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데스 나이트
“이건 또 뭔……!”
보통의 마기와는 사뭇 다른 진득한 어둠이 묻어 나오는 거대한 대검과 장창.
그 무기를 휘두르며 저릭을 막아선 것은 검은 갑옷을 두른 채 뼈다귀 말을 탄 기사, 아니 괴물들이었다.
덩치도 조금씩 다른 데다 각각 대검과 장창을 들고 있어서 확연히 구별되지만, 묘하게 똑같아 보이기도 하는 검은 기사들.
투구 안에서 넘실거리는 어둡고 푸른 불꽃은 주변으로 어둠의 오러를 퍼트리며 끊임없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어디선가 들어 본 거 같다만.’
저릭은 그 기억을 들추기보단 그저 분노를 토해 내는 데에 집중했다.
“……개뼈다귀들이!!”
콰아아앙!
그러나 은빛 오러가 검은 어둠의 빛과 충돌하는 순간, 오히려 주르륵 밀려나는 것은 그였다.
“엿 같은!”
퉤.
그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충격을 억지로 잠재우며 옅은 핏물을 토해 내는데.
“……데스 나이트!? 어떻게 벌써!?”
놀란 음성과 함께, 거대한 늑대를 탄 타이니가 그의 옆에 착지했다.
“타이니, 아는 괴물들이냐?”
“들어만 봤다. 마계 5군단, 언데드 병단의 최정예들. 너도 들어 봤을 텐데? 고대의 기록에 대해.”
“마계? 아……!”
그제야 저릭도 선대 대전사에게 들었던 지식의 일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고대 마계 대전에 관한 내용들이 어렴풋이 생각난 것이다.
다만.
“그게 진짜였다고?”
“그럼 마역이나 대미궁이 왜 있는 것 같은데? 엉!?”
인간 친구가 대뜸 신경질적으로 나오는데도 저릭은 차마 호통을 치지 못했다.
왜인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괴물들 앞에서 자중지란을 벌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타이니의 태도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너, 말이 짧아졌다? 그것도 많이?”
그에 놈들을 경계하면서도 기어코 한마디 던졌는데.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야! 어째서 초인급 마족들이 벌써 세상에 나타났는지가 문제지!”
“……그러냐. 끙.”
저릭은 타이니의 날 선 반응에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는 찌그러지듯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타이니는, 정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초인급부터는 소환도 안 되는 게 정상인데. 저번에 그 마수도 그렇고, 설마 벌써 강림……. 아니, 아니야. 그랬으면 이미 난리가 났겠지.’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과 경험이, 눈앞의 데스 나이트 두 기로 인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 상황에서.
“초인급 마족이라면, 뭐 마계 대공 최측근 같은 거라도 되나?”
저릭은 나름대로 주워들은 것이 생각났는지 헛소리를 보태고 있었다.
물론 어설프게 아는 것은 모르느니만 못한 것이니.
“최측근은 무슨! 간부도 못 되는 군단의 최정예일 뿐이다!! 그래도 똑바로 경계해! 지금 네 녀석에게는 둘도 버거울 테니까!!”
타이니로선 신경질적인 타박을 돌려줄 뿐이었다.
“너,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고 해도 너무 맞먹는데…….”
“닥치고 앞이나 보라니까!”
“……그래. 끝나고 보자, 꼬마야.”
똥고집쟁이가 뒤끝이 무성한 말을 남겼지만, 타이니는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고, 공격해! 왜 가만히 있는 건데! 너, 너! 날 도우러 왔으면 놈들을 처리해야지! 어서!”
네르구이라는 저 타락한 오크는 좀 맛이 간 것 같지만.
‘왜 안 움직이지? 왜?’
투구 속 푸른 불꽃이 잔잔하게 넘실거릴 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데스 나이트들의 태도가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차츰 이성을 되찾고 보니.
‘컹!’
월랑이 알려 준 것처럼, 놈들의 빈약한 혼이 느껴졌다.
‘초인급 괴물의 혼이 왜 저렇게 희미하지?’
의외의 상황에 눈이 가늘어지던 그때, 놈들의 투구 안으로 흐릿한 마기 덩어리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아니라면 느끼기도 힘들 정도로 미약하게 살랑거리는 마기 덩어리.
‘설마?’
그것의 정체가 바람 속성을 다스리는 소서러 혹은 고위 마법사가 구사한다는 메시지 마법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 적을!
