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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59화 (159/500)

159화. 그래, 모든 것이 변했다

“절반?”

타이니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자 저릭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 종족 특성상 계급이 높다고 후방으로 빠지는 경우는 없으니까. 8대 부족의 최고 계급이나 하급 전사들이나, 모두 공평하게 절반가량 죽어 나자빠진 거다. 수백 년 내 최악의 사망자 수야.”

발발한 지 불과 100일이 되지 않은 오크 부족 전쟁.

거의 한 세기에 한 번은 일어났던 오크 전쟁치고 이번에는 그 기간이 매우 짧은 편이었지만, 그 피해 규모는 역대급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검은 코뿔소족에 스며든 악마추종자들이 수를 더럽게 쓴 모양이야. 자신들을 제외하고 공멸하도록 판을 짰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자세히는 모른다.”

일그러진 표정의 저릭의 말에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타이니는 간신히 울화를 삼켰다.

솔직히 화가 나는 것이야 저릭이 더할 테니까.

쿵.

“네가 잡아 온 놈들은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실패해서 아깝다고 하더군. 감히…… 그 쓰레기들이!”

발을 구르며 묵직하게 내뱉은 음성에 담긴 살기가 임시 천막 안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 상황에서.

“……어쩐지 5대 3의 전쟁치고 너무 치열하게 전개된다 했습니다. 부족 간의 전력 차도 크지 않을 텐데.”

붉은 멧돼지의 족장 바타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으, 난 우리 부족이 용맹하게 싸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누다르가, 상황을 봐서 입을 열어라.”

“너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텐데, 텐거?”

“닥치라고 좀! 아니면 오크어로 하든가. 인간들도 보는데, Цркмлаадкз…….(쪽팔리게……).”

붉은 도마뱀족 족장과 푸른 사자족 족장이 사소한 다툼을 벌였지만, 이 안에 있는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네르구이에게 놀아난 저쪽의 부족장 넷을 제외한 오크의 대표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뜻은 저릭이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들은 타이니가 저릭에게 대놓고 반말을 하는데도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신문 결과는 얻은 게 없고?”

“그, 네가 그놈들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니 역으로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신문하는 전사들이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잘 안 되니까 열 받아서 다 때려죽였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저릭의 대답에 타이니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그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라…….”

“하지만 시체가 썩는 것만으로도 증거는 차고도 넘치니, 곧 모든 오크가 그 악마추종자들을 잡아 족치기 위해 힘을 합칠 것이다.”

저릭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타이니는 차마 거기서 더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솔직히 제약까지 걸린 악마추종자들에게서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으니.

“……그래.”

그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저릭이 애써 웃으며 천막 안에 자리한 족장들에게 손짓했다.

“자, 부족장들. 오크족을 몰락의 위기에서 구해 준 은인을 향해 감사를 표하시오. 은원이 분명해야 명예도 가치를 얻는 법.”

그에 가장 먼저 바타르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타이니 경, 우리 붉은 멧돼지족은 광휘의 기사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우리 붉은 도마뱀족도. 인간 친구 잊지 않겠다.”

“푸른 사자족도 마찬가지요. 광휘의 기사. 잊지 않겠소.”

명예를 따지는 문화인 만큼 뻣뻣하기로 유명한 오크의 수장들이 연이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분명 장관이었지만.

“인사만 해? 뭐 안 줘?”

갑자기 옆에서 툭 튀어나온 루나 모르스의 말에 일순간 천막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에 타이니가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으며 손사래를 쳤다.

“누, 누님!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왜?”

“명예를 아는 오크족은 진짜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물질로 선물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 큰 은혜가 그 물질만큼의 가치로 격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말만?”

루나 모르스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오크 족장들의 얼굴이 더욱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는 표정.

거기에 루나가 쐐기를 박았다.

“초월무구쯤 되면, 격하 아니지. 그렇지 않아?”

