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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65화 (165/500)

165화. 미래의 악인, 현재의……?

“사람을 휘둘러서 피떡을 만들다니, 그런 잔인한 수법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대체!?”

제나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귀를 때리고.

“공포심, 제압, 효과적.”

“루나 양!”

자신의 편을 들던 루나가 매서운 호통에 뚱한 표정을 지으며 등 뒤로 숨자, 타이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의식을 잃은 라프탄을 가리켰다.

“일반 병력은 기절만 시켰잖습니까. 이놈 말고는요.”

“애초에 말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요! 말로!!”

“에이, 귀족들 절차 복잡한 거 아시면서…….”

“아니,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돌파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각하께서 포트란 자작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시게 생겼잖…….”

“흠, 그래도 애초에 날 사칭한 새끼가 사고 치기 전에 막아 준 거 아닙니까. 체면을 지켜 준 거죠.”

“사고를 막아? 체면을 지켜요? 도리어 체면을 산산이 부순 거겠죠! 아니 좀 뒷일 좀 생각하고 움직이란 말입니다. 저한테 얘기라도 했어야…….”

제나스의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려던 그때.

“끄으으응.”

반쯤 시체가 된 라프탄의 입에서 새어 나온 신음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던 타이니를 구원해 주었다.

“하. 이 자식, 역시 생명력 하나는 질겨.”

“……타이니 군, 혹시 이자를 알고 있습니까?”

“뭐, 안다면 잘 알죠. 안 좋은 쪽으로.”

타이니는 라프탄이 전생에 저지른 짓거리들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황실의 변란으로 인한 내전과 그 빈틈을 노린 오크족의 침략 탓에 완전히 엉망이 된 제국 서부를 더욱 지옥으로 만든 약탈자들의 두목.

그리고 정령술사들에 대한 인식을 땅바닥으로 처박은 정령술사.

그 얘기를 들은 루나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역시, 죽여야…….”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은 단검이 그대로 라프탄의 미간에 꽂히기 직전, 그야말로 바람처럼 움직인 제나스가 그 앞을 막아서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그 모르스의 핏줄들은 죄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입니까!? 대체 무슨 암살자 가문이 그래요!?”

“그래서, 망했는데…….”

컥.

“……죄송합니다.”

루나와 제나스가 그렇게 만담을 주고받는 동안, 타이니는 라프탄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씨익 웃었다.

“정신 차렸네?”

“커흑!?”

물론 그 미소를 보는 피해자의 몸은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지금 해명 못 하면 그대로 묻어 버린다.”

담담하게 보탠 한마디에 라프탄은 눈을 부릅뜨며 흐려지려던 정신을 붙잡기 시작했다.

이내 그 눈빛이 또렷해진 것을 확인한 타이니는 툭 던지듯이 말했다.

“지금 네가 여기서 내 행세를 한 이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 봐. 솔직하게.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그게 바로 너의 유언이 될 거야.”

놈의 몸 상태는 완전히 엉망이었고, 충격을 받은 탓에 머리를 멀쩡히 굴리기도 힘들 것이다.

라프탄의 푸른 눈이 다시 폭풍을 만난 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며 타이니는 씩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묻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애초에 제나스가 다급히 말리지 않았더라도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놈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전생에 자신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뒷골목에서 보고 자란 울프 패거리 같은 쓰레기들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거쳐 온 아수라장은 인간 불신이 생기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반쯤 죽여 놓다가도 혹시나 해서 한 번쯤 봐주었던 범죄자들은 하나같이 재범을 저지르거나 복수를 하겠다며 제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그런 신념으로 자라났다.

그랬기에 누구든 악인이라 생각되면 주저 없이 패 죽여 왔다.

하지만.

‘회귀한 뒤에는 좀 달랐단 말이지.’

검제도 사신도, 성격이 전생과 달랐다.

심지어 황도 부근에서 만났던 기사, ‘육포’에게선 타락했던 전생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20년 전의 세상에서는, 후에 알게 될 사람들의 성격이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물론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전생에 보아 온 수많은 사례가 만든 신념이, 현생에서 고작 몇 명의 변화를 목격했다고 꺾일 리 없었다.

