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오크 부족 전쟁의 끝
대수림과 아스란 제국 사이, 동서에 각각 초원과 구릉 지대가 펼쳐진 그 지역은 제국 못지않은 거대한 너비를 자랑한다.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오크들. 그들의 성지 바토르는 구릉 지대에 인접하는 초원 지대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지금 부족 전쟁이 한창인 전장의 전선은 아스란 서부 국경 지대 기준으로 남북으로 길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장은 바로 서남부 지역의 루덴스 강 북쪽이었다.
검은 코뿔소족을 위시한 5부족 동맹의 주력이, 붉은 멧돼지족을 필두로 한 3부족 동맹의 주력과 맞서 싸우는 상황.
“црелведывд втадаьа цдягйредыул!(조상신께서 우리를 지켜보신다!)”
“фгввЗаьа цщвстдплал!(명예를 쟁취하라!)”
“йтцрквьа втдплвг!(부족을 위하여!)”
콰아아앙!
“아악!”
쾅!
“끄아아!”
쩌어억.
“цткво!”
양측을 합쳐 수십만이 넘어가는 오크 전사들이 한 달째 부딪치는 통에 초원에 시체의 산이 쌓였는데, 거기서 흘러내린 피가 제국으로 흘러드는 루덴스 강 중류를 새빨갛게 물들일 정도였다.
이미 양측을 합쳐 전사자만 얼추 십만을 훌쩍 넘은 대전쟁.
삶이 곧 투쟁인 오크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혈전이었고, 전투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것이 미덕인 오크족의 용맹함이 빚어낸 대참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서쪽에 진을 치고 있는 3부족 연맹의 실질적 수장 바타르는 무거운 얼굴로 옆의 두 족장을 바라보았다.
“네르구이와 검은 코뿔소족의 최정예 일천이 빠졌는데도 반전이 어렵다?”
“……애초에 우리의 대응이 너무 늦었소이다, 바타르.”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엔 푸른 문신을 새긴 푸른 사자족의 족장이자 6단계 주술사, 텐거가 우울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고.
“맞소. 네르구이가 수작을 부린다는 낌새를 알았을 때 우리도 같이 준비해야 했소.”
오크 전사치곤 작은 180cm 언저리의 키지만 붉은 도마뱀족의 족장이자 챌린저급 전사로 이름 높은 누다르가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보탰다.
“무엇보다 네르구이의 빈자리를 그 인간 놈들이 기묘한 전술로 메꾸고 있소이다. 대군을 동원해 약한 쪽만 쑤시는 비겁한 전략이라니. 놈들이 우리 오크의 전장을 더럽히고 있소!”
그 호통에 바타르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야만 했다.
물론 누다르가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형의 약한 곳을 노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전술, 사실 전략이라 부를 것도 없는 단순한 병력 운용일 뿐이다.
문제라면 강자를 찾아 도전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는 용맹한 오크의 전사들이 이상할 정도로 그 인간들의 말을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 그 인간의 말을 믿은 것이 실수였을까.’
제국의 간섭이 아니라는 확언을 듣고 경계를 조금 늦추자마자 전쟁이 일어났으니, 생각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타르는 자신이 현실 도피를 하고 있음을 금세 자각했다.
‘……아니지. 제국의 수작이 아니라면 네르구이 따위야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내 잘못이다.’
이제 와 남을 원망해 봐야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더구나.
‘그 친구가 지금 대전사와 함께 하르하린으로 가고 있다던가? 네르구이는 그래서 빠진 거겠지. 설마 대전사를 어찌할 생각은 아닐 테고. 그럼 얼마나 걸리려나…….’
- 타이니 경은 무언가 확신이 있어 보였습니다.
현명한 오크 바타르는 이내 소식을 전해 준 부족의 순찰 대장 나른의 말을 떠올렸고, 감았던 눈을 뜨며 다시 두 족장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은 있었다.
“그래서, 두 부족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버티는 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소.”
“우리 역시 마찬가지. 놈들을 전멸시키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지키고자 하면 언제까지고 지킬 수 있소이다!”
이런 오크 새끼들.
‘이 상황에서도 허세를…….’
바타르는 속으로 이를 갈며 다시금 인내심을 발휘했다.
“우리 부족의 정예 중 이미 2만이 사망했고, 1만이 전투 불능이오. 사실상 7할의 전력만 남은 셈이니, 놈들이 총공세를 펼친다면 잘해야 2주나 버틸 수 있을까 싶소. 그러니 두 족장도 솔직히 말해 주시오.”
“……우리 역시 마찬가지외다.”
“우리 부족은 상황이 조금 더 안 좋소이다. 남은 전력은 6할 정도.”
그 말에 바타르는 결국 참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5부족 동맹의 전력 손실은 많이 쳐줘 봐야 1, 2할 내외일 것이다.
