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바토르로 가는 길
“뭐라고요?!”
갑자기 웬 성기사?
‘나를? 왜!?’
찔리는 구석이 있는 타이니로선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안 그래도 직전까지 신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 더욱.
“이유가 뭐랍니까 대체?”
“교황이 자네를 보고 싶다 했다더군. 뭐 짐작 가는 거 있나?”
“예!? 교황이요!?”
일순간 혼란에 빠진 타이니는 에우리나의 말에 선뜻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악마추종자들이 벌인 재앙을 두 번이나 막아 냈으니까 그렇겠죠. 여기서도 지금, 아 여기 일은 모르려나.”
가렌이 대신 대답했지만, 타이니에게는 조금도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이 벌써 신전의 귀에 들어갔다든가.
그로서는 그런 불길한 상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 당분간은 엘븐하임의 일을 처리해야 하니 보낼 수 없다고 말해 놓긴 했는데, 밖에서 기다리겠다더군. 성기사가 혼자 온 걸 보니 무슨 극비 임무 같기도 한데.”
‘어라?’
혼자? 극비 임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공황 상태에 빠졌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그의 걱정대로 신성 모독 같은 일이었다면 성기사가 달랑 한 명만 오진 않았을 테니까.
‘갓 핸드 그 양반이 왔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
“흠, 굳이 만나야 할까요? 사제들은 솔직히 믿고 싶지가 않아서…….”
“뭐, 이번 대 교황은 깨끗하다는 말이 있긴 하네만…….”
“그래 봤자 얼마나 다르겠어요.”
사실 여신교가 주류인 이 서대륙에서 자랑스레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을 듣는 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신의 존재는 믿지만, 사제들은 믿지 않는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사제들의 타락은 공공연하던 일이니.
‘갓 핸드, 그 양반 같은 광신도가 차라리 낫지. 사제들은 썩었어.’
이것은 자신만의 편견이 아니라, 대륙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전생에 신전에서 말세를 극복하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갓 핸드를 파견해 준 것이 전부.
말세의 끝, 인류의 최정예가 모두 죽어 나갈 즈음에야 간신히 신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용사가 있었지만, 막상 최전선에 있던 그와 동료들은 그 용사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만큼 신전의 타락과 무능은 전생에도 심각했다.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 판에, 신전은 무슨.’
짜증만 치밀어 오르는데, 에우리나 역시 그 기분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만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타이니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지! 그 수가 있었어!”
“음?”
“장로님, 그 성기사가 설마 돈으로 서품을 산 가짜는 아니겠지요?”
“……교황 직속이라고 들었네. 설마 가짜일까.”
“그럼 됐습니다.”
“뭐가 됐다는 거지?”
강력한 클레릭인 클로이조차도 마기를 숨긴 악마추종자를 구별해 내지 못했으니,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에스티나, 흠. 수호자님이 악마추종자로 추정되는 이들을 잡아 오면, 성기사가 신성력을 주입해서 놈들을 구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 성기사에게 뒷일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후일 제가 신전으로 찾아가겠다고.”
“자네가? 아까랑 말이 다른데?”
“이게 최선일 것 같거든요.”
타이니는 에우리나의 물음에 보란 듯이 씩 웃어 보였다.
‘물론 가더라도 한참 후에 가겠지만.’
전생의 경지 혹은 그 이상의 힘을 되찾거나, 인지하고 있는 대다수의 재앙을 극복한 뒤에 말이다.
그 생각을 짐작하지 못하는 에우리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리고 에스티나, 큼, 수호자님에게는 따로 미안하다 전해 주십시오. 저는 바로 바토르로 가 보겠다고.”
“……자네와 에스티나 사이에 오간 이야기야 내가 전부 알진 못하네만, 에스티나가 많이 서운해할 것 같은데. 괜찮겠나?”
“어차피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에스티나도, 큼, 수호자님도 그걸 알고 있을 테고요.”
“……그렇군. 알겠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에우리나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내가 아무리 꽉 막혔기로서니 수호자가 자네를 친구로 선택한 것을 아는데, 굳이 말을 가릴 필요는 없네.”
“아…….”
“거기다 일족의 재앙이 될 수도 있었던 불순물들을 걸러 내 준 은인이니, 누구도 뭐라 하지는 못할 테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 듯했던 노엘프가 이내 결심한 듯 타이니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떠난다고 하니, 정식으로 사과하겠네. 내가 일전에는 실례가 참 많았어. 이 노인네의 편견을 깨 줘서 고맙네.”
“아, 아닙니다, 장로님. 이러실 필요까지는…… 너무 과분한 예의십니다.”
깜짝 놀란 타이니가 마주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자, 빙긋 웃은 노엘프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언제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종족의 뜻이 어찌 정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안 된다면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나설 테니.”
처음에는 대립각을 세웠던 장로 에우리나는 이제는 완전히 호의적인 웃음으로 그를 배웅했고, 그에 타이니는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엘븐하임을 떠날 수가 있었다.
