의 혈통이 우연히 발현된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마 그녀는 하프 엘프일 것이다.
‘즉, 부모 중 한 사람은 엘프…….’
하프 엘프는 엘븐하임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엘프들은 혼혈이 순수성을 더럽힌다고 생각한다던가.
혹시나 누군가 피가 섞인 걸 숨기고 태어난다면, 적발되는 즉시 추방한다고 들었다.
- 알아. 솔직히 어리석은 짓이고, 비인도적 처사지.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젊은 엘프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바꾸지 못했어. 종족의 오랜 관례를 타파할 수가 없었지.
- 아니…… 다 핑계일지도 모르지. 죽자고 노력한 것은 아니니까. 혹시 그래서 지금 우리가 벌을 받는 걸까…….
전생의 기억 속, 씁쓸한 얼굴의 에스티나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엘프들은 욕망에 넘치는 인간 남자가 순수한 엘프 여성을 범하여 태어난 것이 하프 엘프라고 생각한다던가.
성욕이 거의 없어 자식을 낳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성관계를 하지 않는 엘프족의 특성상 아예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엘프 남성과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나 엘프 여성이 진심으로 인간 남성을 사랑하는 경우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설령 좋지 않은 일로 애가 생겼다고 한들.
‘그 애한테 무슨 죄가 있어.’
부모도 없이 뒷골목에서 거지 패로 자란 타이니로선 엘프들의 잣대가 참으로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루나도 그런 경우라면.
“누나, 혹시…….”
“음?”
“아니, 아니야.”
타이니의 행동만 보면 그에게 눈치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지만, 그것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빚어낸 부작용(?) 같은 것일 뿐.
남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태생이 거지 패인 그에게 눈치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니 루나에게 상처일지도 모르는 일을 함부로 언급하긴 싫었다.
“엘븐하임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뭐,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우우웅.
파바바박.
타이니는 그 말과 함께 다시금 마나를 운용해 이곳에 오는 여정에서 뒤집어쓴 먼지와 찌든 때를 털어 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경지와 상관없이 마나를 극한까지 세밀하게 운용할 수 있어야 가능한 수법.
그리고 그 정도 감각과 재능은 루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타이니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어필인 셈.
하지만 루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비, 필요해. 나도, 알아.”
마나 샤워로 먼지와 찌든 때를 대충 털어 낸다 한들, 임시방편일 뿐이다.
초월무구나 아티팩트가 아닌 장비를 정비하려면 먼지를 털어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신체와 정신 역시 실제로 물로 씻어 내는 것이 마나 샤워보다 훨씬 상쾌하다.
그리고 노숙이 아니라 편안한 잠자리에서 쉬는 것도, 앞으로의 거친 여정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필요할 것이다.
“엘븐하임도, 정당한 방문자를, 쫓아내진 않는다고, 들었어. 괜찮아.”
그 말에 타이니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렇다는 건…….’
생각했던 대로, 루나 역시 그렇게 추방된 하프 엘프라는 뜻일 터.
어느새 착잡해진 타이니의 표정을 본 루나는 오히려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난 아빠가, 있었으니까. 곧, 돌아가시긴, 했지만.”
“…….”
그럼 루나의 어머니는 아직 엘븐하임에 있다는 뜻인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죽었다?
‘그게 더 불쌍하잖아!!’
타이니는 속으로 탄식을 터트리면서도 겉으로는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마땅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인간 세상에 혼자 남게 된 루나가 어려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혼혈을 차별하는 것은 비단 엘프들만의 일은 아니니까.
아니.
‘인간이 더하지.’
인류 중에서도 다른 종족과 만나 후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족뿐이다.
신이 어째서 인류를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태어난 혼혈들은 대부분 부모의 장점을 모두 이어받았다.
하프 엘프만 해도 인간처럼 빠른 성장 속도와 더불어 정령술사와 소서러의 재능도 함께 타고나는 이가 대다수.
