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네르구이
‘아직, 아직인가…….’
하르하린을 앞두고도 여전히 원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타이니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릭의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
무거운 표정의 그가 저릭을 따라 하르하린으로 향하는데.
“ущ, ущцоыелыдфвд врегЕул!!(대, 대전사님이 오셨다!!)”
하르하린의 북문에 저릭이 등장하자, 뼈의 장벽 아래에서 검은 코뿔소족 오크들이 당황하며 시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저릭이 아차 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타이니를 돌아보았다.
“아…… 이걸 생각 못 했군.”
평상시보다 훨씬 적은 수의 오크 전사들의 모습이 그에게 뒤늦은 깨달음을 준 것이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이유야 자명했다.
저릭의 발걸음을 늦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사실.
전쟁.
“……전사들 대다수가 출정 중이겠군요.”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곤혹스러운 기분으로 오크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데.
“허허, 타이니 자네도 생각 못 한 건가? 인간의 영웅이면 똑똑할 줄 알았는데?”
“끄응.”
그 말에 타이니는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 해도.
‘내가 저릭과 동급이라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듯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цркцлвыдфКзеоыьы стачлцтввдедйыдул!(족장님께서는 출타 중이십니다!)”
얼어붙은 오크 전사의 태도는 둘째 치고.
“자, 일단 네르구이는 자리에 없는 것 같은데. 자네가 말한 그 증거라는 걸 찾을 수 있겠나?”
작고 노란 눈을 빛내는 저릭의 모습에 벌써부터 위장이 아파 오는 느낌이었다.
“……일단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아마 흔적을 남겨 두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떠나오기 전에 자신이 한 말을 이제 와서 뒤집는 것처럼 들릴까 봐 긴장했지만.
“그렇겠지.”
저릭은 이상하게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멈칫하며 저릭을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날, 너를 돌려보내고 주술사에게 그 둥근 물건을 맡겼지. 마나도, 마기도 포함되지 않은 물건이라 추적에는 실패했지만, 아스란 황실에서 쓰였던 무기임은 확인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말.
다행히 바토르의 주술사 중에 외부 사정에 밝고 똑똑한 오크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물건이 정말 검은 코뿔소족에게서 나왔는지, 아니면 붉은 멧돼지족이 거짓을 말한 것인지만 판별하면 된다.”
그럼에도 저릭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앞뒤가 꽉 막힌 듯한 그 태도에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저릭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하지.’
다만 하나 걸리는 것은.
“……그럼 그걸 알면서도 혼자 왔다는 겁니까?”
“어찌 되었건, 그들이 율법을 어겼다는 게 증명된 건 아니니까.”
“어으…….”
이 똥고집을 어찌해야 할까.
연거푸 한숨이 나오는데, 어째서인지 저릭이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타이니. 확실히 하기 위해 조사차 왔을 뿐, 내가 생각해도 바타르가 나를 속이려 했다기보단 네르구이가 일을 저질렀을 확률이 높을 것 같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네르구이는 예전부터 오크답지 않은 면이 꽤 있었지…….”
그 말을 하는 저릭의 표정은 씁쓸해 보이기만 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해 주는 것 같으니 괜히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답답한 것은 답답한 것.
“그러니까, 그걸 알면서도 혼자 왔다는 거죠?”
“……말했잖느냐. 아직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는 않았으니까.”
“검은 코뿔소족이 진짜 일을 저질렀다면, 혼자 있는 당신을 먼저 죽이려 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이죠?”
그 말에 저릭의 눈 근육이 씰룩였다.
“흥. 감히 누가 나를 어쩔 수 있겠느냐.”
……그래, 너답다.
타이니는 더 이상 저릭을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혹시나 흔적을 남겼을지도 모르니 조사해 보시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라도 당장은 해 보는 수밖에.
그런데 그때.
‘컹!’
역소환된 월랑이 생각지도 못한 신호를 보내왔다.
“……설마 그런 바보짓을?”
“뭐라고?”
“아, 아닙니다. 그런데, 저 방향에 있는 천막이 혹시?”
