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누구?
오크족의 거창한 환송을 받으며 제국으로 향한 일행의 행보는 매우 빨랐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들판을 질주하는 월랑의 속도는 일반적인 기마보다 4배는 앞서 있었다.
녀석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도 보통 사람에게는 흐릿한 형체만 보일 만한 엄청난 속도였지만, 놀랍게도 평범한 말을 타고 있는 제나스와 루나는 월랑을 어렵지 않게 따라왔다.
‘역시…….’
한나절 넘게 마력 질주를 유지할 수 있는 제나스의 마나 컨트롤은 이전에도 보았지만, 루나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타이니 군! 더 이상은 말이 버티질 못해요. 쉬어야 합니다!”
역시나 특별한 혈통이 섞이지 않은 말은 기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오랫동안 그 속도를 유지하긴 힘든 것 같았다.
질주를 시작한 지 고작(?) 3시간째.
‘일반 말은 3배 정도가 한계군.’
예전에도 월랑이 3기마 속도, 즉 일반 기마보다 3배 빠른 속도를 냈는데 제나스가 한나절은 무난히 따라왔었다.
일반 기마가 마력 질주를 견딜 수 있는 한계선은 그 정도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며, 타이니는 새벽의 질주를 마무리했다.
한편 전생에는 말을 탈 수 없었고 현생에는 탈 필요가 없어진 이의 정보 수집 욕구 때문에 무리한 기마들은, 그 부작용으로 반나절 이상의 절대 휴식을 취해야 했다.
“엿차.”
쿵.
아침 식사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와 내려놓자마자 옆에서 놀란 시선이 날아들었다.
“아침 식사라고 하지 않았나요, 타이니 군?”
“아, 제가 좀 많이 먹을 필요가 있어서요.”
“아…….”
제나스가 그제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타이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경지가 상승한 김에 다시금 몸의 질량과 마나를 그 한도까지 꽉꽉 채우고 싶은 욕심만 가득할 뿐.
급한 마음을 버리기로 했으니 이번 기회에 재정비를 해 보려는 것이다.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조금 여유가 생길 테니, 이참에 다시 덩치도 키워야겠지.’
당장 전투가 이어질 것 같지는 않으니, 마나보다는 육체의 성장 쪽에 좀 더 치중해도 될 것이다.
‘한창 성장기인데 몇 달 동안 키가 그대로라니, 그럼 안 되지.’
타이니가 남이 알면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을 만한 생각을 하며 멧돼지의 배를 갈라 내장을 발라낼 때, 뚱한 표정의 루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림자의 법, 마력회로의 술, 범용성 약해. 더구나 저자, 바람 속성, 있어. 내가 저자보다, 못한 거, 아니야.”
“음?”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뾰로통한 얼굴로 제나스를 노려보았다.
“아…….”
아마도 오래 쉬어 가게 된 이유가 그녀의 말이 거품을 문 것 때문이라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에 제나스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고,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 누나.”
누나라는 호칭은 어느새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자신이 진짜 모르스의 핏줄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바뀔 것은 없다.
나아가, 전생에 데면데면한 관계였던 사신과 혈연이라면 오히려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나는 그의 위로에도 여전히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게다가.
우걱우걱.
쩝쩝.
와드드득.
“동생, 괜찮……아?”
“아, 이게, 제가 만든 비전이 좀 많이 먹어야 강해지는 거라서.”
혼자서 멧돼지 2/3를 뜯어 먹는 엄청난 식성, 그리고 그로 인해 실시간으로 조금씩 튼실해지는 육체와 증가하는 마나를 고스란히 느끼고 난 뒤에는 더욱 표정이 이상해졌다.
“굉장해…….”
아니, 정확히는 투지를 불태우는 듯한 표정이라 해야 할까.
“그래도 우리 가문의 비전, 떨어지지 않아. 세계 최고 수준, 암살기이자 전투법. 그 진가 보여 줄게.”
그리고 그 불타는 시선에 담긴 의지는 이내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내 말, 여기서 놔줄래.”
“음?”
