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말룸의 수장
“예!?”
예상치 못한 반응에 1호가 고개를 번쩍 치켜드는데.
- 강림의 때가 가까워지고, 거대한 힘을 내려받았다. 한두 번의 실패 따위야 더 이상 중요하지 않지.
해골 위에 덧씌워진 검은 영체의 미소.
그 소름 끼치는 모습을 보고도 1호의 얼굴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살았다, 라는 안도감이 공포심을 희석시킨 것이다.
“감사, 또 감사합니다!”
쿵. 쿵.
다시 한번 바닥을 찧는 이마.
그것을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은 수장이 다시금 말을 보탰다.
- ……하지만 명심하라. 아직은 내가 직접 나설 수 없느니.
“감사…… 예?”
황당한 마음에 1호가 피투성이 얼굴을 다시 번뜩 치켜드는데.
- 좋은 일이지만, 얻은 힘이 너무 커서 완벽히 다스리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그저 내 힘만이 아니니…….
쿠쿵.
그그그극.
해골이 발을 구름과 동시에 전신의 뼈에서 검은 마기가 뿜어지며, 허공에 검은 포탈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내.
- 오라, 그분의 전령들이여!
철컥, 철컥, 철컥.
도무지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 포탈을 통해 걸어 나왔다.
하나하나 덩치가 거대한 검은 기사 셋.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해골의 마기와는 달리, 각각 덩치가 2m에서 3m 정도 되는 검은 기사들의 마기는 안으로 수렴하며 섬뜩한 검은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본능에 의해 그 섬뜩한 검은 광채를 보는 순간 영혼을 옥죄는 공포감이 느껴졌다.
‘서, 설마……?’
1호도 생전 본 적 없는 힘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7단계 이상의 마병…… 아니, 흑기사만이 가능한 진정한 파괴의 힘.
마기로 이루어진 파괴의 권능, 검은 오러.
그들은 마계 7군단 중 언데드 군단의 최정예라 알려진 마계의 전투 병기, 데스 나이트였다.
‘아무리 8서클 대흑마도사라도, 인간이 데스 나이트들을 부린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이적에 1호가 눈을 부릅뜨는데, 연달아 현세에 내려선 데스 나이트들의 기운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이를 향해 살의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 허윽!?”
1호가 화들짝 놀라 괴상한 신음을 흘리는데.
- 정당한 주인을 배알하라.
이어진 수장의 목소리에.
쿵.
검은 마기가 일렁이는 세 구의 검은 기사들이 무기를 바닥에 박아 넣으며 해골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그 기사들에게서 튀어 나간 검은 구체 셋.
수장이 그것을 한 손에 모아 삼키자, 새하얀 뼈만 있던 얼굴에 영체와 닮은 깡마른 회색 살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회색 얼굴을 갖게 된 수장이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흘렸다.
- 그분께서 내려 주신 나의 가드, 데스 나이트들이다. 이들이 나의 부재를 대신할 것이다.
“서, 설마…….”
- 너는 이 중 둘을 데리고 놈을 처리하라.
“하, 하지만 놈은 지금 오크족의 대전사에게 가고 있습니다. 워로드는 쉽게 볼…….”
- 워로드에게 놈이 가기 전에! 혹은 놈이 워로드와 떨어진 후에 처리하란 말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지시해야 하느냐!?
“허, 허윽. 예, 예 알겠습니다. 하, 하지만 놈이 정말 용사라면…….”
- 흥. 신성력 한 줌 없는 놈이 무슨 용사? 네놈이 꾸며 낸 거짓에 정작 네놈이 속느냐? 한심한 놈!
“죄, 죄송합니다.”
1호가 황급히 고개를 다시 처박는데.
- 그리고 그놈을 잡아 대체 어떻게 우리 계획을 아는지…….
명령을 내리던 수장은 이내 멈칫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아니지. 설령 진짜 용사라도 상관없다. 그저 죽이면 그뿐이지. 그냥 틈을 주지 말고 죽여라. 알겠느냐!?