“네르구이의 거처다. 안 그래도 가려 했는데, 뭐가 이상한가?”
……진짜 자기 거처에 흔적을 남겨 뒀다고?
‘오크 새끼들, 무식해서 고맙다!’
가슴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타이니는 저릭의 뒤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 * *
“улаагал улааг!(달려라, 달려!)”
얼굴에 검은색 문신을 새긴 거대한 오크가 검은 코뿔소를 몰아 들판을 질주하고, 그의 주변으로 1,000여 기의 검은 코뿔소들이 나란히 따라붙었다.
검은 코뿔소족의 최정예들. 치열한 전장을 뒤로한 채 본거지로 돌아가는 중이었지만, 그런 그들의 얼굴 어디에도 패배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저릭……. 드디어 긴 악연을 끝낼 때다.”
선두에 선 거대한 오크, 네르구이의 얼굴에는 살벌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얼마나 오래된 악연이던가.
부족 내에서 차기 족장 후보로 꼽히던, 전사와 주술사 양측에 모두 재능이 출중하다는 평가를 받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부족장이 되기보다는 전대 대전사의 휘하에서 오크의 정점을 노리고자 했다.
하지만.
- 그만! 교류전은 저릭의 승리다!
20여 년 전, 갓 성년이 된 놈에게 패배했던 날.
진짜 천재는 따로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날부터 그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다.
- 어차피 전사의 길만 걸어서는 저릭을 이길 수 없다.
전사의 길, 그 한 우물만 파서 성취를 높이는 대신, 외면했던 주술을 함께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 발전이 없군, 네르구이.
냉엄하기 그지없던 전대 대전사의 말.
자신보다 한참 앞서 나가던 저릭과의 차이가, 더 벌어졌음을 체감할 뿐이었다.
그렇게 차세대 대전사의 길이 더욱 멀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대전사의 도전을 포기하고 부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을 가장 강성하게 키우는 것으로 무너진 자존감을 달래려 했다.
물론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하르하린을 그 어느 곳보다 강성한 대도시로 만들었다 자부하던 어느 날.
- 새로운 대전사가 탄생했다!
- 다이어울프족 출신 저릭이 그 힘을 증명하고 대전사의 지위를 쟁취했다!
- 전대 대전사가 ‘전쟁 군주’라는 이명을 선사하며 패배를 인정했다.
전승이 아닌 쟁취로, 스승을 꺾고 대전사가 된 저릭.
아무리 노쇠하여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전대라지만, 그 위업은 오크의 모든 부족에 알려져 몇 년 동안 최고의 화제로 떠돌았다.
일개 부족장, 대도시의 주인 따위는 그 명성의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끝도 없이 쌓여 가던 열등감이 그때 폭발했다.
- 대전사가 대체 우리 부족을 위해 무엇을 해 주나! 부족을 발전시킨 나를 칭송하란 말이다! 나를!
부족의 오크들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뒷말이 떠도는 것을 알았기에, 깊은 분노와 열등감이 속을 시커멓게 태워 갔다.
그때 자신의 앞에 나타난 자들.
- 대전사보다 위, 오크로드를 위한 길을 저희가 열어 드리겠습니다.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오크들의 전승에서도 잊혀 가는 ‘전사의 혼’을 만드는 방법부터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비법까지.
거기에 필요한 대가는 고작 부족의 최상위 전사 20여 명 정도였을 뿐이다.
- 어차피 나를 비웃고 부족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들이니…….
기꺼이 놈들을 넘기고 힘을 받아들였다.
- 족장! 다, 당신 미쳤나!?
- 어, 어떻게 당신이!?
- 미쳤어, 당신이 부족을 망칠 거야!
극독에 중독된 상태로 ‘바쳐진’ 놈들의 단말마 따위, 우습지도 않았다.
놈들이 사라진 이후 부족은 자신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개편되었고, 자신은 강력한 힘까지 얻었다.
바로.
우우우웅.
가슴속에 요동치는 6개의 마기의 원.
‘기다려라, 저릭.’
슈페리어급 전사에, 동급의 주술사이기도 했던 자신이다. 그리고 이젠 거기에 6서클의 흑마법까지 더해졌다.