해가 중천을 좀 지난 시각, 일행이 다시 천천히 출발하기로 한 시점에 루나가 엉뚱한 말을 꺼내 들었다.
“너, 기술, 대단해. 하지만 그래도, 가문의 절기, 배우고 싶게, 해 줄게.”
제나스가 곁에 있는 게 신경 쓰이는지 힐끔거리는 모습.
“동료야. 믿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타이니의 말에 결심을 굳힌 듯, 그녀는 즉시 한 줄기 인영이 되어 월랑의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헙!?”
태연해 보이던 제나스도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컹!?”
월랑도 놀라 으르릉거렸지만, 정작 타이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쫓아내지 마, 아군이야.”
- 넌, 안 놀라네?
“놀랄 이유가 없지. 많이 봤으니까.”
- 아, 그렇겠네. 칫.
그림자를 타고 귀에 직접 전달되는 루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타이니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 그 아가씨는요?”
“그림자 속에서 따라올 겁니다.”
“헐……?”
당혹스러워하는 제나스의 표정을 뒤로한 채, 타이니는 천천히 월랑을 출발시켰다.
제나스의 말을 생각해서, 오늘 야영할 때까지는 일반 말이 전력 질주하는 정도의 속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루나는 월랑의 그림자 속에 녹아든 상태 그대로 일행을 따라 이동했다.
파바바바박.
월랑은 빠르게 내달리면서도 신기한 듯 가끔 고개를 돌려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제나스 역시 월랑의 뒤를 따라가면서 녀석의 그림자를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그녀의 은신은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마나 감응력으로도 루나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집중해야 간신히 존재가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게 숨어든 것이다.
‘역시…….’
경지가 오르면서 얻은 ‘공간 장악’의 특성이 더해진 그림자의 법 덕분에, 그녀는 상대의 그림자에 숨어 그 움직임에 그대로 따라붙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 챌린저급에서 얻는 마나의 공간 장악은 오러익시더급에서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의 권능’에 비하면 그 파편에 불과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루나는 그것만으로도 사실상 공간 자체에 간섭하는 수준의 대마법 같은 술수를 부리는 것이다. 그것도 아마 마나를 크게 낭비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제 봐도 신기한 술수란 말이지.’
이것은 후에 마계 대전에서 사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1군단장 글러터니 휘하의 후작급 마수 중에는 그 속도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빠른 괴물이 있었으니까.
그 엿 같은 놈 때문에 생긴 피해만 해도 자그마치…….
‘아, 아니지. 지금 내가 전생의 경지를 회복한다면 또 다르려나?’
묘하게 호승심이 들었지만, 그건 그때 가서나 그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사신은 아군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
- 심심할 때마다, 그림자를, 쑤셔 보는, 괴상한 습관, 있는 적만 아니라면, 몇 날 며칠이건, 이렇게, 숨을 수 있어. 뭐, 네 정령처럼, 이상한 특성, 있는 애라면, 또 모르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랑하다가도 다시 시무룩해지는 귀여운 모습은 예상외였지만, 어쨌거나 전생의 그 음침한 사신보다야 훨씬 나았다.
‘누나라…….’
여전히 그 호칭을 입에 담을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하지만 클로이도 그렇고, 루나도 그렇고.
‘모두 좋은 사람들이지.’
전생과는 인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 나고 있었다.
자연히 뒤를 따라오는 제나스에게도 시선이 갔다.
- 괜찮습니다, 타이니 군. 타이니 군은 정말 잘해 줬어요.
- 타이니 군이 애쓴 일이 결코 허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깨 펴세요. 당당하게.
그에게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준 말.
전생에도 현생에도 앞만 보며 살았던 시야가 덕분에 넓어진 것 같았다.
생각을 바꾼 것만으로도 자신이 조금 큰 사람이 된 느낌.
- 하늘 똑바로 보면서,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그렇지, 틴?
에리나 누나가 바란 것은 어쩌면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이런 정신적 성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뭐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게. 그리고 더 큰 사람이 될게. 계속 지켜봐 줘, 누나.’
전생과는 조금 다르게 몸이 아닌 정신을 성장시킬 것을 다짐하며, 타이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속도를 조절했다.