* * *
그그그그긍.
모처럼 환한 달빛이 내리쬐는 밤하늘 아래, 엘븐하임의 녹색 담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적이 없는 곳에 성인 대여섯 명 정도가 지나갈 만한 공간이 열렸다.
엘븐하임의 드높은 덩굴 담장은 담장 지킴이의 뜻에 따라 어디에나 출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교역 때문에라도 인간의 성처럼 동서남북 네 방위에만 통로를 만들기 마련인데, 실로 오랜만에 엉뚱한 곳에 문이 열린 것이다.
심지어 거기서 나온 것은 엘프도 아닌 검은 머리 인간 한 명.
“이런 게 되다니.”
타이니는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돌아보고는 감사의 뜻으로 담장 위 부엉이의 정령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이내.
“가자, 월랑.”
“아우우우우우우!”
실체화한 거대한 늑대의 정령을 타고, 동북쪽을 향해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교역과 순찰을 위해 만들어 놓은 대수림의 관도를 따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는 질주.
대수림의 수많은 나무와 온갖 생물들이 길을 막을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훨씬 늦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컹!”
거대한 체구로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 꼭대기로 단숨에 뛰어올라 숲을 밟고 내달리는 늑대의 정령에게, 그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캬오오오!”
거대한 나무 위쪽에서 환한 달빛을 받으며 기분 좋게 내지르는 포효.
“츄르르.”
보금자리를 침범당한 괴물 뱀 한 마리가 그 포효에 담긴 기세에 놀라 움츠러드는데.
뻐어억.
자비 없이 그 머리를 밟아 터트린 늑대와 기수는 장애물 하나 없는 대수림의 지붕을 밟고 거침없이 도약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앙.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부딪치며 터져 나가는 공기.
그 풍압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타이니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더 빨라졌어. 이대로 쉼 없이 내달리면 3일이면 되겠어.’
지형을 가리지 않은 것을 떠나, 단순한 속도만으로도 이미 일반 기마의 마력 질주 ‘따위’와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전생처럼 동료들에게 이동 속도가 느리다고 타박받을 일도 절대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빠른 축에 속하겠지.’
“컹!”
“그래, 네 덕분이지. 고맙다.”
“컹!”
때를 맞출 수 있을지, 저릭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지.
여전히 온갖 고민이 남아 있었지만, 달빛을 받으며 질주하는 지금만큼은 그 잡념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월랑의 성향이 옮은 건가.’
“컹!”
“그래, 그래서 좋다. 더 신나게 달려 보자!”
“컹!”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지만,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며 더욱 기세를 올렸다.
그렇게 자유로운 질주가 가져다준 자유를 한창 만끽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갑자기 그 홀가분함을 깨트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 위, 위다. 젠장!
- 왜 늑대가 하늘에……!
- 바꿔! 빨리!
누가 들어도 자신을 타깃으로 한 듯한 목소리.
그리고.
“크르르르.”
“마기? 악마추종자?!”
신경질적인 월랑의 반응으로 놈들의 정체까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짜증 나는 놈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놈들이 반갑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토르로 향하는 직선 방향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기다린 거야. 선황의 수작이 아니었어. 악마추종자들이 벌인 일이다!’
덕분에 오크족 전쟁에 관한 고민 중 하나가 깨끗하게 해결되었으니까.
“쓰레기들…….”
타이니의 입에 살벌한 미소가 걸리는 순간.
- 잡아!
- 끌어내려!
파바바바박.
월랑이 질주하는 전방의 공간 전체를 향해 쏟아지는 화살 세례가 보였다.
뭘 칠했는지 검게 번들거리는 화살들이 시커먼 마기를 머금은 채로 쏟아지는 광경.
물론 이 정도는 철신갑으로 두른 채 무시하고 질주해도 될 것 같았지만, 덤비는 적을 무시하는 일 자체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저릭한테 썩은 모가지 몇 개는 들고 가야 설득이 더 쉽겠지.’
그렇게 마음이 정해지는 순간.
“전부 죽여 주마.”
늑대의 정령과 기수는 은색의 유성이 되어 수십 미터 높이 아래로 벼락처럼 떨어졌다.
“온……!”
꽈아아아앙!
온몸에 비늘이 돋아난 마인이 거대 늑대의 발에 밟혀 그대로 터져 나갈 때,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무수한 공격이 쏟아졌다.
“저주부터!”
우우우웅.
파바바바박.
콰아아아앙.
전신을 옭아매는 흑마법부터 마기 가득한 독화살 세례까지.
그리고 그 뒤로 인간의 형상을 버린, 뿔이나 날개, 비늘 같은 게 달린 마인들이 질주해 왔다.
그 하나하나의 위력은 분명히 모자라지만, 합쳐진 힘은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우우우웅.
타다다다당.
노을빛 마나의 갑옷이 쏟아지는 저주와 화살 세례를 튕겨 내고.
“전부 꺼져라!”
콰아아아아앙!
