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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52화 (152/500)

152화. 하르하린 격전

자의와 상관없이 마족에게 제물로 바쳐진 이들의 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선량한 피해자니까 천상계로? 아니면 바쳐진 제물이니까 마계로?

그에 대한 답은 이미 고대에 나왔다.

- 타의로 바쳐진 제물은 그 생명력과 운명력(Karma)만을 악마에게 바치니, 그 혼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한다.

고대의 대마법사들이 내린 결론.

오러마스터 혹은 9서클의 초마도사나 다룬다는 운명력(Karma)에 대해서는 전해 오는 해석이 각기 다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과 신전은 그 결론을 이렇게 해석했다.

- 착하게 살면 마족에게 잡혀가도 천국에 갈 수 있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해석은 달랐다.

마학적으로 명확히 말하자면, ‘있어야 할 곳’이란 이곳 중간계를 의미한다는 것.

중간계의 운명에 속한 자가 타 차원의 존재에 의해 강제로 생명을 빼앗기면 그들의 혼은 그 자리에 남는다.

물론 그 말은 생명을 잃은 자들이 영체 몬스터로 분류되는 고스트(Ghost)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나나 마기가 변질된 그런 괴물과 달리, 자아를 갖춘 고위 생물의 근본인 영혼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본래의 세상에 여전히 속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들이 그 고통과 한을 잊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까지 잠시간 머문다고 하던가?’

물론 그 후에 다시 자신이 살아온 업(業, Karma)의 흔적에 따라 천상 혹은 마계로 흘러간다고 하니, 크게 보면 신전의 해석과 거의 다를 게 없기도 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해석에서 조금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강제로 희생된 자들 중에 강력한 영혼은 생각보다 오랜 기간 자신이 죽은 자리에 남아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지박령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순수한 영혼을 보거나 다룰 수 있는 건 전설에 나오는 오러마스터급 이상의 영웅들이나 그에 준하는 대주술사뿐.

흑마법사들이 쓴다는 영혼을 속박하는 저주라는 것 또한 알고 보면 뇌에 간섭하는 마법에 불과하다.

‘물론 대흑마법사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존재들이었기에 보통의 마법사들은 그 가설을 증명하지 못했다.

타이니도 그저 아르곤에게 들었던 흥미로운 옛이야기 정도였는데, 지금 그 이야기가 떠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그 가설을 본의 아니게 증명하는 것을 넘어, 직접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 인간, 인간인가.

- 족장…….

- 네르구이에게 저주를…….

- 놈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 알려 다오, 동족들에게.

‘컹!’

바로 월랑의 능력 덕에 영혼들이 보이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 놈이 우리를 독으로 제압한 뒤 흑마법의 제물로 바쳤다!

하르하린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천막, 그 구석에 남겨진 영혼들.

마족에게 바쳐진 이들의 영혼을 직접 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 타이니도 잠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같이 천막으로 들어온 저릭이 다시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에 뭐가 있다고?”

그가 화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 있게 따라오라고 해서 천막에 들어왔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악마들에게 바쳐진 영혼들입니다.”

“뭐야!?”

그 말을 듣자마자 저릭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그의 전신에서 사나운 기세가 솟구쳤다.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며 그가 느낀 분노를 여실히 표현했다.

‘그래. 헛소리 같겠지.’

타이니의 심정 역시 그와 비슷했다.

‘이건 증거가 안 되니까.’

처음에 월랑이 반응을 보였을 때는 마기를 감지한 줄 알았는데, 그 누구에게도 증명하지 못할 영혼뿐이라니.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영혼들은 족장이, 네르구이가 자신들을 흑마법의 제물로 바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입술을 깨무는데, 예상외로 저릭은 화를 내지 않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증명할 수 있나?”

……설마 이 말을 믿어 준다고?

‘왜?’

당혹스러웠지만 답변은 바로 나왔다.

“그게,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정령의 힘이라서…….”

