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신전의 변화
오크들의 성지 바토르가 전설에나 나오는 언데드, 데스 나이트의 습격을 받아 성물을 빼앗겼다.
얼마 전 크라켄의 등장이라는 신화적 재앙을 막아 냈던 카룬에서는 악마 형태의 마물이 튀어나와 성물을 강탈해 갔다.
실질적인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했다.
악마추종자들이 성물을 노린다.
“이제는 거의 무의미해진 상징 같은 성물을 왜?”
“그거야 성물이 그놈들한테는 독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독을 뭐 하러 가져가냐고!”
“……그런가?”
대중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하는 한편.
“악마추종자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라. 놈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아내.”
“예.”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마법사 집단 현자의 마탑과 더불어, 모든 나라가 옛 자료를 통해 그 이유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을 통해 다시금 커지는 이름이 있었으니.
광휘의 기사, 타이니. 그가 오크족의 전쟁을 멈췄다. 그 종족 전쟁 역시 악마추종자들의 음모였다.
악마추종자들의 음모를 성공적으로 막아 냈을 때보다, 실질적 피해를 입고 성물을 도난당한 지금 타이니의 이름이 더욱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그 적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 * *
- 1호……. 그렇게 워로드를 피하라고 말했건만, 뭐 하나 제대로 처리하는 일이 없구나. 못난 놈.
암실의 원탁, 그 상석에서 기괴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퍼지자 원탁에 둘러앉은 그림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번 실패는 죽은 1호의 잘못이긴 했지만, 투구 안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눈을 대신하는 괴물, 그 안에 자리한 수장의 영혼은 생전보다 더한 압박감을 자아냈으니까.
하지만 이내 그중에서도 용기를 내는 이가 나왔다.
“카니발 님, 그래도 성과가 더 크지 않습니까. 성물 코르와 후마니타스를 확보했으니까요.”
- 더욱 쉽게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었다.
“…….”
- 거기다 이젠 다른 쪽의 방비도 훨씬 더 강해지겠지.
그거야 예상했던 일 아니던가.
‘그래서 내가 바토르의 성물만 가져오자 했는데.’
용감하게 말을 꺼냈던 2호는 속으로 탄식했다.
애초에 한 군데만 건드렸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세간에서는 그냥 악마추종자 놈들이 또 테러를 했구나 하며 욕이나 더 하고 말았을 텐데, 거의 동시에 두 군데의 성물이 사라지는 바람에 자신들의 목적 중 하나가 고스란히 세상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질끈 깨무는데.
- 내 판단에 불만이 있나 보군, 2호.
“아, 아닙니다!”
- 크크크, 아니긴. 성물 하나만 노렸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 절대 아닙니다!”
- 뭐 좋아. 생각을 깊이 하되, 일단 명령은 따른다. 나는 그런 자세를 좋아하니까.
이건 진짜 칭찬일까, 함정일까.
수장의 말 한마디에 생사를 넘나들 수밖에 없는 2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어차피 놈이 살아 있는 한 의미 없는 일이다. 우리는 성물을 노리고, 놈은 그런 우리를 막는다. 대체 어떻게 정보를 얻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목적은 놈 때문이라도 결국 알려지게 되어 있어. 그러니 얻을 수 있을 때 얻어 두는 것이 좋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고 싶은 말 따위, 자신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2호는 바로 수장의 말에 동의하며 허리를 숙였고, 그에 따라 원탁의 다른 그림자들 역시 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장내를 잠식해 가던 엄청난 기세가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수장이 입을 열었다.
- 한동안은 숨죽이고 있거라. 그리고 세상의 여론이 잠잠해지거든, 그때 다시 움직인다. 2호.
“예!”
- 우리 조직원들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또 어디지? 영향력의 범위는?
“현자의 마탑과 셀던 왕국에 중심부에 침투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연합 전체를 한 번은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 고작 그게 다인가?
“아, 아닙니다! 예부터 준비해 온 그 작전, 웨어비스트 왕국의 혼란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테르티우스에서의 작업도 순조롭습니다.”
- 다른 곳은?
