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157화 (157/500)

157화. 고백 & Go back

‘됐어…….’

저릭의 도끼가 데스 나이트를 두 쪽 내는 것을 본 타이니는 부서진 망치를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무너졌다.

우당탕탕.

“타이니!”

“타이니 군!”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아련하게 들려왔지만, 더 이상 억지로 버티고 있을 의지력도, 그래야 할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해냈다.’

그 안도감과 함께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것은 싯누런 빛의 낯선 천장이었다.

“윽……!”

화들짝 놀라 몸을 움직이자마자 저릿한 통증이 전신을 내달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짜릿한 통증이 퍼짐으로써 전신에 감각이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

불구가 되거나 후유증이 남을 것 같진 않다는 직감이 바로 들었다.

그렇게 안심하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고.

“вдыклы цоыелкл КщвоылЕул!”

자신을 보고 눈이 커지더니 밖을 향해 냅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오크가 보였다.

덕분에 자신이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천막……. 하르하린 내부인가?’

후우우.

여기가 어디건 일단 필요한 것은 몸 상태부터 회복하는 것.

드러난 팔만 봐도 온통 푸르죽죽한 것이, 마치 사람이 아닌 시체의 팔 같았다.

그나마 전투 때보다는 확연히 나아진 것이 보이는 게 다행이었다. 아마 이 또한 염체의 공능 덕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우우웅.

마치 그에 반박하듯 어깨 갑옷이 작은 떨림을 만들어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

착용감이 없다시피 해서 이제는 한 몸처럼 느껴지는 어깨 갑옷, 초월무구 아니무스.

기절한 사람의 어깨에 갑옷이 그대로 장비되어 있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초월무구에 쉽게 손을 댈 수는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아니무스로 인해 강화된 육체와 영혼의 힘이 몸과 마나를 회복시키는 일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그가 의식을 되찾고 나서 직접 회복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빨리 몸부터 고쳐야지.’

스아아아아.

의지가 일어나는 즉시, 주변의 마나가 폭풍처럼 모여들며 바닥나 있던 마나를 빠른 속도로 채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짜릿짜릿한 통증이 일어나며, 내부에서부터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

이전에 검제와의 수련이나 갖가지 사건으로 다쳤을 때에 비해서도 말도 안 되게 빠른 회복 속도였다.

마치 언젠가 가렌이 가져다준 값비싼 고급 포션을 먹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지금은 약효가 아니라.

우웅.

한 단계 성장한 마나 바디, 염체의 힘이 그만큼 회복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제 어지간한 경우라면 포션도 필요 없겠어.’

염체의 힘뿐만 아니라, 영혼의 힘 또한 한몫을 하고 있었다.

정령술로 인해 질적으로 도약한 데다 아니무스의 힘으로 더욱 고양되기까지 한 영혼이 마나뿐만 아니라 육체의 회복력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정신이 육체를 지탱한다는 말이 이런 걸 뜻하는 거였나.’

이대로 더욱 영혼의 힘이 강력해진다면, 말 그대로 몸이 완전히 박살이 나지 않는 한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걸 전생에도 알았다면…….’

또다시 드는 아쉬움을 쓴웃음으로 삼키고 천천히 눈을 떴다.

벌써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이 되었으니 움직여 볼 생각이었는데.

턱.

“아직, 쉬어야, 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를 잡는 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옅은 보라색 긴 머리카락에 자수정 빛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 보였다.

“사신…….”

자연히 눈이 부릅떠지는데, 살짝 인상을 찡그린 그녀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사신, 아니야. 누나, 타이니. 너, 안 죽었어.”

“아…….”

그때야 비로소 전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다가도, 지금 그녀의 말은 다시금 그의 양심을 쿡쿡 찔러 왔다.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당장은 호기심이 먼저였다.

“……누님.”

“응.”

“어째서 여기에 온 거요?”

“너 때문에.”

“뭐요?”

“네가, 내 맹세 기간, 줄였다. 황제, 너 도우라 했다. 이제 자유.”

“아…….”

사신 루나 모르스 특유의 끊어 읽는 듯한 어색한 말투였지만,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본래는 내가, 가문을 다시, 세우려 했어. 하지만 이제, 안 해도 돼.”

“……엥?”

“가문 잇는 거, 원래 남자의 의무, 나는 자유. 그러니 부탁해, 타이니.”

이어지는 사신의 말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 아니. 그게 왜……?!”

“그림자의 법, 내가 전수, 너는 결혼해서, 자식만 낳아. 광휘의 기사. 딱 좋아.”