자신이 없는 만큼 목소리가 흐려졌지만, 이내 번뜩이는 영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이들의 이름은 다 알 수 있습니다. 얼핏 들리는 이름만 해도 ‘다와’, ‘사른’, ‘체첵’……. 혹시 이들을 아는 사람들이 여기 남아 있지 않을까요? 가족이라든가 가까운 이들만 아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면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물증이 없다면 대질 신문을 하면 되지 않는가.

“……해 볼 만한 일이군.”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았던 저릭은 이번에도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은 꽤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마, 맞습니다! 다와 님을 비롯한 그분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제히 사라진 적이 있습니다. 족장님은 파견 근무라고만 하셨는데…….”

“저희 딸 이름, 저희만 아는 사연……. 마, 맞습니다. 딸아이가 말없이 사라져서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으흐흑. 대전사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제 습관…… 저희 아버지의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저와 아버지만 아는 비밀이었는데?”

영혼의 말을 전달받은 오크들이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저릭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영혼들의 존재는 이로써 증명이 되었다.

물론 그 영혼들의 대변인이 나중에 말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악마추종자들을 막아 왔다는 인간 영웅의 이름을 그렇게까지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간밤에 녀석이 했던 말…….’

- 이번에는 절대…… 절대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놔두지 않을 거다, 저릭.

알 수 없는 서글픈 감정이 담긴 그 독백이 근거 없는 신뢰를 키웠다.

그것은 결국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네르구이 이놈, 정말로 선을 넘었구나.”

그그그그극.

한순간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주변 오크들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의 대질 신문만으로도 타이니의 말을 완전히 믿어 버린 것.

타이니 역시 생각해 보니, 처음 분노한 모습부터가 자신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믿어서인 듯했다.

“……제 말을 전부 믿으시는 겁니까?”

그 사실이 당혹스러울 정도였지만.

“거짓인가?”

훅 하고 사납게 돌아온 시선에 타이니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요. 하지만 근거가 부족한데…….”

“충분하다.”

“그래도 물증은…….”

“그런 것은 필요 없다. 유족들이 증명하고 내가 판단을 내렸으니. 집행은 내 뜻에 따른다.”

오크들은 물증 따위는 필요 없는 쿨한 종족이었다.

‘……야만 오크 만세다.’

그간의 걱정이 너무도 쉽게 풀려 버린 상황.

“자, 잠깐!”

“인간이여, 그럼 내 어머니는……?”

“……저희 아버지의 영혼은 그럼 이 자리에 계속 머무시는 겁니까?”

소중한 이를 잃은 이들의 눈빛이 그의 발목을 잡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한을 푸시면, 편히 영면하실 겁니다.”

그저 달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고대의 대마법사들 역시 그리 말했다.

‘뭐, 그 후에는 영혼의 무게에 따라 천상이나 마계로 간다고 하니, 신전의 해석이 아예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

……라고 아르곤에게 들었다.

타이니는 옛 동료의 말을 떠올리면서 죽은 오크들의 유족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말은 이내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빠르게 하르하린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럼 이제 바토르의 전사들을 불러도 되겠군요.”

“……그래야겠지.”

일이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풀리는가 싶던 그때, 갑자기 남쪽 장벽 부근에서 검은 코뿔소의 깃발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цркцлвыдфвд уравлвредыул!

남쪽 장벽에서 연달아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이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이 슬쩍 뇌리를 스치는 듯해 저릭을 바라보는데.

“족장, 네르구이가 오고 있다는군.”

“허!?”

최악의 상황에 타이니의 눈이 커졌지만, 저릭은 오히려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잘됐군. 아예 지금 끝을 봐야겠어.”

“미쳤습니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고함 소리. 외쳐 놓고는 아차 하는데.

“명분이 내게 있으니, 조상신들께서 나를 돌보실 것이다.”

저릭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그대로 돌아설 뿐이었다.

‘너네 전생에 그러다가 거의 다 작살났어!’

타이니는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전생의 진실을 가슴에 담은 채 끙끙 앓다가 조금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저릭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다시금 이곳에 올 때 다진 각오를 되새겼다.

‘여차하면 저릭을 데리고 튄다.’

