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전장을 향한 질주
- 투쟁으로 명예를 쟁취하고, 삶으로 그 명예를 증명하라.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제1 율법을 제외하면, 타이니도 오크의 율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저릭과의 동행이 길어지면서 간접적으로 체험한 사실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저릭처럼.
“그들이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니, 바토르의 전사들은 대동하지 않겠다. 나 홀로 가겠다.”
가장 강력한 오크 부족 중 하나를 감찰하러 가겠다면서 독행을 선언하는 일.
자칫하면 그 부족 전체와 싸울 수도 있는 상황인데 혼자 가겠단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목구멍까지 욕설이 올라왔지만, 타이니는 간신히 마음을 다스려 냈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일이 잘못될 경우, 대전사님 혼자 검은 코뿔소족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크의 대부족이라 하면, 보통 몇십만 단위의 인구를 갖추고 주거지를 대도시로 만든 부족을 일컬음이다.
애초에 거의 모든 인구가 전사라는 계급을 추종하는 문화인 데다가, 마나가 없어도 누구나 하급 전사는 될 수 있을 정도로 신체 조건이 월등한 오크족.
그렇다 보니 전사의 수가 ‘최소’ 만 단위를 넘고, 강성한 부족의 경우 10만도 넘는 것이 현재의 오크 대부족이다.
즉, 저릭이 아무리 오러익시더의 경지를 넘보는 최강의 오크라고 해도.
“그것은 무리지.”
“그런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율법이니까.”
“어, 어으…….”
뇌를 안 거치고 뱉은 듯한 그 단순한 대답에 타이니가 자신의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그래, 이런 놈이었지.’
알고 있었지만, 좋은 추억만 생각하다 보니 이놈의 가장 큰 단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자연스레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지금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미처 제어하지 못한 고함이 터져 나오자 저릭의 노란 눈이 살벌한 기세를 담고 타이니를 응시했다.
“말조심하라 인간. 검은 코뿔소족이 율법을 어겼다는 것은 아직 네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타이니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러다 제 말이 맞으면, 그들이 대전사를 그냥 두겠습니까!?”
“……수뇌부가 썩었을 수는 있어도 그들 부족의 모든 오크가 그럴 리는 없다. 우리 오크는 인간처럼 간사하지 않으니,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수뇌부만 징벌하면 될 것이다.”
“대체 뭘 근거로 그런 낙관적인 기대를 하는 겁니까! 수뇌부가 지시하는데, 오크 전사들이 명령을 무시할 리가 있을 것 같습니까!?”
“명예를 안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것이 율법이니까.”
“무슨 그런…….”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답답하다.’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다. 환장하겠다는 말이 정확하게 이런 느낌을 표현하는 것일 터였다.
인간이 다 똑같지 않듯, 오크 역시 그러하다.
오크의 전사들이 명예를 추종하는 것은 맞지만, 모두가 그것에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자신들 부족과 가족의 안위가 걸려 있다면 말이다.
‘잘도 자기네들 부족이 비겁자들로 낙인찍혀서 사라지길 바라겠다! 차라리 대전사를 죽이고 입을 막는 길을 택하겠지.’
힘으로써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것. 그것이 꼭 인간족의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테니까.
답답함에 짜증이 나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율법에 어긋난 건지 확인해 보라고 한 것은 너였다, 인간. 그 전에 바토르의 전사들을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율법에 어긋난다.”
굳은 저릭의 표정을 보니 대충 각이 나왔다.
‘이건 못 바꾼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주장을 굽히진 않겠다는 얼굴이다.
함께한 세월 덕분에 웃어도 사나운 그 얼굴에서 의지를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순간에는 그를 더욱더 답답하게 했다.
그렇다고 저릭을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좋습니다. 대신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음?”
“저도 제 말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다행히 저릭은 그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도록. 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도 위험해질 텐데?”
“적어도 도망치는 데는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너도 데리고 튈 거다, 라는 진심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좋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도록.”
피식 웃는 저릭의 표정이 아니꼬워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천막을 나온 직후.
“……대전사 앞에서 그렇게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니. 타이니 경, 확실히 그대는 대단하다.”
