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전투의 끝
타이니가 자신의 애병이 박살 나는 것을 감수한 성과는 분명히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데스 나이트 중 하나의 해골마가 그대로 분쇄되어 사라졌다는 것.
그로 인해 가장 막강한 괴물 한 놈의 전투력이 크게 감소했다는 것은 분명 충분한 성과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변수가 있었다.
바로 데스 나이트가 충돌과 함께 날려 버린 스탬프.
충격파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그 파편들이 네르구이에게 쏟아진 것이다.
그것도 암흑 오러까지 어느 정도 상쇄시켰던 무식한 파괴의 힘을 일부 실은 채로.
물론 일순간 끌어 올린 마기로 대부분은 막아 냈지만, 그중 몇 개의 파편이 하필 그의 두 눈을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아악!”
두 데스 나이트와 함께 저릭을 압박하던 네르구이였지만, 실상 직접 무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중요한 그의 역할은 주변의 모든 오크 전사들을 통제하는 암흑 주술의 주체.
한데 졸지에 중상을 입고 나뒹구는 바람에, 네르구이는 본능적으로 유지하던 암흑 주술의 통제까지 놓아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캬아아악!”
“크롸!!”
“цткво!!”
“ул цтквг йоадкзЕул!”
방해꾼들도 애써 뿌리쳐 가며 무작정 저릭을 향해 달려들려던 오크 전사들이, 이젠 주변의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적의 토템(?)이 박살 나고, 신경을 분산시키는 적군도 급감했으며, 강적 중 하나의 전투력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저릭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으니.
쾅!
쿨럭.
“젠장!”
콰아앙!
피를 한 움큼 토해 낸 저릭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결코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어.’
까득.
오러와 비슷한 힘을 다루는 것을 보면 분명 초인급이기는 했지만, 그에 걸맞은 영혼의 격이 느껴지지 않는 데다 이성의 빛도 보이지 않는 적들이었으니까.
거기다 힘과 속도, 기술적 역량도 자신이 한 수 위.
결코 상대가 될 리 없다 생각했다.
그래. 어느새 몸 안에 스며들어 마나의 흐름을 잠식하는 이 더러운 기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꼬마가 경고한 게 이런 거였나?’
금세 견적이 나오길래 간과했던 충고가 너무나도 뼈아프게 다가왔다.
몇 합 주고받았을 때부터 조금씩 이상이 느껴지긴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나가 흐트러졌고, 그에 따라 꼬인 오러 때문에 일격을 당한 후부터는 계속 밀리고 있었다. 자신의 마나를 파고드는 기묘한 기운들이 계속해서 정상적인 마나의 움직임을 방해한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곧 오러의 발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고, 그런 상태로 자신과 같은 초인급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돕겠습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존대와 함께 적들의 사각을 파고드는 시리도록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의 마나 블레이드와 함께.
챙!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적들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요상한 수법을 쓰는 인영이 그를 돕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둘 다 인간으로 보이는 데다가 챌린저급 강자.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콰아아앙!
억지로 쥐어짜 낸 오러로 다시 데스 나이트 두 놈을 밀어 냈다.
저 검은 기운이 타이니가 말한 암흑 ‘오러’라면, 챌린저급 조력자들은 그것을 절대 감당하지 못한다.
‘정면으로 상대하면 일격에 사망, 혹은 전투 불능이 되겠지.’
좀 전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데스 나이트 한 놈의 말을 역소환시킨 타이니 녀석이 예외적인 것.
결국 놈들의 공세를 막으면서 결정타를 때리는 것은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이 밀어 낸 데스 나이트 뒤에서 튀어나와 넘실거리는 암흑 오러 사이의 빈틈만 찔러 대는 복면인과, 데스 나이트와 해골마의 다리 부분만을 얼어붙게 만드는 기사.
그들 역시 스스로 상대와의 역량 차이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듯, 철저히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둘 다 특수한 속성력을 다루는 데다가 속도에 특화된 듯한 강자들이었기에 그것은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 방해자!