그리고 그렇게 결심한 지 일주일 만에, 그 마음의 여유가 와장창 깨어지는 사건을 마주했다.
“아아, 기사님이시군요. 이리로.”
등록된 자의 마나를 머금고 푸르게 빛나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신분패.
고귀한 이들만이 사용하는 신분패를 내밀자, 국경 도시 ‘퍼스트원’의 경비들은 지체 없이 일행을 그들의 대장에게 안내했다.
그런데.
“푸른 독수리……. 발렌티아의 기사분이시군요! 그런데 그럼, 알고 오신 겁니까?
대장이 이상한 말을 꺼내 들었을 때부터 타이니는 기분이 조금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예? 뭘……?”
“아니, 여러분도 ‘그분’이 주최하는 성의 파티에 참여하실 생각이신가 해서 말입니다.”
그분? 파티?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지자 타이니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전생에 동료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름을 대고 방문하는 도시마다 초청장이 수북이 쌓일 정도로 숱한 초대를 받는다고 했던가.
그 와중에 자신에겐 그런 일이 거의 없는 게 이상해서, ‘난 왜 안 와?’라고 물어봤는데.
- 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무서우니까 초청 안 하는 거고.
다소 난감한 대답이 돌아왔더랬다.
‘물론 현생에서는 다르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광휘의 기사, 즉 타이니 본인의 신분패를 내민 것도 아니었다.
- 오크의 땅에서 벌인 일이 지금쯤이면 제국에도 퍼졌을 겁니다.
- 숨기지 않으면 아세리안까지 가는 데에만 몇 달은 걸릴걸요?
- 미래를 생각하면, 귀족들의 초청을 다 무시하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 차라리 잠행을 하죠.
이 모든 계획은 제나스의 머리에서 나왔다.
신분패는 예전에 썼던 가짜 신분인 견습 기사 토렌의 것을 사용했고, 성문이 보일 때부터는 아예 월랑도 역소환한 채 제나스의 말을 얻어 타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니.
‘유명 가문의 기사라면 가리지 않고 파티에 초청하나?’
하지만 로브를 눌러쓴 제나스가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자신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 일행의 구성에는 문제가 있었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루나야 그렇다 쳐도, 제나스는 대놓고 제국의 다른 영지를 돌아다닐 형편이 아닌지라 지금도 뒤에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자신 역시 시끄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가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파티 초청이라니?
좀 이상했지만, 타이니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하, 아닙니다. 우리는 도시에서 잠시 쉬었다가 바로 길을 떠날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요. 아쉽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지금 세간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 광휘의 기사, 타이니 경이 우리 도시에 와 계시거든요. 바로 그분이 주최하시는 파티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고요?”
“그분의 방문에 성주께서 기꺼이 크게 잔치를 열기로 하셨습니다! 가시면 그 유명한 위풍당당한 ‘늑대의 정령’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정령……이요?”
“아하하. 저도 처음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정령 처음 봤거든요. 진짜 늑대보다 훨씬 크더라고요.”
“아, 아니, 정말 광휘의 기사라고요?”
“예, 검은 머리와 용맹한 늑대 정령까지 보이는데, 굳이 신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분도 오크의 전장에서 바로 오셨다는데 편하게 쉬게 해 드려야…….”
경비 대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일행의 표정은 기괴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
- 크르르.
혹시나 이목을 끌까 봐 역소환했던 월랑이 영혼의 저편에서 신경질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절대 그냥 두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 나도 마찬가지야.’
타이니는 실소를 흘리며 손가락을 우드득 꺾었다.
뒤에서 제나스가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이미 근처의 귀족 영애들도 모두 모여들고 있습니다. 혹시나 그분의 눈에 들 수 있을까 해서요. 하하, 기사님도 생각이 있으시면 성의 방문첩에 이름을 적으시면 됩니다. 발렌티아라니, 광휘의 기사님과 인연이 있는 곳 아닙니까?”
오호라, 여자까지?
“아무리 급해도, 내 이름에 똥칠을 하려는 새끼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콰득.
무겁게 내디딘 발걸음에 돌길이 푹 패고, 타이니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