“뭐, 뭐가 좋다고?”

당혹감에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오는데.

“암살자의 가문을, 귀족으로 만든 조상님, 지금 너의 이름, 그때 조상님 못지않아. 뿌듯해.”

사신, 아니 루나는 그 말과 함께 진심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전생에서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미소에 일순간 멍해지는 것도 잠시.

‘……이건 너무 갔다.’

타이니는 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솔직히 말하고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누님, 솔직히 고백할 것이 있소.”

“응?”

“그게…….”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상황이 급해서 속일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을 이해해 줄까?’

사신이라는 전생의 끔찍한 이명과는 달리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자수정 빛 눈동자에, 타이니는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오크와 잘생긴 인간 기사가 그 대화를 끊어 버렸다.

“여어. 드디어 깨어났구나, 잠꾸러기. 인간의 영웅.”

“타이니 경, 드디어 일어났군요.”

동시에 말을 꺼낸 제나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서는 동안, 저릭은 그런 그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현생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조금 차이가 느껴지는 기세.

그에 타이니는 그가 드디어 벽을 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러유저를 넘은 오러익시더(Aura exceeder)의 경지.

‘아직 초입이긴 하지만.’

전생의 저릭 역시 자신을 만난 후에나 그 벽을 깼고, 말세의 전쟁을 겪으며 조금씩 숙련을 쌓아 나갔었다.

달리 말해 전생에 비해 20년은 빨리 발전했다는 것이니, 자연스레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 성과였다.

“신세를 졌다, 타이니. 자칫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 악마에게 홀린 놈이 오크족에서 나오다니. 그 망할 놈…….”

“그 족장, 네르 뭐시기인가 하는 놈은 어찌 되었습니까?”

“음? 네르구이? 그놈이야 당연히 죽었지. 조금 찜찜한 말을 남기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요?”

“그게…….”

저릭은 잠시 네르구이의 최후를 떠올렸다.

- 대전사 제도가 ‘전사의 혼’을 잃게 만들었다. 그 제도를 만든 ‘아고-칸’이 우리 오크 종족 전체를 답보하게 만든 거야!! 저릭, 네놈 같은 대전사가 없어야……!!

아마 죽어 가는 놈이 한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악마에게 혼을 판 놈이기까지 하니 틀림없다.

하지만 그 말에는 민감한 종족의 역사가 들어가 있었으니.

“……흐, 오크가 아닌 이는 굳이 알 필요가 없는 말이다.”

그는 인상을 찡그린 타이니가 더 이상 캐묻기 전에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전장에서는 잘도 반말을 하더니, 왜 이제 와 새삼 존대인가? 내가 공용어 똑바로 이해하고 있는 거 맞나?”

명백히 자신이 실수한 부분을 저릭이 짚고 들어오자 타이니 역시 더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전생에 친구였다고 해도 지금은 연배도, 지위도 자신이 맞먹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 저릭이었으니까.

“……그게, 전투에서는 급하다 보니까. 하하.”

그저 어색하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하하, 괜찮다.”

저릭이 피식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그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윽!?”

아직 나 환자거든!?

“뭐, 됐다. 큰 신세를 졌고, 그대의 용기와 실력은 지난 전투로 충분히 확인했다. 나 저릭, 인간족 영웅의 용맹에 감탄했다. 존대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우린 친구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제나스가 황당한 얼굴로 저릭을 바라보았지만, 타이니로서는 피식 실소가 나오는 말이었다.

‘그래. 이것도 저릭답지.’

자신의 지위나 체면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과 말.

가끔 느닷없이 똥고집을 부릴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호쾌하고 호탕한 친구였으니까.

타이니는 서슴없이 저릭의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그러지, 친구.”

“타이니 경! 지금……!?”

제나스가 당황한 얼굴로 고함을 지르고, 사신이 왜인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사소한 예의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야 전사지.”

저릭의 말에 제나스의 은빛 눈썹이 불쾌한 듯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그도 분위기를 아는 듯 굳이 태클을 걸지 않고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린 듯한 상황에 새삼 안심이 되는데,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무언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뭔가…… 잊고 있는 거 같은데?’

좀 전에 루나 모르스와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무언가…….’

타이니가 갑작스레 표정을 굳히며 생각에 잠기자, 저릭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무언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인간들끼리 할 말도 있겠지. 내가 자리를 비켜 주겠네.”

그렇게 저릭이 슬쩍 돌아서는 순간, 제나스가 바로 잔소리를 쏟아 냈다.