- 죽인다!
콰아아아앙!
타이니가 갑작스레 뒤를 덮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순간에도 반응조차 하지 않고 자신만 노리던 놈들이 결국 그들에게로 칼끝을 돌릴 정도였다.
당장은 자신보다 그들이 더 위험하다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이 저릭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수십 년간 느껴 본 적 없던 열패감.
“이것들이!!!”
적들에게 화를 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에 가까웠다.
고작 이런 것들도 한 번에 박살 내지 못하면서 그렇게 드높은 자부심을 가졌던가.
그렇게 콧대를 높였던가.
‘너무나도 한심하구나, 저릭. 고작 이런 꼴을 보려고 고행을 자처했던가.’
율법에 대한 신념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억누르고 있던, 어떤 오크보다 강렬한 투쟁심이 그 순간 폭발했다.
“크아아아아악!”
저릭의 작고 노란 눈이 투기로 붉게 물드는 순간.
이성을 초월해 버린 본능은 일정 패턴을 그리며 오러를 생성하던 짧은 과정 전체를 생략한 채 오직 의지만으로 파괴의 권능, 오러를 생성해 냈다.
몸속을 헤집던 암흑 오러의 잔재는 더 이상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뻗어 나가는 은빛의 오러는 그의 이성이 온전할 때보다 훨씬 더 밝게 빛나고, 크고, 강렬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 밴 전투법은 그 힘을 고스란히 살리며 적들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저릭식 도끼 살법, 보름달 가르기.
번쩍.
대낮의 평원에 은빛의 달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위기감을 느낀 듯 그 거대한 보름달의 범위 안에 갇힌 두 데스 나이트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기가 솟구쳤다.
그리고 이내.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릉.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폭음과 함께 퍼져 나가는 충격파와 흩날리는 흙먼지.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저릭의 감각은 두 데스 나이트 중 하나의 육체가 완전히 가루가 되고 남은 한 놈의 해골마가 그대로 분해되는 것을 포착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미 바닥이 난 체력과 마나는 그 이상의 힘을 허락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여력을 빠르게 해소한 데스 나이트 한 기가 그대로 돌진해 오며 암흑 오러가 담긴 장창을 찔러 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저릭은 일순간 몸속이 텅 빈 것 같은 탈력감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흐…….’
최근 십여 년간 정체해 있던 벽을 넘어 마침내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기쁨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눈앞에 보이는 검은 갑옷, 그 투구 안에서 빛나는 두 개의 푸른 불꽃.
그리고 가볍게, 하지만 또 무겁게 찔러 넣은 재질을 알 수 없는 검은 창의 끝에서 암흑 오러가 튀어나오는 것까지.
마치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듯, 그 짧은 순간 장면 하나하나가 또렷이 파악되며 세상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힘이 다해 버린 몸은 의식을 따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서 요동치는, 눌러 놓았던 암흑 오러의 힘만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질 뿐.
‘이것이 나의 끝인가?’
원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덤덤하기도 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에 스스로를 관조해 보니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전장에서의 실수가 한스러웠지만,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기 때문.
그리고 그 복잡한 마음은 금세 한쪽으로 기울었다.
‘치열하게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다가오는 창끝, 암흑 오러의 섬뜩한 빛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오크 전사의 정점에 선 자답게 늙어서 침대에서 죽기보단 싸우다 전장에서 죽기를 바라 왔던 터.
지금으로선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상신들이시여, 나를 받아 주소서.’
탈속한 마음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리는데, 그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갑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검은 머리 인간이 보였다.
‘음?’
자루만 남은 무기에 괴상한 검은 구체를 달아 놓은 듯한 것을 휘두르며 암흑 오러를 막아 내는 모습.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흘깃 뒤를 돌아보는 인간의 눈빛은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는 듯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녀석의 입술, 쉽게 읽히는 단어들.
‘지금, 웃음이, 나와? X신 새…….’
