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다시, 아세리안
인간과 엘프의 정령술 교류.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수천 년간 쌓여 온 엘프 정령술의 실용 기법을 고작 인간 정령술사 한 명의 경험담과 교환하는 것.
실제로 라프탄이 타이니보다 큰 이득을 보는 것은 당연했다.
“과연, 그렇군요. 정말, 허…….”
멍한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한번 피 박살이 났던 원한마저 깨끗이 녹아 버린 듯 감탄만이 가득했다.
타이니는 그런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너는 어떤 놈이 될까?’
아직 망가지지 않은 것 같은 전생의 쓰레기가 과연 변할 수 있을지, 그에게도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각오는 있었다.
‘절대 전생처럼 일 저지르지 마라. 그럼 내가 직접 다시 사지를 분리해 줄 테니.’
회귀자가 세상에 던지는 질문처럼, 실험하는 마음으로 살려 둔 것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도움이 되네.’
사실 그로선 정령술의 실용 기술보다 경지 높은 정령술사의 체험담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 정령도 인간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라미가 저한테 깊이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 비로소 영혼의 교류가 더욱 진해지며 격이 올랐으니까요.
라프탄의 그 말은 태생부터 야수를 비롯한 자연과 교감하는 종족인 엘프에겐 결코 들을 수 없는 것이었고, 하물며 인간에겐 정령술의 핵심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라프탄이 5단계로 승격하는 과정에 대해 세세하게 전해 준 체험담은 앞으로 그가 가야 할 길을 미리 보여 준 것이기도 했다.
에스티나의 두리뭉실한 조언들이 희끄무레한 안개가 덮인 광활한 수림이었다면, 라프탄의 경험담은 그 숲속에 있는 수많은 길 중 하나로 그를 인도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결코 넓지도 않고 이정표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안개에 휩싸이지 않아 가까운 목표가 명확하게 보이는 듯했다.
바로 5단계로 가는 길.
그 체험을 따라 수련해 간다면 머지않아 반드시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명쾌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쉽네, 쩝.”
그렇게 입맛을 다시자, 야밤의 경계 근무를 설 겸 소환돼 있던 월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콧잔등으로 그의 얼굴을 툭 밀었다.
“크르릉.”
“아, 당연히 네 잘못은 아니지.”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월랑을 달랬다.
정령술사는 5단계부터 다시금 변환점을 맞이한다.
계약자의 수준에 따라 정령의 능력이 기본적으로 증폭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5단계부터는 계약자가 정령의 특수 능력을 하나씩 쓸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지금 라프탄이 그의 사자 정령 라미의 첫 번째 특수 능력, 의태를 사용할 수 있는 게 그 일례였다.
하지만 월랑의 첫 번째 특수 능력 소울 사이트는 어차피 월랑과 함께하는 이상 굳이 타이니가 직접 사용할 필요 없는 능력이었다.
“크르르.”
“아냐? 다를 거라고? 그래, 뭐…….”
“컹!”
“알았어! 알았다고! 믿어! 믿는다고!”
“크릉!”
“아! 물지 마. 인마!”
“가릉.”
덥썩.
- 으엑. 내 머리 삼키지 마!! 더 기분 나빠!!
월랑과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라프탄에게서 얻은 소득을 되새기고 있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흠, 이성을 얻은 야수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정령술이라……. 재미있네요.”
라프탄을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잠을 자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나스였다.
“그럼 타이니 군과 월랑 같은 경우에는 야수가 야수보다 더한 인간을 이해하는 거니까, 저 사기꾼 녀석보다는 쉽겠네요? 아니, 오히려 더 어려우려나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매돕니까!”
“매도라고 생각해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되묻는 제나스의 모습에 절로 이가 갈렸지만, 여기서 더 대꾸하면 말리는 거다.
‘누가 검제 제자 아니랄까 봐 은근히 능글맞네. 내가 참아야지.’
후우우우.
속으로 분을 삭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쉬울 거야. 비슷……하니까.”
또 언제 깬 건지, 그의 등 뒤에 기대 자고 있던 루나가 툭 하고 한마디를 보탰다.
“뭐!?”
우드득.
울컥한 마음에 목뼈에서 섬뜩한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홱 돌렸는데, 잠이 덜 깬 눈으로 자신을 보며 살짝 웃는 루나의 얼굴을 보니 화를 내기도 어려웠다.
“뭐가, 끙. 비슷한데?”
“양심, 속이지 마.”
끄으응.
‘내 편이라며! 누나라며!’
서운한 생각이 들어 째려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거짓말, 나빠.”