‘이것이라면 나 혼자서도 저릭을 이길 수 있다.’
세상에 드문 트리플 클래스의 이능력자.
마나 문신을 새긴 육체, 주술사의 영뇌(靈腦, Soul brain), 마기가 뭉친 심장의 서클까지.
거기다 각각의 경지는 5, 5, 6등급으로 모두 최고 수준에 근접했고, 그 시너지 효과 역시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굳이 흑마법을 대놓고 내보이지 않아도 말이다.
‘가능해.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기에 연락을 받자마자 일부 회군을 결정할 수 있었다.
기껏 동맹을 맺은 부족들의 항의 따위는 가볍게 묵살했다.
‘저릭을 꺾는다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동안은 명분이 없기에 덤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놈이 시비를 걸어 온 덕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대부족의 부족장이자 오크의 최강자.
그 이름을 쟁취할 수만 있다면, 모든 부족을 굴복시켜야 얻을 수 있는 ‘전사의 혼’이 없이도 오크로드로 추앙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생각에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들뜨기 시작했다.
“달려라! 달려! 쉬지 마라!”
둥둥둥둥.
검은 코뿔소 위에서 연신 북을 두드리는 네르구이.
주술, ‘진군의 북소리’는 그와 그를 따르는 오크들의 사기를 올려줌과 동시에 체력 소모는 최소한으로 줄여 주었다.
이 또한 강해진 자신이 가진 힘의 일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로 보이기 시작한 하르하린의 뼈 장벽.
그 익숙한 광경을 마주한 네르구이의 얼굴에 살기에 찬 미소가 번졌다.
‘저릭, 오늘 네놈의 생명을 거둬 주마.’
설령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지금 주변에 있는 정예들과 도시에 남은 전사들만 동원해도 놈을 끝장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오크의 대전사를 ‘바칠’ 수만 있다면.
‘거기에 전장에서 쓰러트린 놈들까지 다 더하면.’
또 한 번의 도약을 노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진정한 최강의 오크. 그 경지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타오르는 열망은 하르하린의 뼈 장벽 밖으로 자신을 마중 나온 천여 명에 가까운 전사들을 보자 더욱 강해졌다.
비교적 역량이 떨어지기에 남겨 놓은, 하르하린을 지키기 위한 최소 병력.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또 하나의 강력한 패였다.
‘상대해야 할 것은 저릭 한 놈. 그 옆에 붙었다는 한낱 인간 따윈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힘을 준 자들이 경고하긴 했지만 저릭보다 더할까.
지금 자신이 가진 패보다 강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 그 자리에 멈춰라! 네르구이! 네놈을 율법을 위반한 죄로 척결하겠다!
남겨 놓은 전사들 뒤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오크.
잊을 수 없는 더러운 면상의 소유자가 어이없는 말을 외쳐 대는데, 그 옆으로 늘어선 전사들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나?’
순간 서늘한 예감이 가슴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네르구이는 이내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의 흑마법은 희미한 자취조차 남기지 않았음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제물로 바쳐진 전사들의 시체는 물론, 그 흔적들까지도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전설에서나 나오는 혼을 보는 대주술사가 나타난 게 아니고서야 그를 추궁할 근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우우우우웅.
“웃기지 마라, 저릭! 대전사의 권위를 독단으로 더럽히지 마라!!”
마나를 은밀히 퍼트리고, 마기로 마나를 자극하여 더욱 폭발적인 기세를 담는다.
거기에 주술까지 더해지니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던 놈의 목소리가 완전히 묻혀 버렸다.
과거에는 구사할 수 없었던 재주로 저릭의 기세를 찍어 누르니, 네르구이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안 움직여?’
그럼에도 꼼짝도 하지 않는 전사들의 모습이 네르구이의 불안한 마음을 자극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네르구이는 전쟁 중에도 내내 숨겨 두었던 비장의 한 수를 서슴없이 꺼내 들었다.
“검은 코뿔소의 전사들이여!! 모두 내 명을 따르라!!”
그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마기가 부족을 아우르는 주술에 담겨 평원 전체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