……뭐 이 새끼야!?
일순간 솟구친 분노가 마음의 평정을 깨 버린 순간.
쩌어어어어엉!
우우우우우웅.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요란한 소음과 격렬한 진동이 느려진 세상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렸다.
- 죽인다. 목표. 죽인다. 방해자.
그그그그극.
살벌한 영파를 내보이며 전진하려는 데스 나이트와 그 앞을 막아선 타이니.
“너 지금 뭐…….”
괴물과 인간이 정면으로 맞붙은 그 광경이 너무도 기괴하여, 저릭은 순간 하려던 말도 까먹고 말았다.
위협적으로 휘둘러진 데스 나이트의 창끝이 타이니의 이상한 검은 구체를 꿰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오러는 아닌데.
“……대체 어떻게?!”
그 황당한 눈길을 받은 타이니는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피를 토해 냈다.
그리고.
“정신 차리고 암흑 오러나 몰아내!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이 X신 똥고집쟁이가……!!”
또 반말에 쌍욕까지 퍼붓는다.
저릭은 다시 울컥했지만, 그 말을 하느라 일순간 집중이 흐트러진 타이니의 몸이 자신의 코앞까지 밀려나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오, 오래는 못 버텨!!”
쿨럭.
또다시 피를 토해 내는 타이니.
가만히 보니 놈의 몸 상태도 엉망인 게 눈에 들어왔다.
갑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온통 검푸른 멍으로 뒤덮여서 마치 혈관이 모조리 터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인 데다가, 연신 피를 토해 낸 탓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러를 막아선 저 이상한 구체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인간의 ‘영웅’은 저 꼴이 되어서도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데, 오크의 대전사인 자신은 이렇게 넋을 놓고 있었다니.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다니.
‘부끄럽구나.’
또다시 밀려드는 자괴감 속에서, 저릭은 황급히 주변과 몸속의 마나를 컨트롤하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도, 영혼의 격이 올라서면서 암흑 오러를 몰아내기 한결 쉬워졌고.
- 죽어. 죽어. 죽어.
끊임없이 타이니를 밀어붙이는 눈앞의 데스 나이트는 이성이 없는 괴물에 불과했다.
타이니와 그의 몸이 일직선상에 있는 데다가 타이니가 점차 무너져 가고 있으니, 창의 방향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다.’
우우우웅.
급격하게 통제된 마나가 암흑 오러를 밀어 내자 조금씩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 돼, 너무 느려. 젠장!’
바로 앞에서 타이니의 힘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에 비해, 자신의 회복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저릭이 당황하던 찰나.
쩌어억.
데스 나이트의 투구 아래 목 부분에서 검은 그림자를 휘감은 단검이 튀어나오고.
“차아압!”
흔들리는 괴물의 허리춤에서 푸른 은빛의 마나 블레이드가 솟구쳐 올랐다.
쩌저적.
- 방해!
투구 속 푸른 불빛이 확연히 약해지고 하반신에 살얼음이 끼자, 데스 나이트의 창끝이 등 뒤의 습격자들을 향해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쿨럭.
“어딜 보냐!”
피를 토해 낸 타이니 역시 이를 악물며 검은 구체가 달린, 자루만 남은 무기를 휘둘렀다.
- 죽어!
암흑 오러가 재차 사방으로 퍼지는 순간.
그 궤도를 피해 낸 푸른 은빛의 마나 블레이드와 검은 단검이 다시 데스 나이트의 약점을 파고들고, 타이니의 검은 구체가 그들을 덮치는 데스 나이트의 암흑 오러를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앙!
- 주, 죽여어어 버리……!
짧은 순간 연달아 큰 타격을 입은 데스 나이트의 입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실린 듯한 영파가 울려 퍼질 때.
“끝이다!”
쩌어어어억.
다시금 은빛의 오러를 머금은 도끼가 호쾌한 고함과 함께 데스 나이트의 몸을 세로로 완벽하게 갈라 냈다.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평원 전투가 끝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