단점이라면 수명이 보통 엘프의 절반 정도라는 거지만, 그것만 해도 다른 장생족인 드워프에 준할 정도이니,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상위 종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인간은 대체로 그런 ‘재능 있는’ 혼혈들을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겪다가, 어쩌다가 황궁까지 갔을까.’
묻고 싶은 말은 참 많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생했어, 루나.”
타이니는 애써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윽!? ……루나, 아니고 누…….”
루나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 반사적으로 습관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 반응이 대화 중 처음으로 타이니를 진심으로 웃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보다 한참 작아진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누나.”
“……뭐래.”
흥 하고 콧김을 뿜어내며 자신을 밀어 내는 루나의 붉어진 얼굴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전생에 어색했던 동료, 그리고 현생에는 먼 핏줄.
자신이 바꿔 버린 미래가, 틀어졌던 운명을 이렇게 돌려 놨다는 사실이 체감되어 새삼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확실히 해 둬야 할 것은 있었다.
“혹시, 누나 엄마가 엘븐하임에 있다면…….”
한번 찾아보는 게 어떻냐고 물으려던 것이었는데, 루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억 못 해. 이름도, 추억도, 없어. 나 아기 때, 아빠한테, 들어서 알 뿐.”
아마도 있더라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일 터였다.
솔직히 타이니 역시 자신을 버린 부모를 다시 만나고 싶진 않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전혀.”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를 보지 않았더라도, 단호한 루나의 대답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고아니까.’
거지 패 생활을 하며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부모가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을 버린 것이라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데리러 와서, 이 지옥에서 꺼내 주지 않을까?
-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을 했었더랬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고통과 허전함을 달래 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편에 혹시나 하는 기대와 궁금증이 늘 남아 있었다.
자신은 부모가 이미 죽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살아 있다면, 심지어 어디 있는지도 안다면, 왜 자신을 버렸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서른이 넘었던 전생의 자신조차 그랬었다.
‘그러니 고작 19살인 루나라면…….’
그 복잡한 표정을 보았는지, 루나가 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다시 한번 강조하듯 말했다.
“아무튼, 절대, 아니야.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알았어.”
그렇게 대답했지만.
‘여건이 된다면 알아봐야겠다. 나 혼자라도.’
타이니는 홀로 그렇게 다짐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자신의 고통과 허전함을 달래 주었던 사람, 이제는 하늘에 있을 그 사람에게 속으로 물었다.
‘에리나 누나……. 그게 맞는 거겠지? 그렇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하늘 위에서 그를 향해 미소 짓는 것 같았다.
* * *
타이니와 루나가 대수림의 관도를 따라 질주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은 없었다.
간혹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야 괴성을 지르기도 전에 두 사람에게 죽어 넘어졌고.
“어르신 늑대……? 아, 그분이시군요! 엘븐하임을 도와주셨다던. 따라오시죠.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종종 마주치는 엘프 레인저들은 타이니를 보곤 미소를 지으며, 필요치 않은 길 안내를 해 주려 나서기도 했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찾아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하던 일 보시죠.”
그 호의를 뿌리치느라 오히려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을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대수림의 입구에서 엘븐하임의 녹색 담장 앞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하루에 불과했다.
물론 그 과정에 잡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엘븐하임에 간다는 사실이 무언가 심리적 영향을 주기라도 했는지, 여태 그림자에 묻혀 잘 따라오던 루나가 갑작스레 월랑의 등 뒤에 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나도, 월 등에, 타 볼래. 시원해, 보여.”
“절대 안 돼.”
당연히 타이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타인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그 제나스’마저 자신의 등 뒤에서 토악질을 하게 만든 월랑의 질주다.
그 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확고한 심정을 담은 거절이었지만, 드물게 고집을 피우는 루나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고집의 결과는 당연하게도.
- 우웨에엑.
대수림의 거목들에 루나가 영양분을 살짝 보충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기억에서, 지워. 절대.”
핼쑥해진 루나가 그 자수정 같은 눈을 빛내며 살기를 줄줄 흘리기는 했지만.
“아, 하하하. 방금 무슨 일 있었어?”