다이어울프족을 제외하고 오크의 가장 강성한 부족 여덟이 싸웠으니 모두가 치명적인 손해를 봤겠지만, 아무래도 근본적인 병력 규모가 차이가 있는 만큼 이쪽이 훨씬 불리했으니까.
“대전사께서 언제 오실지가 관건이로군.”
“바타르 족장,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전사님이라니?”
바타르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두 족장에게 상황을 전했다.
그러자.
“우하하하하! 그렇다면야. 어떻게든 버텨 봐야지!”
“물론이오. 이거 참 빛이 보이는구먼. 네르구이 그놈이 이상한 수작을 부린다 했어!”
두 부족장은 상황을 낙관하는 듯했지만, 바타르는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실상 전력의 3할이 전투 불능, 인간족이라면 이미 전멸 혹은 패전이라고 생각했을 상황이다.
정예의 30%가 죽은 시점에서 그 군대는 이미 정상적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던가?
‘하지만 우리 오크는 아니지.’
오크의 전쟁에서는 정말 모든 전사가 다 죽어야 전멸이고, 그 전에 항복하는 족장은 비겁자로 낙인찍힌다.
그것이 모든 종족을 통합하는 새로운 오크로드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절반 이상의 전사가 사망한다면, 차라리 부족민을 위해서라도 항복하는 게 나을지도.’
오크의 본성을 상당수 버린 현명한 오크는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었다.
그리고 불과 사흘 뒤.
대량의 희생 끝에 한동안 잠잠하리라 생각했던 전선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5부족 연합이 제대로 정비도 되지 않은 전사들을 다시 출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돌진!”
“막아라!!”
“조상신께서 보고 계신다!”
수십만의 오크 전사가 루덴스 강의 북편에서 기다란 인의 장벽을 이루며 동시에 부딪쳤다.
꽝!
“으와아압!”
비겁하다는 이유로 원거리 무기 따위는 거의 취급조차 하지 않는 거친 전투 종족의 근접전.
선두에 선 정예들은 각자의 부족 문신을 활성화하며 온갖 거대한 야수의 환영들을 동원한 채 충돌했고.
꽈아아아아앙!
그 뒤를 이어 각기 검고 흰 코뿔소와 붉고 푸른 랩터, 푸른 하마를 탄 오크 전사들이 무섭게 돌진해 왔다.
꾸우우웅!
“키에에에!”
그에 맞서 붉은 멧돼지와 푸른 사자, 붉은 도마뱀을 탄 전사들이 서슴없이 뛰쳐나가 강렬한 파열음을 내며 충돌했다.
캬아아아악!
“죽여!!!”
수가 가장 많은 보병에 해당하는 하급 전사들이 그 뒤를 따랐고, 이내 모든 오크 전사들이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이어졌다.
그 뒤쪽으로 주술사들의 무리가 각양각색의 빛줄기를 뿜어내며 각 부족의 전사들에게 힘을 보태 주는 광경은 얼핏 화려하게도 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팽팽하게 전선을 유지하는 듯싶었던 어느 순간, 3부족 연합의 진형 가운데 취약한 부분에 구멍이 뚫리며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막아!”
“동쪽이 무너진다!”
“달려!”
전사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한번 기울어진 전세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때부터는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끄아아악!”
“싸워라!”
“조상신께서 보고 계신다!”
오크 전사들은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무기를 휘둘렀다.
그야말로 용맹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 주는 이들.
하지만 그것만으로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쩌어어억.
달려드는 적의 전사 하나를 세로로 쪼개 버린 바타르가 거칠게 욕설을 토해 냈다.
‘이럴까 봐 수비만 하자고 했던 건데.’
호전적인 오크 전사들의 의견을 온전히 꺾지 못한 결과였다.
자신이 이런데, 대체 저쪽의 인간들은 어떻게 오크 전사들을 지휘하는 걸까.
잠시 잡념이 들었지만, 바타르는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등 뒤에 꽂고 있던 붉은 멧돼지의 깃발을 높이 휘둘렀다.
“후퇴하라! 방비를 굳혀라! 버티기만 하면 우리가 이긴다!!”
애초에 이 상황을 가정하고 있던 붉은 멧돼지족 전사들은 그 신호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족장님의 뜻이다!”
“물러서!”
“패배가 아니다. 버티라는 거다! 전부 물러서!”
부대장급의 전사들이 흥분한 하위 전사들을 다스리며 빠르게 전열을 물렸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두 부족은 그렇지 못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조상신께 명예를!”
“물러서란 말이다, 멍청이들아!!”