다만 다른 가능성에는 생각이 미쳤다.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고칠 필요가 없는, 망가지기 전이라면?’

망가지기 전의 인간이라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이놈도 행동이 내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른 거 같으니.’

애초에 이 라프탄이라는 놈은 전생에 만났을 때 6단계의 정령술사였다.

지금은 한 단계 아래로 보였지만, 그렇다 한들 놈이 당황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제압당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놈의 특기는 적을 속이거나 교란하고 튀는 데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전생에서 이놈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 같으면 서슴없이 인질을 잡고 상대를 협박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인질 한둘, 혹은 십수 명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쓰레기.

그런데.

“분명히 그냥 도망만 쳤단 말이지…….”

“그, 그게. 예?”

“아니, 아니야. 하려던 말 계속해 봐.”

“예, 예. 저는 아버지를 따라 대수림의 외곽과 구릉 지대를 오가며 자랐습니다.”

“……뭐?”

“예? 아, 처음부터 다 마, 말하라고 하셨…….”

그렇다고 인생을 통으로 풀려고 하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말을 끊었는데,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는 놈에게서는 얼핏 순박한 인상이 엿보이기도 했다.

‘뭐, 이것도 괜찮겠지.’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거짓은 들통나게 되어 있는바.

타이니는 겁에 질린 미래의 쓰레기에게 차분하게 손짓했다.

그대로 이어서 말하라는 뜻.

“예, 예. 원래 제국 출신이라고 듣긴 했는데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어린 시절에…….”

‘과연 이놈은 이미 망가졌을까, 아직 망가지기 전일까?’

사기를 치는 꼴을 보니 전자에 가까울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타이니는 라프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애초에 정령의 선택을 받을 정도면 본성이 더럽지는 않을 테니까.’

어찌 보면 지극히 독선적인 생각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생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

그것이 신을 무시하는 지극히 오만하고 무서운 태도라 말하는 이도 많았지만, 애초에 타이니가 그런 비판을 신경 썼다면 악인 분쇄기 같은 섬뜩한 별명이 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섬뜩한 별명과 숱한 비판 속에서 쌓아 올린 그의 인생은, 후에 대륙 10대 기사라는 빛나는 이름으로 그 가치를 증명했다.

또한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현생의 타이니는 자신의 판단을 더욱더 신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저, 정말로 한탕만 하고 동부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거기서 새 삶을 살려고 했어요! 정말,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긴 이야기를 마친 라프탄이 납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자, 타이니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마적단 같은 거 만들 생각은 안 해 봤어? 막 아무거나 부수고, 약탈하고, 강도질을 하는 거 말이야. 세상이 싫었다며?”

“예?! 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그렇게까지 막장 인생은 아닙니다!!”

한순간 공포심을 잊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

어느새 눈초리가 가늘어진 타이니가 살기를 뿜어내는데.

“맹세코, 맹세코 아닙니다! 흐, 흐으……. 솔직히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 하, 하지만! 타, 타이니 님의 흉내를 내면서 느낀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명예로운 삶에 대한 동경도 있습니다만…….”

살기에 질린 라프탄은 다급히 두서없는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제 분노를 엉뚱한 곳에 풀려고 한 것이 얼마나 추한 일이었는지 깨달았단 뜻입니다. 명예롭게 살진 못해도,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진심입니다!”

그 말에서는 확실한 진심이 느껴졌고, 눈앞에서 애처로운 표정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청년은 분명 그가 알던 사악한 라프탄과는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때.

- 크허허헝!

거대한 사자의 영혼이 마치 계약자를 보호하려는 듯, 그의 모습 위로 겹쳐져 나타났다.

역소환된 상태에서는 물리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놈을 지키려는 것 같았다.

‘그런가…….’

그 정령의 모습 또한 타이니의 판단을 기울게 했다.

완전히 타락한 계약자를 따라 오직 살기만을 내뿜던 그때의 사자 정령과는 전혀 달라 보였으니까.

“후…….”

확실히 이십 년의 세월은 길고도 길구나.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악당을 보는 타이니의 눈빛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돈 많은 귀족들한테 사기를 친 것 정도야 죽을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냥 둘 수도 없으니.

쿵.