“예, 예.”
- 놈을 처리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 이게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하, 하오나, 그럼 조직의 일은…….”
직접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운 건지 아니면 진짜 우려를 표하는 건지 모를 어조로 1호가 말을 끌었지만.
- 흐.
그에 해골이 손짓하자, 무릎을 꿇은 흑기사 셋 중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푸른 귀화가 번뜩이는 눈을 들어 1호를 노려보았다.
- 내 뜻은 데스 나이트를 통해 내가 직접 전하겠다. 그러니 네놈은 임무에나 충실하도록.
수장의 목소리가 데스 나이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더 이상 피할 핑계가 없어진 1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푸엣취.”
정신없이 내달리던 와중, 타이니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씁.
아무래도 월랑이 너무 빨리 달리고 있는 탓이겠지만,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도 없었다.
부족 전쟁의 여파 때문인지, 대수림을 나와 꼬박 하루를 질주하는데도 오크족 정찰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컹!”
그에 월랑이 신경질이 난다는 듯 짖었다.
그의 생각을 읽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 꼬리 부근에 매달린, 다 썩어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머리 3개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버릴 수는 없었다.
“알아, 알아. 미안해. 좀만 더 힘내 줘.”
타이니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며 달리는 월랑의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사실 한 놈이라도 살려서 데려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지만, 그건 전투가 끝난 지금에야 든 생각.
당시에는 정말 위험했으니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특히나 마지막에는.
‘어떻게 지배자급 마수를 소환한 거지? 지금은 안 될 텐데?’
마법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도 초인이라 불리는 경지인 7단계의 괴물들은 영혼 자체에 특별한 격이 있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 이상의 존재들이 마법 하나로 차원을 쉽게 넘나들 수 있었다면, 이 세상은 진즉에 끝장이 났을 테니까.
그 역시 파멸 속성을 두른 스탬프로 간신히 소환을 저지한 것이 고작이었다.
급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동원한 강수.
덕분에 파멸 속성에 대한 지배력이 증가하는 깨달음도 있었지만, 자가 복원 기능이 있는 스탬프가 반파되어 아직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지금 그란돌에게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젠장.’
마음이 심란해지기만 했다.
지배자급 마수의 소환도 그렇고.
‘현자의 마탑에도 가 봐야 하나? 신경 쓸 것도 많은데.’
그냥 우연일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렇게 억지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타이니는 질주에 집중했다.
사실 뭐가 어찌 되었건, 지금은 오크족이 내전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아야 할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릭을 설득해 악마추종자들을 골라내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먼저였다.
‘검은 코뿔소족이랬던가?’
바타르 족장이 말했던 인간들과, 오크 종족간의 전쟁을 주도한 검은 코뿔소족, 거기에 자신을 노린 악마추종자들의 습격…….
정황 증거가 모두 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그 망할 똥고집 저릭이 순순히 설득되느냐인데.’
하이넨이 특유의 예측 못 할 충동적인 행동으로 동료들이 골머리를 싸매게 했다면, 워로드 저릭은 정반대의 의미로 힘들게 하는 인물이었다.
- 율법을 어기고 명예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율법은 고사하고 그냥 법도 안 지킬 것 같은 더럽고 사나운 인상과는 달리, 심각하게 고지식한 삶의 철학을 가진 이.
그것이 오크의 대전사, 워로드 저릭이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 가며 그를 움직이게 만들 방법은 하나뿐이다.
대전사의 결투. 즉 그에게 도전하여 힘으로 꺾는 것.
오크가 꺾는다면 새로운 대전사가 탄생하고, 다른 종족이 꺾는다면 오크의 대전사가 그 도전자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오크의 관습.
전투 종족 오크다운 관습이지만.
‘지금 나로서는 어림없지.’
아마도 지금쯤 저릭은 오러유저의 끝자락에 이른 상태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경지를 초월하는 전투력을 가진 자신이라도 지금 저릭에게 비빌 수는 없다.