- 죽인다!
귀가 아니라 뇌리로 파고드는 으스스한 음성과 함께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솟구치는 강렬하고 진한 어둠, 시커먼 빛으로 번들거리는 응축된 마기가 데스 나이트들의 전신에서 솟구쳤다.
“그래, 그래야지!”
그에 네르구이가 반색하고.
“빌어먹을, 저것들 대체 뭐야!?”
저릭이 욕설을 내뱉는 순간.
타이니의 얼굴에는 슬쩍 화색이 돌았다.
“다행이다!”
“뭐?”
“정상적인 데스 나이트가 아니야!”
언데드 군단에 대해서는 자료로밖에 접해 보지 못했지만, 간부급 바로 아래인 마계 군단의 최정예 마족이 이성도 없는 괴물일 리는 없었다.
즉,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지금 놈들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러니.
“저릭, 뒤를 부탁한다!!”
“뭐, 인마!?”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는 친구의 서늘한 살기가 자신을 덮쳐 오는데.
“암흑 오러는 마나를 변질시킨다! 그것을 조심해!!”
타이니는 그 말을 남겨 놓고는 월랑을 움직여 순식간에 그 전장을 이탈했다.
“야! 인마!!!”
콰아아아앙!
저릭의 단말마 같은 고함과 함께 다시금 폭음이 울리기 시작할 때.
타이니는 감각을 곤두세운 채 조금 전 메시지 마법 같은 게 날아왔던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컹!”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수풀 너머, 묘하게 일렁이는 공간을 찾아냈다.
그리고 월랑의 소울 사이트는 그 안에 숨은 마기 덩어리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 * *
‘빌어먹을 똥멍청이들, 죄다 멍청이들뿐이야!’
1호는 타들어 가는 속을 가까스로 다스려 가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럴 만도 했다.
워로드가 바토르를 벗어나 홀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상황, 네르구이가 제대로 전력을 동원했다면 놈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 그가 데리고 온 것은 천여 기의 코뿔소 군단뿐.
아무리 전선이 치열하다 해도, 아무리 마기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고작 그 정도 전력으로 워로드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만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여간 무식한 오크 놈이 자존심만 세서.’
그것만 해도 한스러운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이후 전세는 얼추 균형을 찾아 갔다.
네르구이가 구사하는 흑마법과 주술의 결합, 즉 흑주술이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효과를 낸 덕분.
하지만 그것은 잠시 의외의 분전을 이끌었을 뿐, 결국 상황은 그가 예측한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만, 그 요인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광휘의 기사, 그 모르스 놈의 무력이 그의 상상을 뛰어넘은 것이다.
‘저게 잘해야 익스퍼트 아니면 블레이더급이라고?! 그분의 안목도 이제 맛이 갔…… 아, 아니지. 죄송합니다. 말이 헛, 아니 생각이 헛나왔습니다.’
이제는 8클래스의 아크 리치가 되었을 수장의 역량은 짐작도 가지 않는 터라, 혹시나 자신의 속마음을 읽었을까 싶어 두려웠다.
1호는 속으로 숨 가쁘게 사죄를 하면서도 또 갈등했다.
‘끼어들어? 말아?’
본래의 명대로라면, 그저 워로드가 떠나길 기다렸다가 모르스 놈을 죽이면 그만이다.
놈이 예상외의 무력을 보여 주긴 했지만 절대 초인급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자신은 몰라도 데스 나이트 두 기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뒀다가 네르구이가 죽는다면, 오크족의 대계도 망가진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임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엄연한 조직의 목표다.
그리고 만약 그 계획이 어긋나기 직전 자신의 조력으로 바로잡는다면?
‘그분께서 나를 다시 봐 주시겠지. 그럼 나도 어쩌면 고위 마족이 될 수도…….’
치솟은 욕심이 좁쌀만 한 배포를 이겨 낸 순간.
1호는 바로 데스 나이트들을 돌격시켰다.
“워로드를, 저 오크 놈을 막아라!”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다. 당장은 네르구이가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마나와 마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생명체의 말로야 뻔하니까.
놈의 힘이 다하기 전에 워로드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해골마를 소환하여 유령처럼 달려 나간 데스 나이트들의 이후 행보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 콰아아아아아아앙!