타이니는 눈치 빠르게 호응해 줌으로써 분란의 여지를 없앴다.
그러자 루나 역시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 에스티나, 엘븐하임에, 있을까?”
“음?”
“엘프들과, 오크들이, 크게 움직였다면, 지휘할 사람, 필요해. 그럼, 그녀가, 가장 적당해.”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역력히 보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크들의 대전사는 일종의 명예직으로, 각 부족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수호자는 엘프들의 병권을 쥔 실질적인 대장군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왜?”
“그녀에게는 카일룸이라는 거대한 독수리 정령이 있지. 대륙의 끝에서 끝으로 가는 데에도 이삼 일이면 충분한.”
“아…… 그래도 통신이…….”
“엘프들에겐 특이한 능력을 지닌 정령도 많아. 비상시에도 사용하는 게 겁날 정도로 비싼 일회용 통신구보다 오히려 효율이 더 높을 거야.”
“……그렇군.”
그리고 타이니의 장담대로, 그들이 엘븐하임의 덩굴 담장에 도착하는 즉시 에스티나가 마중을 나왔다.
“우와아!”
“진짜 엘프……!”
“저게 그 엘븐 메탈…….”
“좀 야하지…… 않아?”
엘븐하임에 있으면서도 왜인지 전투 갑옷을 입은 에스티나의 모습에, 담장 밖에 있던 상인과 용병들의 시선이 집중되며 한바탕 소란이 일던 그때.
“오, 내 친구 타이니! 잘 왔어! 어!? 그런데 옆에 누…… 그 얼굴 설마……?”
에스티나가 놀란 눈으로 타이니와 루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
그때 에스티나의 전신에 튄 미미한 핏자국들을 본 타이니가 일순간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루나가 먼저 반응했다.
“그래, 나, 하프, 그래서 뭐?”
어느새 단검을 빼 든 채 살기까지 흘리는 루나.
그 모습을 본 타이니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런 거 아냐. 에스티나는 내 기억도 아니까.”
“음?”
루나가 어리둥절해하는데 에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정말 사신이군……. 그런데 왜 같이 있지? 내가 ‘알기론’ 너와 사신은 그리 친분이 없었을 텐데……?”
“맞아. ‘그때’는 그랬어. 하지만 좀 달라졌지. 알고 보니 같은 집안 사람이더라고.”
“……같은 집안?”
에스티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그제야 그 시선에 담긴 호의를 깨달은 루나가 살기를 지우고 가슴을 쭉 폈다.
“맞다. 타이니, 내 동생. 내가 누나다.”
그 급격한 태도 변화에 에스티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뭔지…….”
“좀 있다 설명해 줄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 보는 눈이 많은데.”
“그래. 안 그래도 전할 소식이 많았으니까. 잠시만 내 방에서 기다려 주겠어? 안면 있지? 여기 루드엘이 안내해 줄 거야. 난 좀 씻어야 해서…….”
에스티나가 갑옷과 전신에 튄 핏자국을 보여 주며 쓴웃음을 짓자.
“그러지. 오랜만입니다, 루드엘 님.”
타이니는 미소를 지으며 뒤쪽에 서 있던 은빛 머리 엘프와 인사를 나눴다.
“그럼 이따 봐.”
그렇게 에스티나가 먼저 사라진 뒤.
“따라오십시오, 타이니 님과 동료분.”
그들은 루드엘의 안내에 따라 담장 밖의 상인들과 용병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엘븐하임으로 들어섰다.
루드엘이 먼저 담장 안으로 빠르게 사라지자, 루나가 타이니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내 방? 씻고 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지만,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것 같았다.
분명 ‘동생 장가보내기 병’이 도진 것이리라.
자꾸 왜 이러는 걸까?
“……그런 거 아니야.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루나.”
타이니는 부러 단호하게 말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수호자라니, 능력자, 내 동생.”
“아니야!!”
“반려, 엘프도, 좋아. 하프 엘프 조카. 나, 잘 키울 수, 있어.”
“그런 거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질러 봐도 주먹을 불끈 쥐며 미소 짓는 루나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