“나는 숨이 막혀서 입도 뗄 수가 없었다. 확실히 인간 친구 대단하다.”
감탄하는 일행들의 말을 무시한 채, 타이니는 한숨을 내쉬며 나른의 어깨를 잡았다.
“나른.”
흠칫 놀란 나른의 시선이 타이니를 향하는데, 그는 무거운 얼굴로 더 무거운 말을 꺼냈다.
“부탁할 것이 있다.”
“뭐, 뭘?”
“바타르 족장에게 말하든 네가 직접 가든, 아스란의 발렌티아 공작가에 이 사실을 최대한 빨리 전해라. 소수라도 좋으니 검은 코뿔소족의 본진으로 어떻게든 지원 병력을 보내 달라고. 잘못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전해. 반드시.”
그에 살짝 얼굴이 붉어졌던 나른 역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전사가 여기서 하르하린으로 가는 길보다 내가 자밍우드로 가는 길이 훨씬 더 멀다.”
“하르하린?”
“검은 코뿔소족의 도시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내가 자밍우드에 갔다가 제국까지 가서 소식을 전하려면 날짜가…….”
나른은 손가락을 연신 접었다 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직감으로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느꼈지만 정확하게 계산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타이니 역시 그 문제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오크족의 마법 체계인 주술이 통신에는 젬병이라는 것이 지금만큼 아쉬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에게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볼드, 독수리의 문양 깃발을 단 상단이 엘븐하임에서 바토르로 오고 있을 것이야. 너는 너희 부족으로 돌아가면서 그 상단의 주인에게 내 말을 전해라. 그 검은 코뿔소족의 근거지, 이름이 뭐랬지?”
“하르하린!”
“그래, 하르하린에 원군이 필요하다 전해 달라고. 다른 무슨 일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라고.”
제이라면 통신구를 가지고 있을 테니 이편이 훨씬 빠를 수도 있었다.
“독수리 깃발의 상단주. 그래, 알겠다.”
볼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타이니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대전사의 발길을 늦춰 보겠다. 그러니 어떻게든 소식을 전해 다오.”
오크족의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한시가 바쁜 이 시점에 오히려 시간을 끌어야 한다니.
이 어이없는 상황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었다.
‘오크족의 피해가 좀 더 커지더라도, 저릭을 죽게 둘 수는 없어.’
계획이 더럽게 꼬여 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다음 날 새벽.
해가 뜰 무렵, 바토르의 중앙 천막에서 나온 저릭은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타이니를 보며 피식 웃었다.
“성격이 꽤 급한가 보군.”
“오크만 하겠습니까.”
천막을 지키던 오크 전사들이 대전사를 향해 비꼬듯 말을 던지는 인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저릭은 오히려 웃었다.
‘역시 제법이야.’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과 덩치, 기세를 보면서도 기가 눌리지 않은 이 어린 인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의 주장에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따라오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너를 돌봐 줄 거라곤 생각지 마라. 늦춰지면 놓고 갈 거다.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겠나?”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타이니의 코웃음과 함께 스르륵 등장한 거대한 늑대.
그것을 본 저릭의 작은 눈이 한계까지 부릅떠졌다.
“저, 정령!?”
그것도 저렇게 멋진 늑대라니.
오래전, 자신이 미숙했던 시절에 실수로 떠나보낸 형제가 생각나며 아련한 기분에 잠겨 든 순간.
‘아니, 아니지.’
- 전사는 반성은 하되 후회하지 않는다.
-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 전사다.
저릭은 스스로의 신념을 속으로 되뇌며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남에게 부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멋진…… 늑대로군.”
“이 녀석이 있으니, 제가 당신보다 뒤처질 일은 없을 겁니다.”
타이니의 자신감만큼 늑대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강했다.
마나로 짐작되는 타이니의 경지만 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그 위화감의 근원은 아마도.
“……놀랍군. 그 어깨 갑옷, 초월무구로군. 그것도 정령과 관련된 무구 같은데?”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기운이 잘 감춰진 갑옷에 저릭의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그 주인의 얼굴에도 눈길이 갔다.
‘초월무구의 마나를 통제한 건가? 저 나이, 저 경지에? 볼수록 놀랍군.’