호기롭게 이어지던 2호의 대답이 그 짤막한 반문에 멈추길 잠시, 그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엘븐하임의 형제들은 모두 색출되었습니다. 오크족의 형제들은 하급들 소수뿐이니, 없다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하…….
“하, 하지만 제국의 상위층에 심은 형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 조력을 요청한 ‘대귀족’도 존재하고……!”
- 쓸모도 없는 것들이 남았다 한들 무얼 할 수 있을까.
“아, 아닙니다! 분위기가 살벌하여 숨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곳의 형제들 중에는 귀족도 다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세상이 잠잠해지거든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2호가 말을 이을수록 상석의 괴물에게서 풍겨 오는 기세가 점점 강해졌다.
‘왜 내가 변명을 하고 있지? 빌어먹을!’
세작 총괄은 중요한 임무인 만큼 원래 1호의 담당이 아니었던가.
2호는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지만.
- ……부서진 두 기의 데스 나이트가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나 역시 완성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네?”
- 제물을 수배하라. 우리의 회복 시간을 줄일 제물들을. 지배자들이 시야가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최대한 은밀하게.
“명에 따르겠습니다.”
다행히 수장은 그를 박살 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조직원들 모두 한동안 몸을 숙여라. 그리고 숙인 만큼 더 크게 일어날 준비를 하라. 우리에게 머문 세상의 시선이 흩어지는 순간, 그 모르스 놈부터 없앤다. 내가 직접.”
마지막 선언과 함께 암실은 침묵에 잠겨 들었다.
* * *
당사자들을 제외, 성물의 도난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당연히 신전이었다.
정확히는 그 신전의 가장 고위층 두 사람.
“파멸의 운명이 이번에는 한층 강해졌습니다. 악마에게 혼을 판 놈들이 벌인 짓과 분명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탄하듯 흘러나온 센티널 3세의 목소리에, 유일한 청자 얀센 추기경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그에 반해, 그 광휘의 기사라는 사람의 행보는 확실히 놈들을 막아서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요. 그런데 엘븐하임에 성기사를 파견한 건 결국 허사가 되었더군요.”
“그래도 직접 신전을 찾아올 것이라는 전언은 받아 내지 않았습니까, 성하.”
계속 이어지는 교황의 자책에 얀센이 듣다못해 한마디를 보탰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황은 근심을 덜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그가 신전을 피하려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제 착각입니까?”
“……그럴 리가요.”
그리 대답하면서도 시선을 피하는 얀센 추기경을 보며, 센티널 3세는 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이내 서글픈 눈으로 얀센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교황이 세상 가장 재미없는 눈으로 말머리를 떼자 얀센 추기경의 눈동자가 흔들리는데.
“신전의 타락에 관한 얘기야 얼추 들어 왔지만, 이번에 들은 건 견디기 힘들더군요.”
“예?”
“세상 사람들은 여기 있는 절 무슨 고리대금업자의 수장 정도로 여긴다더군요.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성하! 세, 세상에 어떤 놈들이 그런 신성 모독 같은 소리를 한답니까!?”
다 늙은 추기경이 그야말로 자기 키만큼 뛰어오를 기세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교황은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세계 최고의 고리대금업자 수장이 불렀는데, 좋다고 오는 사람은 없겠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서, 성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차라리 정말 그만큼 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뇌물을 줘서라도 그 사람을 불렀을 텐데.”
“…….”
“세상이 망해도 여신교의 사제는 잘산다면서, 최고 부자가 누군지 궁금하면 신전으로 가라더군요.”
“그, 그게…….”
“서민들은 뼈가 부러진 걸 치료받으려면 거의 전 재산을 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라는 신성력도 없는 이들을 찾아간다죠. 개중에는 사기꾼도 많아서 오히려 치료받다가 죽는 경우도 많다더군요.”
“……성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얀센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리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제가 파멸의 예언을 말해 봤자 세상이 믿을까요?”
“성하의 목소리는 여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 누가 감히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의심하지 않는 경우가 더 무섭습니다.”
“예?”
