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나른
천 단위 이상의 오크 전사들이 맞붙는 전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은 미친 짓이다.
전장의 광기에 오크 특유의 투쟁심이 고양되어 광전사나 다름없어진 그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을 하는 것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전생의 나라면 몰라도…….’
그렇기에 그들은 평원을 빙 돌아 바토르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다행히도 서로 간의 전투에 바쁜 오크들은 거대한 늑대가 평원을 빙 둘러 가는 것을 보면서도 달려들지 않았다.
물론 그런다 해도 대다수는 월랑의 속도를 쫓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오크들의 전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크끼리 싸우면 저렇게도 쓰는군.’
타이니는 온갖 거대한 야수들의 환영이 서로 얽히고, 튕겨 나가기도 하고, 그것들끼리 물어뜯기도 하는 전장을 눈여겨보았다.
오크족 특유의 부족 문신, 그 마나회로 공법이 어찌 활용되는지, 그 흐름에 참고할 만한 것이 없는지를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다.
- црелвуьаКзео цдягйредыул!!
“저게 무슨 말이야?”
오크들의 전장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는 외침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어딘가 들뜬 것처럼 열기 어린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던 볼드가 한 박자 늦게 그 질문을 깨닫고 황급히 대답했다.
“조상들께서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조상신들께서 우리를 보고 계실 때 공을 세우는 것. 그것이 오크의 최고 명예지.”
여신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보다는 자신들의 조상을 더욱 섬기는 오크.
그 사고방식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 주는 말.
실제로 볼드는 타 부족의 절기들보다는 전장의 열기 그 자체에 심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대다수는 그러면서 죽는 거 같은데?”
“그래도 조상신의 품으로 가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 우리 오크에게 전쟁과 전투는 삶의 의미이자 종착지니까.”
……역시나 인간과는 다르다.
타 부족의 전투를 지켜보면서도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볼드.
그 모습을 보자 또다시 저릭의 말이 떠올랐다.
저릭 역시 전장에서 흥분하는 것은 마찬가지긴 했지만.
- 율법을 지키고 명예를 강조하는 것. 그것이 오크의 투쟁심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문명인임을 잊지 않게 만드는 족쇄이자 도구다.
율법과 규율이 스스로를 컨트롤하기 위한 도구라 역설하던 친구.
- 투쟁심에 심취한 오크는 몬스터나 다름없지. 광기에 빠진 수인족도 마찬가지다.
- 그렇기에 그들도 우리도, 스스로를 다스릴 규칙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저릭의 완고한 성미, 그 똥고집은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기억하는 강인하고 고집스러운 전사.
‘과연 이 시기의 저릭도 여전할까.’
그 호기심과 기대감이 월랑의 속도를 한층 더 높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꽉 잡아라. 속도를 더 올린다.”
“여기서 더!?”
파바바바박.
“으억!?”
월랑은 다시 은빛 바람이 되어 평원을 질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오크의 함성이나 전장의 폭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자 그제야 전장의 열기에서 벗어난 볼드는 다시 엄청난 질주를 보여 주는 늑대 정령의 등을 쓰다듬었다.
“내 형제 살키도 정령이 되어 이렇게 함께할 수 있었으면…….”
급격히 지나가는 풍경과 엄청난 풍압 속에서 볼드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여기서 바토르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아나?! 엘븐하임에서부터 지도를 보고 직선으로 달려오긴 했는데……!”
타이니의 고함이 볼드의 상념을 깨웠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속도면 곧 도착한다. 아마 하루 정도?”
주변을 두리번거린 볼드가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타이니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멀리 지평선 근처에서 솟구치는 불길,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들, 환상처럼 솟구치는 거대한 동물의 환영들…….
그 소란을 일으키는 이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오크.
‘바토르가 근처인데도 여기서 전투를 벌인다고?’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갑자기 월랑이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컹!”
그리고 그 뜻은.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 월랑이 한층 가속하며 그 전장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 * *
“фгввЗаьа йоады Еьазкдуьавд(명예를 버린 쓰레기들이)!!”
붉은 멧돼지 위에서 맹렬하게 창을 휘두르는 오크 여전사의 고함에, 달려들던 오크 전사들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мщцлвзкз фгввЗыьы войеул! еьвадкл кру фгввЗул!!(패자에게 명예는 없다! 승리가 곧 명예다!!)”
뒤쪽의 지휘관이 고함을 지르는 순간, 그들은 흔들리던 무기를 부여잡고 다시금 붉은 멧돼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여기까지인가.’