대놓고 저릭의 초월무구 ‘아너’를 가리키는 루나의 모습에 천막에 있던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누님!!!???”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있던 타이니가 뒤늦게,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소리를 지르자 루나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타이니, 내 동생, 무기, 잃었다. 둔기와 도끼, 큰 차이 없다. 저거면 충분한 보상. 내 동생, 그만한 가치, 했다.”

집게손가락을 차분히 휘저으면서 특유의 끊어 읽는 어조로 할 말은 다 하는 루나와, 그에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리는 저릭.

지켜보는 부족장들의 얼굴 역시 동시에 일그러지는데.

“아너, 우리말로 훈데트켈은 오크의 보물이다. 그리고 오크가 아니면 쓸 수도 없다. 친구이자 은인에게 바로 보답하지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저릭은 굳은 얼굴로 선언하듯 말을 이었다.

“큰 은혜는 물질이 아닌 목숨으로 갚는다. 그것이 우리 오크의 방식이다. 그것이 결코 아너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하겠다, 인간 여자.”

모든 이들이 오히려 당사자보다도 더 긴장한 눈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저릭의 작은 눈을 한참 바라보던 루나는 이내 무엇을 느꼈는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다, 오크 남자.”

“……?”

아주 잠시간 루나의 대답을 이해 못 했던 장내의 인물들이 일순간 얼어붙고, 타이니 역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여태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제나스가 피식 웃어 버린 덕에 적막이 깨어졌다.

“아, 흠. 흠. 죄송합니다.”

다행히 오크의 대전사는 루나의 말을 도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흠, 흠. 그래. 알아주면 됐다.”

저릭이 해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자, 다른 오크들도 그를 따라 황급히 천막을 나섰다.

그리고 그 상황이 되어서야 타이니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편히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오크족의 몰락을 막아 내긴 했는데, 절반의 희생이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과정마저도 수월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회귀한 직후 처음으로 완전히 컨트롤을 벗어나 버린 상황에서 허겁지겁 수습한 것뿐이니까.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이제는 ‘그 예측’도 의미가 없어지겠군요, 타이니 군. 그런 거죠?”

옆에 있던 제나스가 그 심경을 대변하는 듯한 말을 꺼내 들었다.

“……예.”

그렇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내가 아는 미래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당장 다음에 일어날 재앙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제 남은 건 구체적인 시기나 사건들도 잘 모르는 재앙들뿐인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리는 듯한 기분.

슈페리어급에 이른 성취도, 오크족의 재앙을 반쯤이나마 막아 냈다는 자부심도 그 막막함 앞에선 전부 묻혀 버리는 듯했다.

그 마음을 짐작하는지, 제나스가 피식 웃으며 말을 보탰다.

“이 일에 나서기 전에 각하께서 전하신 말씀이 있지요.”

“……예?”

“이미 많이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큼 했으니 일이 잘못되더라도 스스로를 원망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요.”

“아…….”

“각하의 말씀에 제 말도 보태지요. 타이니 군, 당신은 이미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어요.”

그리고 옆의 루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그 이야기’를 알고 봐도 마찬가지예요. 벌써 슈페리어급이라니, 이 겨울이 지나야 15살 아니에요?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세요. 아직 시간은 충분하고,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이뤘어요.”

어…….

“또 각하께서 하신 말을 전하자면…… 머리도 나쁜 놈이 혼자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성취를 즐기고, 성과에 자부심을 가져라. 넌 그래도 된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라고도 하셨지요.”

하……?

“참고로 이건 그분께서 좀처럼 하지 않는 극찬입니다. 그것도 이번 일을 마무리하기 전에, 당신이 블레이더급이라고 알고 계실 때 하신 말씀이죠.”

장난스레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하는 제나스의 모습에 검제의 얼굴이 겹쳐 보이면서, 왜인지 가슴에서 울컥 솟구치는 감정이 있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었지만, 갑갑하고 막막한 기분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덧붙여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지는 느낌도.

“흠. 흠. 연기가 새어 들어왔나.”