그에 타이니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비슷합니다.”
아니무스 덕에 월랑이 더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제 갑옷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당신의 도끼 ‘아너(Honor)’보다야 못하죠.”
자신이 등 뒤에 메고 있는 도끼를 향한 시선에 저릭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초월무구 간에도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거기다 오크족 대전사의 도끼는 세상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강력한 물건이었으니, 저 인간이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너(Honor)라……. 뭐 공용어 뜻이야 맞지만, 본래 명칭은…… 아니 됐다.”
자신이 굳이 왜 설명을 하고 있는지.
이게 다 저 특이한 인간 때문이었다.
‘뼈대를 보면 겉보기보다 훨씬 어릴 텐데…….’
그러면서도 인간족의 영웅이라는 점이, 게다가 그 어린 나이에 초월무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은 저릭은 이내 잡념을 털어 내고 남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코뿔소족의 본거지 하르하린이 있는 방향.
지금은 저 어린 인간의 정체보다, 그가 한 말에 더 집중해야 할 때였으니까.
물론 저 인간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네 말이 틀릴 경우 약속은 꼭 지키기 바란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 경.”
“물론입니다.”
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지.
저릭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정령이 있다 해도, 과연 날 따라올 수 있을지 두고 보지.”
코웃음을 치며 부족의 마나 문신, 늑대의 혼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거대한 다이어울프의 환영이 그의 전신, 특히 다리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아우우우우.’
이제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들리는 옛 형제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저릭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콰아아아앙.
딛고 선 바닥이 터져 나감과 동시에 그대로 사라지는 저릭.
“ущцоыелыдф?”
“вдаопкз клйцлкд……!?”
당황하는 오크 전사들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가 여유롭게 월랑의 등 뒤에 올라탔다.
‘저릭은 확실히 빠르지.’
맨몸으로 달리는 속도만큼은 실버 팽 못지않은 초인.
늑대를 형제로 삼은 오크와 진짜 늑대인 수인족의 경주는 전생에 동료들이 심심할 때 재미 삼아 내기를 걸었던 주제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그게 전투를 위한 순간 가속이 아닌 장거리 질주라면?
“너보다야 못하지. 안 그래?”
“컹!”
타이니의 의지를 받은 월랑이 그 순간 바토르의 동문을 향해 번개처럼 돌진하기 시작했다.
타이니의 중력 속성을 적용받아 훨씬 가벼워진, 그러면서도 꽉꽉 압축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근력은 늑대와 기수에게 초월적인 스피드를 부여했다.
그리고.
- 아우우우우우.
사방을 울리는 하울링과 함께 뛰쳐나간 은빛 바람이 먼저 사라진 녹색 피부 초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바토르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초원의 바위 뒤에 숨어 마법으로 그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일행 중 누구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워로드를 움직이다니. 네르구이가 무슨 흔적을 남긴 것인지, 아니면…….”
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일까.
말룸의 장로, 1호는 경험상 후자 쪽으로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끝까지 신경을 거스르는구나. 놈…….”
그 중얼거림에도 그의 뒤쪽, 로브를 뒤집어쓴 두 인영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1호 역시 데스 나이트들에게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건, 지금 놈들이 향하는 방향만 보더라도 대충 어떤 생각인지는 알 것 같았다.
결국 놈이 위험인물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1호는 자연스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잘된 거야.’
오크의 대전사가 바토르의 전사들을 떼어 놓고 홀로 움직였다.
그렇다면?
“네르구이에게 알려 놈과 함께 워로드도 잡는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한 공을 세우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면 설령 변수가 생겨 대전사를 놓친다 한들, 데스 나이트들만 있으니 모르스 놈을 처리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틈만 잘 노리면 오크의 대전사도…….
“……골머리를 썩이던 놈이 도움이 될 줄이야. 흐흐.”
우우웅.
음습한 말과 함께 그의 손에서 검은 비둘기가 나타나더니 남동쪽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오크들의 성지 바토르로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저곳의 성물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조직이 알아서 할 일.
-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그놈을 처리하는 일에 집중해라. 절대 딴짓하지 말고.
수장의 명을 되새긴 그는 그대로 목표가 달려 나간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