그래서 그가 떠올린 것이 바로 엘븐하임으로 오는 길에 마주쳤던 인연이었다.
- 내 이름은 볼드. 다이어울프족의 족장 후보 중 하나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찾아와라. 내 명예를 걸고 돕겠다!
월랑이 늑대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 저릭과 같은 부족 출신의 오크들.
아무리 부족 전쟁 중이라 해도 대전사의 부족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관례이니, 그들을 먼저 설득하면 저릭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부족의 영토가 바토르로 향하는 길목에 있기도 하고.
‘분명히 족장 후보 중 하나라고 했으니.’
그 부족을 움직일 수 있다면 저릭 역시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지금 타이니가 노리는 것이었다.
거기에 누가 봐도 악마추종자의 것이 분명한 머리도 몇 개 챙겨 놨으니, 설득은 더욱 쉬워지리라
그렇게 머릿속으로 다이어울프족의 상황을 몇십 번이나 시뮬레이션했을 때, 그는 멀리 구릉 지대에서 커다란 늑대를 타고 순찰 중인 오크족의 정찰대를 만났다.
“여기! 여기라고, 오크 친구들!!”
영역을 침범해 오는 괴상한 인간을 향해 달려오던 오크들은 거대한 늑대를 보며 한 번 놀라고,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반기는 인간을 보고 또 한 번 놀라며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 * *
“저기다, 인간.”
“그래, 그래 보인다. 수흐바타르. 멋진 도시군.”
“만약 네 말이 거짓이라면…….”
“이 오크가 속고만 살았나. 걱정하지 마라.”
팡팡 등허리를 두들기는 손길에 정찰대의 대장 라토르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놈에게 얻어맞은 전신이 쑤셔 왔으니까.
족장 후보 중 하나인 볼드의 친구라면서 정작 증표도 없으니 포박해서 끌고 가려 했는데, 도리어 인질로 잡힌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놈이 자신과 부하들을 패기는 했어도 치명상을 입히진 않은 것을 보면 정말로 싸울 의사는 없어 보였으니.
라토르는 그가 정말 볼드의 친구이기를, 그래서 박살이 난 명예의 파편이라도 지킬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그의 복잡한 심경을 전혀 모르는 인간은 점차 가까워지는 거대한 뼈 울타리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멋지군.”
정찰대의 안내(?)를 따라 찾아온 다이어울프족의 대도시, 수흐바타르는 자밍우드와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뼈와 가죽을 근본으로 하는 천막 건축 문화는 비슷했지만, 초원이 아닌 산맥을 걸친 구릉 지대의 숲과 동굴을 천막과 연계하며 뼈 건축물을 만든 수흐바타르의 풍경에는 마치 자밍우드와 엘븐하임을 반반씩 섞어 놓은 듯한 묘한 멋이 있었다.
물론 타이니는 그 아름다운 대도시를 오래 감상할 여유가 없었기에 바로 목적한 사람을 찾아갔다.
다행히.
“여어! 인간 친구! 자네가 내려 준 처방이 정말 맞았어! 내 형제가 기운을 차리고 있네!”
볼드는 그를 잊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반갑게 소리치며 한달음에 다가와 놓고는.
“……고작 한 달 남짓 지났는데 그새 뭔가 달라진 것 같네, 인간 친구. 뭐가 달라진 거지?”
볼드는 타이니를 위아래를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감각이 예민하군. 족장 후보라 이거지?’
정령술사로서 성장하고 영혼의 격이 조금 올라간 것은 겉으로 티가 나지도 않을 텐데, 그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키가 컸나? 아니, 여전히 작은데?”
오크 전사치고는 작은 편인 볼드에게 또다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내가 앞으로 너보다는 클 거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
“……면목이 없지만, 벌써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 볼드. 너희 종족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야.”
타이니는 썩은 내가 풀풀 나는 검은 머리 셋을 들어 보이며, 인상을 찡그리는 오크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