……암살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자 루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치 어린애한테 무슨 교육을 하는 것처럼.
‘에이 설마…….’
후, 둘이 작정을 하고 놀리는 거다. 말리면 지는 거다.
그래, 놀리는……
‘……거겠지?’
그렇게 타이니의 마음에 찜찜함을 남긴 아침이 지나가고, 일행은 다시금 빠르게 길을 떠났다.
다행히 그 뒤로 특별히 난처한 일을 겪지는 않았다.
가능한 한 빠르게 들판을 질주하며 노숙을 감행했고, 간혹 사냥할 동물이 보이지 않아 식량이 부족할 때만 어쩔 수 없이 근방의 마을이나 도시에 들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령은 역소환한 채 견습 기사 토렌의 신분을 이용했다.
그렇게 국경에서부터 달려오기를 고작 일주일.
일행은 보통 사람이 들었다면 절대 믿지 못할 속도로 아세리안에 도착했다.
황궁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타이니가 황도를 떠난 뒤로 불과 4달 정도가 흐른 시점.
‘전생에는 이때쯤 제국이 난장판이었는데. 필레스에도 다시 유민이 넘쳤고…….’
타이니가 복잡한 상념과 함께 올려다본 거대한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기만 했다.
“멀쩡하죠? 이게 타이니 군이 잘하고 있다는 증겁니다.”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제나스가 어깨를 툭 치면서 앞서 나갔다.
그에 타이니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 뒤를 따라 나아가는데.
이제는 라프탄의 그림자가 아닌 타이니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루나가 멍하니 손을 내밀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꽃을 받아 냈다.
“……눈?”
새해를 며칠 앞둔 아세리안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 * *
“춥다, 추워.”
“진짜. 올해는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지.”
“내년은 잘 풀려야 할 텐데.”
아세리안의 서쪽 성문을 향해 들어서는 상인들은 저마다 두툼한 옷을 여미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악마추종자들 말이야. 정말 또 일을 벌일까?”
“이 정도면 또 그러겠지. 아, 진짜 별일 없어야 하는데.”
“그 광휘의 기사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신분을 숨기고 아세리안에 들어서던 타이니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불만도 있었다. 그가 지금 제나스의 말고삐를 잡고 따르는 종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
심지어 검은 머리까지 애써 후드로 가려 가며 말이다.
“근데 굳이 여기서까지 신분을 숨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하죠, ‘토렌’ 군. 괜히 정체를 밝혔다간 각하를 만나기까지 한 사흘쯤 걸릴 수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광휘의 기사 소식은 아직도 뜨거운 화제거든요. 일단은 저택에 들어가 각하를 뵙고 나서 입성을 공표하는 게 낫죠.”
킁.
그 말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그냥 물러서기는 싫었다.
“……공작은 대체 왜 아직도 아세리안에 있는 겁니까?”
“‘각하’! 호칭에 유의하세요, 토렌 군.”
“예, 각하요. 그 양반은 왜 아직도 여기 있냐고요. 발렌티노로 안 돌아가고.”
호칭만 바꿨을 뿐 여전히 불손한 태도에 제나스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새로운 황제 폐하의 승계가 완전하지 않으니까요. 그 난리도 있었고……. 각하께서 폐하의 장인으로서 돕고 있다. 뭐, 그런 명목이죠.”
“명목?”
실제로는 아니라는 뜻인가?
그런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제나스를 바라보자 은발의 기사는 쓴웃음으로 그것을 긍정했다.
“……아무래도 ‘그 일’을 막으려면 범국가적, 종족적 연합이 필요할 텐데, 제국의 기조는 배타적이니까요. 각하께서 폐하께 조언을 하시는 게 맞는 겁니다.”
제나스의 어조에서 왠지 모를 불만이 느껴졌지만, 타이니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검제가 그렇다면 그런 걸 테니까.
다만 그럼에도.
‘검제가 황제 옆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그 생각에 조금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검제가 제국 내에서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황제도 설득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무심코 나온 푸념이었지만, 제나스의 답변은 칼같이 단호했다.
“그 비밀을 알기라도 했다간 그걸 제국의 확대와 성장에 사용하는 것이 황족이다, 라고 각하께서 그러시더군요. 신전에 알린다는 명목으로 토렌 군을 협박해서 이용할 수도 있다고.”
뭐?
타이니도 검제와의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서로 목숨을 구해 주며 신뢰를 쌓은 전생의 동료 중 갓 핸드를 제외한 아홉하고만 미래의 일을 공유하자는 약속.