그가 강하게 발을 딛자 바닥의 대리석이 쩌저적 갈라지면서 노을빛 마나가 섞인 무서운 기세가 라프탄을 덮쳤다.

“흐익!”

기겁하는 라프탄의 바로 앞에서 타이니의 검은 눈이 섬뜩한 기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하나만 명심해. 네놈이 앞으로 정령술사의 이름에 똥칠을 하고 다닌다거나 범죄를 저지른다는 소문이 들리면, 네놈이 동대륙 끝에 있어도 내가 찾아가서 찢어 죽일 거다. 알아듣겠지?”

겨우 슈페리어급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독한 살기.

“무, 물론입니다!”

괴력의 기사의 영혼이 뿜어낸 기세가 궁지에 몰린 라프탄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때, 엉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할 이야기 끝났으면, 이번엔 제가 뭘 좀 물어보고 싶은데요. 타이니 군.”

“……제나스 경?”

남의 땅에서는 살생을 자제하라면서 그를 말렸던 북풍의 기사가, 이제는 그 갈색 눈을 빛내며 라프탄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프탄이라고 했나요, 정령술사?”

“예, 옙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흑마법 계약서를 들이밀었다는 대귀족, 정말 로히터가 맞습니까?”

정작 놈의 사정을 캐물었던 타이니는 별 감흥 없이 흘려 버렸던 귀족의 성.

그것을 언급하는 제나스의 눈은 무척이나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말에 당신의 목숨을 걸 수 있나요?”

“예?! 아, 아니, 무슨…….”

“그 말이 거짓이면, 당신 하나의 목숨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 로히터, 그 장미 문양을 달고 다니는 변태 새끼들이 맞나요?”

제나스답지 않은 과격한 어조로 몰아치는 질문에 라프탄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분명히……!”

“오호라……. 이거 재밌군요. 하. 하하, 참.”

“……그게 중요한 겁니까?”

“아. 하하, 예. 중요한 거지요. 타이니 군도 기억할 텐데요? 아가씨 약혼식에서 깽판을 칠 뻔했던 개자식을.”

“아……!”

“로히터는 각하의 악연이기도 하지요.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발밑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랄까요. 신경에 거슬리는 놈들이죠.”

그리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는 제나스의 얼굴만 보면, 검제가 아니라 그가 더 놈들이 거슬렸던 것 같았다.

“뭐, 요새는 팍 수그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뒷주머니를 차고 있었네요. 그것도 독주머니로. 하하, 각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소식입니다.”

검제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라는 말에 타이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오호라, 그럼 그 영감이 지랄 좀 덜 하겠는데?’

타이니의 머릿속에서는, 제국의 공작가이자 권세가인 로히터 가문의 가치도 고작해야 그 정도일 뿐이었다.

물론 그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 정령술사, 가문으로 데려가야겠습니다. 괜찮겠죠, 타이니 군?”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내 의사는…….”

둘 사이에서 라프탄이 뭐라고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그거야 알 바 아니고.

“하지만 대담하게 귀족가에서 사기를 치려 했던 놈입니다. 주의하긴 하셔야 할 겁니다.”

제나스는 놈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서른이 안 되어 보이는데 적어도 5단계의 정령술사? 흠, 인성 교육만 똑바로 하면 가문에 꽤 도움이 되겠지요. 저한테 맡겨 두십시오.”

선이 고운 미남이 씩 미소를 짓는데 왜 이렇게 섬뜩한 느낌이 들까.

라프탄이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는 팔을 어루만지던 그때.

“여기 핀넬 자작가에 대한 손해 배상은 우리가 할 테니, 당신은 이제 발렌티아에 묶인 몸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발렌티아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면…….”

팅.

스가각.

제나스의 가벼운 손짓과 함께 라프탄이 걸치고 있던 옷가지가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흐어업!”

붉은 그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전신에 벌건 줄이 죽죽 그어진 라프탄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는데,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때는 이렇게 피부를 긁는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아시겠죠, 정령술사님?”

분명 정중하지만 그 어떤 협박보다 살벌한 경고에, 라프탄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피식.

“……작아.”

한옆에 가만히 있던 루나가 던진 한마디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짓밟힌 라프탄은, 비참한 표정으로 몸을 바짝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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