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라프탄
“타이니 님, 한잔하시죠. 이게 바로 그 뤼벡 와인, 그것도 21년산입니다.”
‘……그래 봤자 포도주일 텐데.’
왜 그리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라프탄은 웃으며 잔을 받았다.
그에게도 눈치는 있었으니까.
“하하, 이렇게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투명한 술잔에 비치는 자신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담담하게 웃어 보이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정령술사로서 5단계에 올라 자신의 몸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라미’의 의태(擬態) 능력을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거기서 도망치는 데만 해도 큰 도움이 되긴 했지.’
그의 정령 라미는 사자 주제에 겁쟁이라, 영물로서 처음 각성한 능력이 고작 주변 사물이나 동물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는 의태일 정도로 엉뚱한 녀석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능력도 황당하긴 마찬가지.
물론 그렇다고 영혼의 반려인 라미가 싫어질 리야 없지만 솔직히 그것이 조금 아쉬웠는데, 요즘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인생 정말…….’
정령의 능력은 영혼에서 비롯되기에 마법으로도 간파하기 어려운 데다가, 보통 사람들은 정령술사라면 전부 선량하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속이기가 쉬웠다.
더구나 지금 도용한 신분의 주인, 광휘의 기사라는 자의 신체 특징에는 유별난 데가 있어서 아무도 의심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본래 사자인 라미도 늑대로 의태한 상태였으니.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늑대의 정령술사가 어찌 세상에 둘이 있을까.
‘웃기는 일이지.’
라미의 독특한 능력에 세간의 편견이 더해지자 그야말로 너무나도 쉽게 신분을 도용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 편견 때문에 이용당하고 누명까지 썼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그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뭐, 그런 능력이 아니라면, 오크족의 영토나 대수림에서 정령석을 만들 때까지 살아남지도 못했겠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러자 그 무례한 생각을 느꼈는지, 현신한 채로 정원에서 귀부인들과 놀아 주고 있던 라미가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그를 째려보았다.
“크헝!”
“꺄악~!!”
“너, 너무 용맹해 보여요.”
체고만 3m, 몸길이만 10m가 넘는 집채만 한 몸집의 라미가 무서울 법도 한데, 덜덜 떨면서도 신기한 듯 녀석의 주변을 맴도는 귀부인들이 많았다.
그 광경은 이 와중에도 라프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진짜 ‘광휘의 기사’가 가진 늑대 정령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우리 라미만큼 늠름하지는 않겠지.’
그 생각이 귀족을 상대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긴장감을 잠시간 가라앉혀 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여태 그가 겪은 사건들, 수많은 모욕들이 떠올랐다.
- 귀족 새끼들을 믿지 마라. 놈들은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이다. 특히 제국의 귀족들은…….
대수림의 외곽과 구릉 지대를 오가며 사냥을 업으로 살았던 아버지.
그는 아버지가 늘 입에 달고 살던 그 말에 세뇌되어, 평생을 인간 사회와 인연 없이 살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해.’
마나연공법에 특출난 사냥 기술까지 가진 아버지가 왜 말년을 그렇게 보냈을까.
- 영물이다!
- 어쩌면 정령석이 있을지도 몰라. 그 정도의 보물이라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사냥에 나선 아버지가 생각지도 못했던 영물, 거대한 사자를 보고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쯤 그 이유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버지는 영물을 온전히 사냥할 실력이 못 됐고.
아버지와의 전투 때문에 다 죽어 가던 거대 사자, 원수라면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그 짐승의 숨통을 차마 끊지 못하고 마지막을 지켜 준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잘한 일이었다.
거기에 아버지에게 배운 마나연공법에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던 덕에, 어린 나이에도 정령의 계약을 할 만한 기본 마나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 또한 행운이었다.
그렇게 사자의 정령 ‘라미’를 영혼의 반려로 만난 뒤로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마나연공법과 사냥 기술을 연마하면서, 생전의 그처럼 오크족의 영토와 대수림의 외곽을 주유하며 사냥과 휴식만을 반복하며 살았다.
다른 인간을 만나는 건 오직 엘븐하임을 오가는 상인들에게 사냥의 부산물을 팔아 먹거리나 생필품을 구할 때뿐.
그러다가 우연히 한 인간의 무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을 그리 살았을지도 몰랐다.
- 그런 물건들을 고작 생필품 몇 개에 넘기신다고? 솜씨는 뛰어나신데, 좀 어수룩하시구먼.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장기간 거래해 온 상인들이 자신을 등쳐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분노.
그리고 그 사실을 알려 준 이에 대한 고마움.
- 우리와 함께 갑시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도와주겠소.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내린 결정은 그의 인생의 방향을 틀어 버렸다.
그것도 매우 안 좋은 쪽으로.
사기를 당한 자신을 도와주었던 놈들이, 실은 더한 사기꾼들이었던 것이다.
- 오! 정령술사의 일행이라? 식객으로 맞아 주지. 희귀한 인재로군.
그들을 따라 난생처음 접한 화려한 귀족 문화.
그것도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귀족이 알려 준 새로운 세상은 그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달콤함에 취한 것도 잠깐이었다.
- 감히 우리 가문을 농락해!?
자신을 이용해, 정확히는 정령술사에 대한 세간의 편견을 이용해 대귀족을 등쳐 먹은 담대한 놈들.
그로서는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 절대, 절대 제가 아닙니다. 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 그것은 우리 가문이 판단한다.
진심을 담아 사죄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대뿐이었고, 결국 그 대귀족은 더한 족쇄를 내밀었다.
- 네 일행이 끼친 손해, 네 인생으로 갚아라.
놈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저주가 담긴 계약서.