불꽃 같은 마나를 머금은 워해머가 달려드는 마인들을 직격하는 순간, 그 일대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블레이더급, 4단계의 정령술사가 보여 주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파괴의 흔적.
“괴, 괴물…….”
한순간 적들도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지만.
“뭐 해!!!”
숲속 어딘가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는 순간, 잠깐 멎었던 공격은 오히려 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 그대로 얼어붙어라!
- 나는 네 혼의 주인이니……!
- 더러운 정령이여, 편법으로 남긴 저주받은 생명체여.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귓가에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울리고.
드드드득.
이내 몸을 속박하는 냉기와 영혼에 간섭하는 마기, 월랑의 혼을 노린 저주가 일시에 쏟아졌다.
‘전부 6서클!?’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3개의 흑마법.
아무래도 쓰레기들이 생각보다 많은 수의, 그리고 강한 전력을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놈들의 선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흥.
‘영혼에 거는 저주라니.’
오러익시더급 영혼이 정령술로 더욱 강화된 지금의 그에게, 6서클급 저주가 먹혀들 리는 없었다.
월랑과의 연결을 끊으려는 저주 역시 마찬가지.
그런 저주는 6서클이 아니라 카룬의 그 초인급 흑마법사가 와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장은.
‘하나만 끊으면 돼.’
우우웅.
염체가 맹렬히 마나를 움직이며 육체에 침습하는 냉기를 밀어 내는 순간.
“뒈져라!!”
“죽어!!”
그의 전신으로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는 화살, 창, 도끼 등의 공세가 쏟아졌다.
“흡!”
콰콰콰콰쾅.
타다다다당.
전력을 뿜어낸 노을빛 마나의 갑옷이 그 수많은 공세를 다시 한번 막아 내고.
“네놈들이나 뒈져라!”
콰아아아앙!
다시금 휘둘러진 워해머가 지면을 터트리며 마인들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정령술이 성장하면서 단순히 월랑과 영혼의 힘만 성장한 것이 아니다.
‘역시…….’
초월무구 아니무스는 정령술사의 격에 따라 그 주인의 육체 역시 강화하는 특성이 있었으니.
그것을 처음 얻었을 때 타이니가 추측한 대로, 정령술 경지 상승으로 인해 당시보다 1.5배 더, 맨몸일 때에 비해서는 3배 이상의 강화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기적인 특성.
‘뭐, 초월무구는 이 맛에 쓰는 거지. 흐.’
꽈아아아아앙!
“아하하하하! 전부 뒈져라, 쓰레기들.”
덕분에 타이니는 다시금 자신이 성장했음을 실감하며 살기에 찬 광소를 터트렸다.
“우하하하!”
쾅!
꽈아아아앙!
“으아아악!”
“어, 어떻게!”
그저 생각 없이 파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혹시나 위협이 될 수 있는 6서클 흑마법사 셋을 찾기 위해, 스탬프에서 터져 나간 자신의 잔여 마나를 파동으로 만들어 멀리 퍼트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영혼의 힘이 성장하며 마나 감응력도 늘어났으니, 지금 자신의 마나 감응력이라면 놈들이 은폐 마법을 쓴다 해도 그 마나의 흐름 자체를 추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놈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크릉!”
그것은 월랑 역시 마찬가지.
주변에 넘치는 마인들 때문에 냄새가 가장 진할 것이 분명한 셋의 위치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조리 쳐 죽이면 튀어나오겠지.’
월등히 성장한 힘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할 수 있어!’
콰아아아아아앙!
“크하하하!”
한 방, 한 방에 전력을 실은 스탬프가 적들을 분쇄하고.
우우우웅.
그렇게 소모된 마나를 강력해진 영혼의 힘과 초월무구 아니무스가 다시 급속도로 회복시켰다.
“괴, 괴물!”
“정보가 다르잖아!”
“전부 피떡으로 만들어 주마, 쓰레기들!”
꽈아아앙!
마인들은 속절없이 비명을 내지르고, 타이니는 살벌한 위용을 뽐내며 종횡무진하던 그때.
다시금 거대한 마기가 타이니를 덮쳤다.
다만, 이번에는 그 종류가 조금 달랐다.
- 묶어라.
- 멈춰라.
- 옭아매라.
“윽!?”
저주가 소용없음을 벌써 깨달았는지, 저주 대신 냉기와 무거워진 공기, 바닥에서 솟구친 검은 넝쿨이 그를 옭아맸다.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쏟아지는 마기.
하지만 덕분에.
‘찾았다.’
오히려 놈들의 위치를 얼추 잡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 지금이다!
숲 저편에서 고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타이니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바닥의 온도를 느끼며, 그제야 잊고 있었던 놈들의 무기를 떠올렸다.
‘폭뢰!?’
그의 눈이 부릅떠지는 순간.
꽈아아아아아앙!
타이니와 마인 몇 명이 서 있던 지면 전체가 붉은 불꽃에 휩싸이며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