“타이니 군! 이젠 무모한 짓 좀 삼가해 주세요. 각하께서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아세요? 밖에 있는 드렉슬러 경도…….”

하지만 타이니가 바로 그 말을 끊어 냈다.

“잠깐, 잠깐만요, 제나스 경.”

“……기? 음?”

“죄송합니다, 제나스 경. 저릭!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무조건 네가 들어야 할 이야기다. 죄송하지만 다른 분들은 자리를 좀 비워 줬으면 합니다.”

타이니가 눈빛으로 제나스와 루나에게 양해를 구하는데.

“응, 알겠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사라지는 루나와 달리 제나스는 ‘아!’ 하는 눈빛으로 그와 저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그 이야기를 하려고…….”

“아십니까, 제나스 경?”

“각하께 들었습니다. 아, 물론 저까지만 알고 있는 일이니, 뒷일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타이니 군.”

그가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니, 검제가 결국 제나스에게 진실을 말해 준 듯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위험해지는 이야기지만, 제나스라면…….

“……뭐, 그건 나중에 따로 얘기하시죠.”

“흠. 그래요, 그럼.”

제나스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자.

“무슨 얘기를 하려고?”

흉악한 인상 탓에 오히려 무섭게만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저릭이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잘 들어, 저릭. 믿기지 않겠지만, 미래의 이야기다. 우리가 겪었고, 또 극복해 나가야 할 이야기.”

“무슨 소리지?”

영문 모를 소리에 저릭의 미간이 찌푸려지는데.

“그게…….”

타이니의 말은 그로부터 길고도 길게 이어졌다.

저녁 무렵 시작된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에는 어느덧 짙은 어둠이 깔린 세상을 달빛이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야기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오크족의 몰락을 막으려고. 믿을 수 있겠나?”

타이니가 복잡한 눈빛으로 저릭을 바라보는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머리를 부여잡으며 끙끙대던 오크 대전사가 킁 하고 콧김을 내뿜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가 친구가 아니라 그냥 인간의 영웅이었다면, 지어낸 이야기라 생각했을 거다.”

긍정적인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저릭이 가슴을 팡팡 치며 호기롭게 말을 보탰다.

“하지만 친구의 말이니까 이제는 믿는다.”

이 단순한 새끼, 고맙다.

하지만 저릭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네 이야기 속의 내 말들, 전부 내가 했을 만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네가 뜬금없이 우리를 도왔던 이유도 납득이 된다, 친구.”

“목적이 있어 도왔다는데도 친구인가?”

“우리 종족의 저력을 보존하기 위한 게 아니었나. 그러니 오크의 대전사로서도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친구가 맞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저릭의 태도는 낯설면서도 친근했다.

하지만 동시에 타이니는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내 찜찜했던 이유를 번뜩 깨달았다.

“아! 이런!!?”

“음??”

“저릭! 너 지금 남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멈추라고 했어!?”

“……그거야, 네르구이가 죽었으니 알아서 멈추지 않겠나?”

역시 이 녀석도 오크는 오크다, 빌어먹을!

“젠장! 네르구이 옆에는 악마추종자들이 있다! 지금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 거야! 당장 멈추라고 해야 해!!”

뒤늦은 깨달음에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저릭의 눈동자 역시 순간적으로 부릅떠졌다.

“젠장, 통신구 없지?! 빌어먹을, 왜 오크 주술은……!”

“내가 직접 가겠다.”

“나도!”

대화는 그렇게 순식간에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달이 중천에 떠오른 밤, 그 다급한 결정은 원군으로 온 루나와 제나스에게까지 전해졌다.

“폐하의 명령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대장. 더 이상 오크의 전쟁에 끼어드는 것은…….”

“너희들은, 돌아가. 난 동생을, 따라갈, 테니까. 알지? 폐하께서, 이 임무를, 끝으로, 내 자유를, 약속하신 거.”

“……동생?”

그림자 부대장은 지시보다 호칭에 의문을 표했지만, 루나는 설명해 주지 않았고.

제나스 역시 혼자서 타이니의 뒤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드렉슬러 경, 다른 기사들과 함께 먼저 돌아가세요.”

“단장님!”

“오크들 부족 전쟁에 본격적으로 끼어드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따라갔다가 한 명이라도 정체가 들킨다면, 각하께서도 수습 못 하실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알지 않습니까?”

다음날 새벽.

하르하린의 남문으로 뛰쳐나간 오크의 대전사와 인간의 기사들이 미친 듯이 남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