붉은 멧돼지족의 전사이자 순찰 대장, 그리고 현 전령들의 수장이었던 나른은 속으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의 부하들과 그들의 형제들은 모두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다.
검은 코뿔소를 위시한 북부 연합군이 명예롭지 못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잡아 대전사에게 고하기 위해 가던 길.
그 길의 끝에서 받은 습격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특히나 전사로서 명예를 완전히 포기한 저 오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цоыелареовьд кьвцдкл цркьфвдалур ылфвлвдЕулфгы ылврлал. йлпьяла! кгачтар Кьчвьа йрцл!(전사로서 긍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와라, 바흐칼! 결투로 끝을 보자!)”
“втекдцд флал. ылаьы. вдфд улцлйвьы фтакркдврл ыщкл врщ уьцлйвдцдавьа пщвшплцд? фтоплкр вдЕво!? сгал!!(웃기지 마라, 나른. 이미 다 잡은 물고기와 내가 왜 드잡이질을 해야 하지? 뭐 하고 있어!? 쳐라!!)”
냉소 섞인 고함과 함께 다시 오크 전사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른은 그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어.’
그녀의 형제인 붉은 멧돼지 야랄타이는 정면으로 돌진하는 데는 최강이지만, 옆이나 뒤로 이동하는 일에는 재주가 없다.
그러니 맞서 싸울 수밖에.
“воадйвойеул!(어림없다!)”
파바바박.
붉은 멧돼지의 환영이 그녀의 전신에서 솟구치며, 창에 강력한 힘을 부여했다.
하지만.
“цтквоал!(죽어라!)”
“йтцрквьа втдпщ!(부족을 위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오크 전사들의 공격은 그녀 혼자서 견디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쿵. 쿵. 쿵.
붉은 멧돼지의 거체가 연신 밀려나더니 결국.
“꾸에에엑!”
옆구리에 창이 박힌 멧돼지가 비명을 지를 때.
쿨럭.
“кгыуг! вшалачлвд!(견뎌! 야랄타이!)”
밑에서 들리는 형제의 비명에 가슴이 아려 왔지만, 살기 위해서라도 투지를 잃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정작.
‘내, 내가 한계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피를 토해 낼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적들은 그 상태를 헤아려 주지 않았다.
“цткво!!(죽어!!)”
“утзцгал!(뒈져라!)”
붉어진 눈으로 도끼와 창을 휘두르는 오크들.
그 뒤로, 비웃음 짓는 검은 코뿔소족의 순찰 대장 바흐칼의 모습이 보여 가슴속에 울화가 솟구치는데도.
‘젠장.’
몸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에게 쇄도하는 살벌한 무기의 옆으로 은빛 거체가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것이 나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아아앙!
“꺽!”
“끄아아악!”
폭음과 함께 한순간에 튕겨 나가는 오크 전사들의 거체들 사이로, 거대한 은빛 늑대 위에서 살벌한 미소를 짓는 검은 머리 인간이 보였다.
“잠시 실례. 끼어들어도 되지?”
오랜만에 듣는 공용어였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른이 그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직전의 충돌에 의해 허공으로 날아오른 오크 전사의 도끼 하나를 잡아챈 타이니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적들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전부 치우고 나서 얘기 좀 해 보자고.”
그 자신감을 증명하듯, 그가 수십에 달하던 검은 코뿔소 족의 순찰대가 전멸시키는 데에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볼드가 무거운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알게 뭐냐. 친구를 구했을 뿐이야. 거기다 난 오크도 아니고.”
타이니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에 볼드 역시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부족의 은인이니 어떻게든 무마해 보겠다. 아니, 아니지. 어차피 검은 코뿔소 놈들이 악마추종자들과 손을 잡은 거라면, 문제도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타이니는 혼자 묻고 답하는 볼드를 뒤로한 채 죽은 듯 기절한 나른을 살펴보았다.
탄탄한 체형과 녹색 피부는 여전히 선명한 근육을 그려 내고 있었지만, 인간이라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깊은 옆구리의 상처와 토혈의 흔적이 그 기능미를 퇴색시켰다.
하지만 자칫 오버리바운드를 겪을 뻔한 마나를 억지로 다스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처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역시 오크답달까…….’
그런데 왜 붉은 멧돼지족의 전사들이 그들의 영역과 먼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까.
그 궁금증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봤을까.
“……фта…….”