제국의 대귀족이 흑마법이 담긴 계약서를 들이밀었다는 것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정령술사한테 흑마법 계약을 강요한 그 멍청함에 놀라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결국 그는 라미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도망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다 보니, 정령술사로서 능력을 발휘하거나 라미를 현신시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 가문’의 추적은 은밀하면서도 집요했다.
자신에 대한 소문도 나지 않았고 현상 수배가 붙은 것도 아니었는데, 지속적으로 놈들의 수하들이 찾아올 정도.
그것을 피해 일부러 허름한 꼴로 뒷골목에 숨어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부랑자나 깡패들이 흉기를 들이밀었다.
더 이상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
- 더러운 인간들.
인간은 서로를 속이고, 또 속인다.
그리고.
- 피해는 항상 나만 받는다.
그때는 정말, 그놈들과 이 세상에 대한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박살 내 버리고 싶었다.
세상이 조금만 더 혼란스러웠다면, 그리고 그때 한 가지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분명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광휘의 기사가 또 악마추종자들의 음모를 분쇄했다.
자신과 똑같은 정령술사가 세상에 영웅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소문.
- 똑같이 정령술사인데 누구는 영웅이고 누구는…….
그 얘기를 들으니 더욱 화가 났었다.
온 세상이 자신을 모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라미의 의태 능력으로 검은 머리, 검은 눈으로 변신한 채 난장판을 벌이려 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부수고 약탈하려 했다.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판단을 할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오직 세상을 향한 분노만이 가득했으니,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영웅 정령술사가 자신과 똑같은 억울함을 겪길 바란 것이다.
그런데.
- 아이고, 광휘의 기사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작 머리 색과 눈 색깔을 바꾼 뒤 거대 늑대로 변신한 라미를 내세웠을 뿐인데, 가는 곳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돈이 없어도 고급 숙소에서 머물 수 있었으며, 오히려 그를 만나기 위해 귀족들이 돈을 뿌리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그 가문’의 추적자도 더 이상 손을 뻗지 않았다.
그 모든 상황이 그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이것이 명예구나, 이런 삶도 있구나.’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깨달음도 얻었다.
‘모든 인간이 더러운 것은 아니구나.’
그러면서 그의 목적 없는 분노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끔 이 삶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가 도용한 신분의 주인은 더욱 큰일을 터트렸다.
광휘의 기사가 악마추종자들의 음모에서 오크족을 구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숲에서 듣게 된 소식.
그리고 변신이 익숙해질 즈음, 그와 라미의 모습을 보고 바로 접근해 온 퍼스트원의 성주.
사실을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도, 만나자마자 큼지막한 보석을 내미는 성주의 모습에 그는 다시 한번 양심을 접고 말았다.
자신의 경험과 아버지의 말 때문에 쌓여 온 귀족에 대한 유감도 그 결정에 한몫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여기서 최대한 크게 한탕 하고, 왕국 연합으로 튄다.’
아니면 동대륙으로 튀어도 될 것이다.
‘동대륙에서는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여기보다 훨씬 희귀하다고 들었으니까.’
‘그 가문’의 추적자도 이제는 떨어져 나간 지가 한참 되었으니, 적당히 변장만 하면 놈들의 영향력이 큰 제국 동부로 향해도 충분히 피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여차하면 오크족의 영역으로 튀기 위해 제국 서부 국경 지대를 전전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도용한 신분의 주인이 오크족의 영토에서 공을 세웠으니, 어쩌면 다시 제국으로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지만, 눈앞에 놓인 과실이 너무 달콤했다.
‘하루, 아니 이틀만 더 빨아먹고 튄다.’
그렇게 결심하며 제게 다가오는 귀족들을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는데.
- 자, 잠시만!!
- 안 돼!! 머, 멈추시오!!!
파티가 한창인 내성의 홀, 사방에 가득한 음악 소리를 뚫고 다급한 고함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직후.
콰아아아아앙!
대전의 문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꺄아아악!”
“뭐, 뭐야!”
“경비!! 기사들!!”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부서진 문 사이로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청년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 잡아!!
- 침입자다!!
- 타이니 군!? 진짜 생각 좀 하고 일을……!!
그 뒤로 갖가지 목소리가 따라붙는데.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청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기사 둘에게 빙긋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 수고가 많습니다. 여기 나를 사칭하는 놈이 있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내 동생, 할 일 있어. 그러니 얌전히.”
어느새 뒤에서 나타나 기사들의 목에 비수를 가져다 댄 보랏빛 머리 여자.
그리고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크르르르르르.”
바로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엄청난 크기의 은빛 늑대.
그 은빛 늑대의 시선이 정원에 있는 라미에게 향하고.
“오호. 늑대가 아니라 사자? 변신이라, 역시……. 그럼 주인은……?”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본 순간, 라프탄은 상황을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X 됐다.’
그 순간 라프탄은 모여 있는 귀족들 사이로 스르륵 들어가 재빨리 외모를 바꾸었다.
“타이니…… 경!?”
침입자의 등장에 놀란 성주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는데.
콰직.
“크아아아앙!”
그 순간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늑대에게 단숨에 목이 물려 역소환되는 라미.
“큭!”
뒤늦게나마 녀석을 역소환시키려 했으나 그 직전에 심령에 타격을 받은 라프탄은 그대로 울컥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다가온 검은 눈동자.
“오호. 여기 있었네?”
“흡!”
반사적으로 뒤로 튀어 나가려던 순간.
“역시 너구나, 라프탄.”
우드득.
“끄아악!”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오른쪽 발목에 끔찍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그는 신체의 자유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공에 떠오른 몸이 반원을 그리며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라프탄이 죽음을 예감할 때.
“타이니 군, 죽이면 안……!!”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쾅 소리가 들렸고, 그의 의식은 빠르게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