공격을 잘 막아 놓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지만, 이내 어찌 된 일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막으라고 했다고, 정말 막기만 해!?”
혹시나 그사이에 워로드가 무슨 수를 쓸까 다급한 마음에, 재빨리 다음 명령을 전달하려 했다.
긴장한 탓인지 간단한 메시지 마법이 몇 번 흐트러졌지만, 왜인지 적들도 움직이지 않아 준 덕에 다행스레 제때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다.
- 워로드를 죽여라!
그리고 네르구이에게도.
- 말룸의 뜻을 전한다! 데스 나이트들을 보조해 워로드를 죽여라! 이 자리에서! 반드시!!
확고한 뜻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마법이 온전히 전달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식은땀을 닦던 그때.
갑자기 모르스 놈이 번개처럼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놈의 모습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확대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무서운 기세.
“서, 설마……!?”
불길한 예감에 절로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 찾았다!!!
놈이 휘두른 망치에 결계가 그대로 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들려오는 고함.
“뒈질 시간이다, 쓰레기!”
눈앞으로 쇄도하는 워해머, 노을빛 마나가 이글거리는 흉기를 보며 그는 황급히 마기를 끌어 올렸다.
꽈아아아앙!
“커흑!”
피를 토하면서도 버티는 흑마법사를 보며, 타이니는 이를 갈았다.
“그래, 쉽게 죽지는 않겠지!”
월랑의 감각에 느껴지는 마기의 서클은 모두 6개.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다.
한 방에 끝났다면 오히려 무슨 속임수가 있진 않은지 찾아봐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내.
“죽어!!!!”
여전히 자신의 특성 따위는 모르는 듯 머릿속을 파고들려 하는 음습한 기운을 감지한 순간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더러운 기운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저주라니.’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 저주 따위는 노력이라 할 것도 없이 가볍게 떨쳐 내고.
“너나 죽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거리를 좁힌 뒤, 가차 없이 스탬프를 휘둘렀다.
뒤늦게나마 검은 방어막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지만.
꽈아아아앙!
그것이 놈을 지켜 줄 수는 없었다.
‘됐다! 조종하는 놈을 처치했어!’
자신도 모르게 꽉 쥔 주먹을 허공을 향해 날리는데.
- 꽝!
- 콰콰쾅!
번쩍.
- 쾅!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보아 격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끄, 끄륵. 너, 늦었…… 명령은 끝, 워, 워로드는 죽는다. 내, 내 공로…….”
복부가 아예 터져 나간 채로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흑마법사의 눈.
그 허탈한 독백이 그의 귀를 사로잡고.
- вдкревд ыз фтуойвдул, цоадк!!(이곳이 네 무덤이다, 저릭!!)
뜻은 알 수 없지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맛이 간 줄 알았던 네르구이의 목소리가 불길한 예감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다시금 저릭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는 코뿔소 군단과 살아남은 오크 전사들의 모습, 여전히 멈추지 않고 저릭의 공세를 받아 내고 있는 검은 오러들…….
그 모든 것이 그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젠장! 저릭!!”
아무래도 이번 역시 곱게 넘어가긴 글러 버린 듯했다.
이를 악문 타이니의 의지에 따라 월랑이 떠나온 전장을 향해 다시금 쏜살같이 돌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가 있는 반대 방향, 즉 전장의 동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는 것이 보인 것이다.
그 선두에는 은빛과 푸른빛이 섞여 빛나는 말 한 마리와 대낮의 빛을 모조리 흡수할 것처럼 새까만 말 한 마리가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귓가를 파고드는 익숙한 음성들.
- 누나, 왔어. 도울게.
- 타이니 군, 우리가 도울 겁니다. 아직 안 늦었죠?
반가운 마음에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전해야 하는바, 다만 바람이나 그림자를 다룰 재주가 없는 그로선 우렁찬 목소리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워로드를 도와!!!!!”
쩌렁쩌렁한 고함을 전방을 향해 내지르면서 최대한의 속도로 저릭을 향해 내달렸다.
그 와중에 옆의 진형부터 무너지는 오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안심이었을까.
쾅!!
“흡!”
정작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야 할 당사자, 저릭의 거대한 덩치가 공깃돌처럼 튕겨 나가는 광경이 보였다.
쿨럭.
“흐, 빌어먹을!”
그리고 그가 피를 토해 낸 순간에는 타이니의 눈이 부릅떠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