전장의 광기 속에서 그나마 바타르와의 약속을 떠올린 두 부족장들이 연신 전사들을 재촉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전선의 중앙을 맡고 있던 붉은 멧돼지족이 한 박자 빠르게 후퇴한 꼴이 된 탓에 3부족 연합의 진형은 더욱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처참한 광경이 바타르의 눈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끝장이다!’
두 족장을 두들겨 패서라도 수비 진형을 설득했어야 했을까.
그랬다간 적전 분열이 일어났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참상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타르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후퇴 속도를 늦춰라!! 두 부족을 돕는다!!”
부족 전사들의 희생이 더 커지더라도, 연합의 두 축이 바로 박살 나는 것보다는 낫다.
“예?”
“족장님!?”
바타르는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먼저 나서서 다시 적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때.
- 전쟁을 멈춰라!
북쪽에서부터 전장의 소음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전장의 광기 속에서도 이성을 조금이나마 유지하고 있던 이들이 놀라서 돌아보니, 북쪽 하늘 위로 은빛 늑대의 환영이 크게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현시대 오크의 대전사, 워로드 저릭의 상징 같은 문양.
거기에 더해.
- 이 전쟁은 율법에 어긋났다!
연달아 이어지는 선포에 미친 듯이 적을 쳐 죽이던 오크 전사들이 하나둘씩 멈춰 서기 시작했다.
“율법?”
“어긋났다고?”
“그럴 리가!?”
“그럼 이 싸움은!? 사망한 내 형제는!?”
혼란스러운 오크들의 시선이 점점 더 북으로 몰리는데, 저 멀리에 누구보다 거대한 체격의 오크가 인간들 몇 명을 대동한 채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전장을 압도하는 기세, 은빛의 마나가 한 올 한 올 전장의 하늘을 장악하는 광경에 어느새 모든 전투가 거짓말처럼 중단되었다.
그리고.
“검은 코뿔소족의 족장 네르구이가 악마추종자들과 내통해 벌인 음모다! 오크들이여, 전쟁을 멈추고 내부의 적들을 솎아 내라!”
저릭의 도끼가 검은 코뿔소족의 진형을 향하는 순간.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어째서 우리 부족이!?”
“대전사가 미쳤다!!”
“속지 마라!”
극명하게 반발하는 검은 코뿔소족의 전사들을 제외하고.
“우리 부족은 대전사의 뜻을 따른다!”
“명예로운 대전사의 뜻을 받들겠다!”
“오크의 명예를 위하여!”
마치 여태까지 치열했던 전투가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모든 오크들의 무기가 검은 코뿔소족을 향했다.
그러자 크게 반발하던 검은 코뿔소족의 전사들은 이를 악물며 무기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싸워! 싸우란 말이다!!”
그들의 뒤쪽에서는 하르하린으로 떠난 족장 대신 부족을 지휘하던 챌린저급 전사 셋이 길길이 날뛰며 전사들에게 싸움을 종용하고 있었다.
- 제정신인가? 다 죽으려고?
아무리 무식한 오크들이라지만 그들의 눈에도 지휘관들의 상태는 정상 같지 않았고, 이내 그들 뒤쪽 멀찍이, 말을 타고 서쪽으로 달아나고 있는 십수 명의 인간들이 보였다.
“부족의 인간 참모들?”
“설마……?”
억울하다 생각하던 검은 코뿔소족의 전사들마저 이내 하나둘 진상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
대전사와 함께 온 인간 하나가 거대한 은빛 늑대를 몰고 서쪽으로 번개처럼 쏘아지는 것이 보였다.
파바바박.
앞서 내달리는 말들이 그야말로 거북이처럼 보이는 속도.
그리고 그 인간의 손에 들린 새하얀 뼈 몽둥이 하나.
- 꽈아아앙!
이내 그 흔한 오크의 무기가 달아나던 인간들의 반수를 일격에 분쇄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이어지는 대전사의 우렁찬 고함.
“대전사의 명예를 걸고 말한다! 우리가 속았다! 악마추종자들의 음모에 명예가 더럽혀진 것이다!”
모든 오크들의 시선이 허공에 치솟은 은빛 늑대의 환영에 집중되는 순간.
“전쟁은 끝이다! 그리고 모든 오크는 오늘부로 악마추종자들의 흔적을 쫓아 놈들을 찢어 죽인다!! 우리의 명예를 위해!”
워로드 저릭의 목소리에 오크 전사들의 눈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붉게 달아올랐다.
들판에 강물처럼 흐르는 피와 다시금 붉게 물들어 버린 루덴스 강은 이미 오크 종족의 피해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런데, 이게 다 음모 때문이라고?
의심은 없었다.
대전사가 명예를 걸었는데, 그 어떤 오크가 감히 증거를 운운할까.
“우리의 명예를 위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들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
전투 민족 오크, 그 명예로운 투쟁의 역사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은 모든 오크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