“파멸의 시간이 도래했으니 면죄부를 사라……. 다른 추기경이나 고위 사제들이 그렇게 나오지 않을까요?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그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갓 핸드 경을 제가 직접 만나 보겠습니다.”
“성하!?”
“아무리 중립을 지켜야 하는 성전 기사단이라 해도 제 개인적인 부탁은,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지 않은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그 광휘의 기사라는 사람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을 통해 파멸의 예언을 세상에 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대륙을 아우르는 종교 세력. 그 수장이 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대답.
“그 사람도 고리대금업자 수장의 말은 안 듣더라도, ‘수백 년’ 전부터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갓 핸드 경의 말은 들어 주겠지요.”
“하오나 성하, 갓 핸드 경이 사람을 설득하는 일에 적합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으윽, 제발 그만! 더 이상 부정적인 말씀은 말아 주십시오. 그게 그나마 제게 남아 있는 희망입니다.”
머리를 부여잡은 교황이 그렇게 소리치자 얀센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교황은 손에 한 움큼 잡힌 머리털을 보며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흐, 흐흐. 제가 완전히 대머리가 되는 게 빠를까요, 세상이 망하는 게 빠를까요? 이런 생각만 하면 위장이 헐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요새는 음식도 잘 넘어가지 않아요.”
그야말로 반쯤 미친 사람의 표정.
‘성하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이건 아니야…….’
여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 뜻을 대변해야 할 교황이 이런 모습이라니.
‘이래서야 교의 근간이 무너진다.’
여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제. 그가 정신적으로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끝이라.
‘어쩔 수 없다. 다소 불안하더라도…….’
얀센은 입술을 꾹 깨물다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하, 신전의 쇄신을 위해 목숨을 걸 의향이 있으십니까?”
그 말에 교황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무슨 말입니까, 얀센 추기경? 설마…….”
“예. 쇄신 혁명을 조금 일찍 시작해 볼까 합니다.”
“아직 무립니다! 추기경께서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하지만 세상이 워낙 어수선하고 성하께서 고뇌가 그리 깊으시니, 모험을 해 볼까 합니다.”
강퍅한 인상의 노사제가 눈을 위험하게 빛내며 찬찬히 계획을 설명했다.
잠시 후 그의 말이 끝나자 센티널 3세는 다시금 또렷해진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없진 않군요. 그렇다면 더욱 갓 핸드 경을 움직여야겠어요.”
“예?”
“아무래도 그분께 광휘의 기사를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성하!”
“그분이 자리를 비우시면 거사가 더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율령에 따라 막으시는 건, 타락한 자들의 칼만이 아니니까요.”
“아…….”
좀 전의 자신보다 한층 더 위험하게 번뜩이는 교황의 눈빛에, 얀센 역시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교황은 결심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 * *
“……본인의 부덕에 세간의 사람 하나 움직이지 못하니, 갓 핸드 경의 위명을 빌리고 싶습니다. 그자도 기사이니, 경이 직접 나서면 본인을 만나 주지 않겠습니까?”
명목상 신전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한 사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세속의 사람들은 물론 신전에 속한 그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태도.
하지만 정작 그 예의를 받는 사람, 실내에서도 화려한 금장식이 된 순백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빈틈없이 장착하고 있는 이의 반응은 범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이 여신의 뜻입니까?”
눈빛조차 잘 보이지 않는 투구 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백해서 어떠한 감정의 잔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고개를 숙였던 교황의 눈빛이 슬쩍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여신께서 전해 주신 파멸의 예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그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나 주질 않으니…….”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엄연히 신을 파는 행위.
평소의 교황이라면 이런 변설은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만큼은 작정을 했다. 자신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의심하지 못하도록 얼굴에 철판을 깐 것이다.
다행히도 그 노력은 먹혀들었다.
“……모든 것은 여신의 뜻대로.”
한 손을 가슴 앞에 세로로 세운 채 다른 손으로 주변에 성호를 그은 기사.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륙 7대 기사 중 성령 기사, 갓 핸드.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렸을 만큼 오랜 시간을 ‘존재해 온’ 신전의 병기가,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