나른의 갈라진 입술이 나직한 소리를 뱉으며 벌어질 때, 고개를 갸웃하는 타이니의 옆으로 볼드가 성큼성큼 다가가 수통을 기울였다.
“우스, 물을 달라는 뜻이다.”
벌컥벌컥.
의식이 온전하지 않은 중환자의 입에 수통의 물을 그대로 쏟아 넣는 볼드.
인간이었다면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는 짓이었지만, 다행히 그 대상은 오크였다.
그것도 익스퍼트급의 마나유저인 오크 전사.
꿀꺽. 꿀꺽.
“끄으…….”
이내 나른은 반쯤 눈을 뜬 채로 상체를 일으키더니, 수통을 잡아채고는 적극적으로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러다.
쿨럭.
“후으, 살 것 같군. 타이니 경, 신세를 졌다. 그리고 그대는?”
“볼드. 흰색 다이어울프족의 전사다. 전에 한번 봤을 텐데?”
“아, 그런가……?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다.”
“괜찮다. 정신도 없을 텐데.”
두 오크족이 공용어로 인사를 나누는 묘한 광경을 지켜보던 타이니는, 나른의 눈빛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른?”
그 짧은 질문에는 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고.
이내 한숨을 토해 낸 나른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오늘의 일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상했던 것은 놈들이 오크답지 않은 전술을 쓴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말은 타이니의 눈을 빛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검은 코뿔소의 족장 네르구이를 습격할 때, 그 곁에서 죽은 인간의 시체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붉은 멧돼지족도 적들이 악마추종자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혹시 그 시체를 확보했나?”
타이니와 볼드가 눈을 빛내며 되묻자, 나른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내 말을 믿어 주는 건가?”
“우리도 악마추종자들이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대전사에게 전하러 가는 길이었다.”
“당연히 믿을 수밖에.”
그 말에 나른은 반색하다가도, 어디에 생각이 미쳤는지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체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 직후 마나의 유동도 없는 기묘한 폭발이 있었다. 검은 구슬 같은 물건에서 이어진 폭발과 불꽃, 그것이 그 시체를 완전히 불태웠지.”
“……그런가.”
그 말에 볼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지만, 타이니는 반대로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폭뢰. 왜 안 나오나 했더니…….’
그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나른의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확보한 것은 그 불길을 일으켰던 검은 구슬 몇 개뿐이다.”
“오!”
“그리 기대할 필요는 없다. 놈들도 그게 귀한 탓인지 전장에서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으니까. 그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엥?
‘나한테는 그렇게 대량으로 터트려 놓고?’
타이니가 잠시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는데.
“대전사와 함께 있는 바토르의 주술사들이라면, 물건에서 그 주인의 흔적 정도는 일부라도 읽어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조사 결과, 정작 이 물건에는 마나도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건 것뿐이다.”
“전황이 그리 좋지 않은가?”
볼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나른은 말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불리한 전황에 대해 긴 설명을 시작하는데, 한참 그것을 듣던 타이니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맞아! 그래, 그러면 말이 되지!”
“??”
오크의 전쟁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두 오크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오는데.
“나른, 그 물건 네 생각보다 더 크게 도움이 될 거다. 잘 가져온 거야.”
타이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아스란 황실에 재앙을 일으킨 무기야. 그럼 당연히 안 쓰는 게 맞다. 제국이 오크의 일에 간섭할 여지를 주게 되니까.”
“아……!?”
“그런 물건을 들켰다면 검은 코뿔소족의 오크들이 나른을 습격해 없애려 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되지.”
한참의 고민 끝에 그렇게 말하며, 타이니는 스스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 안 멍청하다니까!’
검제한테 하도 갈굼을 당해서 주눅이 든 것뿐이다.
그런 생각에 절로 나온 미소였다.
“아…….”
“그렇군.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 친구.”
“역시 인간은 똑똑하다.”
두 오크는 타이니의 말에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것이 그에게 더 큰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대전사를 배출한 다이어울프족의 족장 후보, 그리고 아스란과 인접한 초원 지대의 붉은 멧돼지족의 순찰 대장.
그들이 아스란 황실의 정보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 내가 이 오크들보다는 똑똑하……. 하…….’
……X발.
“흠, 흠. 대전사에게 전할 말이 더 생겼군. 일단 바토르로 빨리 가자고.”
착잡해진 마음을 감춘 채 타이니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고, 그 심정을 알 리 없는 두 오크는 그 급격한 태도 변화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