물론 저릭이 맨정신으로 따라올 리는 없으니, 적어도 그가 실신 정도는 해야 할 터.

불길한 미래를 떠올리는 타이니의 표정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또 그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다.

“율법을 어긴 자를 처단하겠다!!”

자신을 배려한 것인지, 저릭이 오크어가 아닌 공용어로 그리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오크 전사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았다.

“ущцоыелыдфвьд Уьевдул!”

“елвлкплы цркцлввьа соулыплцл!”

“ущцоыелыдфвьа Улаьал!”

소란스럽게 퍼져 나가는 알 수 없는 말들.

하지만 그 직후.

“가자, 어린 친구.”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인 저릭이 생소한 호칭으로 그를 부르며 어깨를 툭 쳤다.

- 그때 내가 제대로 처신했다면 우리 종족이 이렇게 몰락할 일도, 대전사의 권위가 이렇게 떨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크 내전에 관해 상세히 말하는 것을 꺼리던 저릭이 유일하게 해 준 말이 갑자기 다시 떠오르는데.

‘……오크족이 몰락하기 전엔 대전사의 권위가 이렇게나 강했던가?’

생소한 깨달음과 함께 어리벙벙한 상태로 그 뒤를 따르는데, 둘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하르하린의 전사들이 일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벽을 넘어서자, 남쪽 들판에서 무섭게 질주해 오는 천여 기의 검은 코뿔소 군단이 보였다.

두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진동에서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지만, 그것을 보는 타이니의 얼굴에는 오히려 화색이 돌았다.

만 단위도 아니고, 겨우 천 기?

‘생각보다 수가 적어. 일부만 왔어. 아니, 당연히 그렇겠지. 전쟁 중이니.’

자신이 놓쳤던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은 타이니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힐 때.

무섭게 마나를 끌어들인 저릭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고함이 터져 나와 들판 전체로 퍼졌다.

“그 자리에 멈춰라! 네르구이! 네놈을 율법을 위반한 죄로 척결하겠다!”

그야말로 질주해 오는 코뿔소 군단의 기세를 잊게 만드는 강렬한 포효.

하지만.

- 검은 코뿔소의 전사들이여!! 모두 내 명을 따르라!!

자신감 넘치는 적장의 대답도 만만치는 않았다.

더구나 그 순간 적들의 모습이 변화하는 게 보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끄으으윽!”

“끄르르르!”

“족장!”

고함을 지르며 자신들의 족장을 싸늘한 눈으로 보던 오크들까지 갑자기 검은 기운을 피워 올리며 타이니와 저릭을 살벌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주변의 방관자, 혹은 아군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오크들마저 모조리 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오크들을 중심으로 평원 전체에 은밀하게 퍼지기 시작한 음침한 기운.

그것의 근원은 다가오는 적들의 중심, 검은 코뿔소족의 족장이 가진 마기였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갑자기?’

“빌어먹을, 저릭!!”

당혹스러운 마음에 유일한 아군을 향해 저도 모르게 반말을 뱉는데.

“네르구이, 정말로 영혼을 팔아먹었구나!”

저릭은 그와 별개로 모욕을 당한 듯 격분하며 초월무구 아너를 꺼내 들었다.

동시에 폭풍처럼 솟구치는 붉은 기세와 함께 그의 전신에 거대한 은빛 늑대의 환영이 어렸다.

“갈기갈기 찢어 주마, 쓰레기!”

저릭의 몸을 휘어감은 늑대의 환영이 핏물 같은 붉은빛으로 변하는 순간.

콰아아앙.

혈랑(Blood Wolf)의 환영을 몸에 두른 저릭이 붉은 벼락처럼 전면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리고 졸지에 적진에 홀로 남겨진 타이니는 눈이 돌아간 천여 명의 오크 전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황망한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적을, 죽여라.”

“цоквьа, цтквгал!”

빌어먹을.

“어째 이럴 거 같더라니…….”

혼자 튀어 나간 옛 친구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전사는 이내 이를 악물며 스탬프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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