괜한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감정을 추슬렀다.

‘그래, 난 잘해 왔어.’

전생에는 이 나이에 필레스에서도 못 벗어났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이룬 성취는 어떠한가. 벌써 슈페리어급에 이른 것도 모자라 4단계 정령술사라니.

거기다 전생에는 꿈도 못 꾸던, 엄청난 소울웨폰까지 발현시켰다.

이대로 고스란히 성장하면 전생을 압도할 강자가 될 수 있다.

그래.

‘난 뭘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하…….’

결국 목표는 하나.

“……내가 마왕의 골통을 깨 버리면 되는 거니까.”

그전에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막을 수 없는 희생이 생겼다고 그게 내 책임은 아니다.

이번만 해도 결국은 오크족의 완전한 몰락을 막아 내지 않았나.

‘그래, 내가 언제부터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광휘의 기사.

괴력의 기사보다 고결하게 들리는 현생의 이명에 잠시 취해 있었나 보다.

그것을 자각하고 나자,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전생에 자유 기사위를 얻었을 때 했던 서약이 떠오른 것이다.

“선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악을 부수는 자가 되겠습니다. 고결보다 과격을 택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진정 고결한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건 아마도 서임해 주는 놈의 심술이었을 것이다.

용병이나 다름없는 자유 기사 서임에도 무슨 서약이 필요하다면서 닭살 돋는 예문을 제시하길래, 그걸 찢어 버리고 만든 자신만의 서약.

“……뭐요?”

제나스가 무슨 기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이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철없을 때 지은 말이라 지금 생각하니 조금 부끄럽기는 했다.

“크크크.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뭐, 눈빛은 좋아졌네요. 그럼 각하의 추가 전언도 전하지요.”

“음?”

“만약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거든 제나스와 함께 제국으로 와라. 내가 할 일을 만들어 주겠다.”

“에……?”

기묘한 미소를 띤 제나스의 얼굴이 마치 그 말을 하는 검제의 표정처럼 보여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면 뭘 하게 되는데요?”

“저야 모르지요. 뭐, 각하께서는 타이니 군이 선택하도록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엔 대번에 썩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검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함정이다, 함정인데…….

‘이제 뭘 해야 할지 정말 감도 안 잡히긴 한단 말이지.’

웨어비스트 왕국의 내분은 정확한 시기나 사건의 추이를 모르겠고, 드워프와 엘프의 전쟁은 에스티나가 있으니 조율이 될 것이다.

연합과의 전쟁 역시 제국이 피폐해지지 않았으니 일어날 확률이 낮고, 그 외에 다른 재앙들은 원인도 시기도 잘 모른다.

“……아니지. 알았다 해도 이제는 다 바뀌었으려나?”

“그렇겠지요?”

그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는 제나스의 모습이 굉장히 얄미워 보였다.

‘이 함정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그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루나가 옆구리를 푹 찔러 왔다.

“타이니, 이거 다, 무슨 말?”

“아, 그……. 하하,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누님.”

“지금. 나만, 몰라.”

자기만 모르는 얘기가 오고 가니 서운한 것이리라.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루나였지만, 며칠간 함께했다고 약간은 감정이 읽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얘기하려니 말문이 턱 막혀 왔다.

요 며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내가 혈육이라고 믿고 있지.’

이제라도 말을 해야겠다.

그리 다짐을 하는데, 막상 그 크고 맑은 자수정 빛 눈동자에 어린 순수한 감정을 마주하니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화를 낼까.

‘……그래도 해야지.’

타이니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누님, 아니 루나 모르스 님. 사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음?”

“사실 저는 모르스 가문의 혈육이 아닙니다. 그때 그렇게 말한 건 사실 이유가 있는데…….”

사신 역시 전생에 사이가 좋지 않았을 뿐 신뢰할 수 있는 동료.

그러니 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빠르게 이어 나가며 사연을 설명하려 했는데.

“그게, 무슨 말?”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루나 모르스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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