그 밖에 비밀을 아는 사람은 검제가 선택하고 타이니 자신이 동의한 눈앞의 제나스가 유일했다.
비밀이 새어 나갔을 때의 파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에는 자신도 동의했으니까.
다만, 의아한 마음에 반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그럴 사람으로 안 보였는데요?”
그에 대한 제나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모든 일에는 제국이 우선. 황족은 그렇게 교육받고 자란답니다. 세뇌는 마법으로만 하는 게 아니죠. 긴 세월에 걸친 교육, 그게 마법보다 더 무서운 세뇌입니다.”
“그게 그렇게까지 되나요?”
“되고도 남습니다. 돈, 여자, 뇌물을 탐하고 온갖 쓰레기 짓을 하는 사제가 발에 챌 만큼 많은데도 여신을 믿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증거지요.”
“…….”
무언가 떠올린 듯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는 제나스의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 자체는 설득력이 있었다.
현시대를 사는 사람 중 신전의 타락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
‘그래서 우리가 그 용사나 성녀라는 것들을 보지도 않고 무시했던 것이기도 하고.’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기적을 일으키는 신성력이 있는 이상 여신의 존재 자체는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전과 사제는 타락했다.
그것이 대륙의 현자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제가 쓸데없는 말까지 꺼냈네요. 아무튼 그리 아시고, 빨리 서두르죠.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제나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여신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직후부터 펴지지 않는 표정은 그에게 무언가 복잡한 사연이 있음을 짐작게 했다.
그리고 그친 대화가 심심했는지, 그 옆에서 시종인 척 걷고 있던 루나가 불쑥 말을 걸었다.
“동생, 이제 곧, 15살?”
“뭐, 고아라서 생일을 모르니 새해부터 나이 먹는 셈 쳤지. 신체 정보를 보면 실제로도 비슷할 것 같긴 하지만.”
“호. 성년까지, 1년, 남았네.”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그러는데?”
찜찜해서 던져 본 질문에 곧바로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성년 되면, 얼른, 장가보내서. 가문 다시, 일으키자. 폐하도, 돕는다고 했다.”
“……뭐?!”
루나가 상상도 해 보지 않은 얘기를 꺼내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고, 자연히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토렌 군?”
“아, 아. 죄송…….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 일, 아직 멀었다. 그때 이겨 내도, 너 나이, 너무 많아. 빨리 장가보내, 후계자, 만들어. 조카, 보고 싶다.”
“허으…….”
황당한 소리에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타이니로서는 아직 자신이 모르스 가문 사람이라는 것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상황.
‘그런데 이게 무슨…….’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꾸만 말문이 막히는데, 어느새 가늘어진 루나의 시선이 슬그머니 아래쪽을 향했다.
“설마, 문제, 있어?”
“아냐!!!”
“그럼, 왜, 싫어? 동생, 설마, 남자를……?”
“절대 아냐!!”
황당한 시선 처리와 그보다 더 황당한 의문 제기가 이어지자 순간적으로 열이 뻗쳐올랐다.
“시, 싫은 게 아니라! 그, 그, 어렸을 때 환경 때문에 여자는 조심스럽……. 아우!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는데!?”
“토렌 군!?”
생각지도 못하게 허점을 찔려 허둥대는 타이니를 제나스가 진정시키면서 그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황당하기만 했던 루나의 말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타이니는 조용히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일단 검제의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방향을 정해야지.’
벌써 카룬이, 제국이, 오크족의 미래가 바뀌었다.
이 정도로 방향을 틀어 놨으니 이제 모든 미래가 바뀔 것이다.
하지만 검제라면.
‘앞으로 벌어질 재앙에 대비하는 다른 방법을 마련해 놨겠지.’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기도 했고.
‘영감이 내 소울웨폰을 보면 뭐라고 할까?’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다듬어 가며 발렌티아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상상조차 못 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훌륭하다, 타이니. 그만하면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줬다. 그래, 너무 잘해 줬지.”
검제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두드릴 때부터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이렇게 순순히 칭찬만 할 인간이 아닌데?’
이미 그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잃은 타이니가 눈을 가늘게 뜨자, 검제가 갑자기 피식 웃으며 그 기대(?)에 부응했다.
“너무 잘해 주는 바람에 폐하께서 자네를 1황녀 전하와 혼약으로 묶고 싶으시다더구나. 13살 연상, 어떠냐? 응? 크크크큭.”
“뭵!?”
생각지도 못한 헛소리에 타이니는 저도 모르게 기괴한 비명을 터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