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에스티나
- 그동안 고마웠어요, 모두.
짤막하게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에스티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자신과 동료들.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리란 걸 모두가 알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마수 군단의 왕을 치러 가는 지금, 하늘을 나는 괴물들이 그들의 후방에 있는 인류의 본진을 덮치게 둘 수는, 끊임없이 그들의 전진을 방해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놈들을 처리할 수 있는 이는 에스티나뿐이었으니까.
- 뭐야, 전부. 마지막 인산데 안 받아 줄 거예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도 모두가 하늘과 땅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 냉정한 검제마저도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때, 자신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 무슨 마지막 인사야. 어차피 곧 다시 만날 건데.
- ……뭐래, 이 덩치만 큰 바보가.
피식 웃으며 가슴을 툭 치던 그 마지막 웃음도.
- 여신의 품에서 다시 만나자, 타이니. 그땐…….
그녀가 뒤돌아서서 건넨 마지막 인사도, 기어코 쏟아진 눈물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었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답을 찾지 못했다.
인류의 숨통을 조여 오는 다음 ‘강림’ 시간은 인류의 최정예 모두에게 생명을 건 도박을 감행할 것을 강요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만큼은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 내가 좀 더 강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그 생각만큼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랬었다…….
“빌어, 먹을…….”
부릅떠진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한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꿈……?’
일순간 현실감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쓰러질 때도 다시 일어날 때도 욕부터 뱉네. 변함이 없구나, 너는.”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에스티나?”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자 싱긋 웃고 있는 에스티나가 보였다.
녹색 머리와 녹색 눈동자도, 유독 화려한 빛깔 때문에 몸매가 더욱 부각되는 엘븐나이트 특유의 복장도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그래, 타이니. 나 역시도 아직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반갑다……고 해야겠지.”
마치 자신이 꾼 꿈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건네는 그녀.
과거의 동료처럼 익숙하기만 한 그 눈빛 때문에 다시 한번 혼란이 왔다.
“‘또 한 번’ 신세를 졌다. 아니, 앞으로도 더 지게 되려나?”
그게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런 그녀를 보다 보니 자신 역시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두통을 가져왔다.
“으, 으윽…….”
지끈거리는 머릿속에 펼쳐진 것은 무려 200년이 넘는 세월의 기억.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간들이 흔히 상상하는 엘프의 삶답게 상대적으로 밋밋하고 평화로운 기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
그중 한 장면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엘프로서 전성기인 지금에 비해 한참 풋풋한 티가 나는, 기대받는 유망주였던 어린 엘븐나이트가 공명심에 취해 저지른 실수.
그 실수로 인해 같은 엘븐나이트였던 부모가 죽고 만 기억.
그 죄책감에 울부짖는 순간과, 그 후 10년을 넘게 방 안에서 나오지 못한 망가진 에스티나의 모습.
그리고 그런 그녀를 끄집어내 준 한 마디.
- 죄책감이 드는 만큼, 더욱 확실하게 의무를 다해라.
자신이 맡은 일에 과하게 집착하는 성정이 형성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읽혔다.
전생에도 들은 적 없는 그녀의 아픈 기억.
절로 복잡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데.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걸 보니, 너도 내 기억을 읽었나 보군. 뭐, 그래도 나만큼 놀랐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에스티나가 피식 웃으면서 꺼낸 말에 그제야 다시 현실감이 들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과 표정.
“하…….”
그것이 전생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 덕에, 그녀의 모습이 쉽게 공감되었다.
‘다행이네.’
힘들게 설득할 필요가 없어서 잘됐다 싶었는데, 그 생각을 짐작한 듯 에스티나가 딴지를 걸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자제하도록 해. 이건 너무 위험해. 특히 신전, 갓 핸드 그 양반한테는 절대 안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솔직히 다시 하래도 할 자신은 없지만, 대답은 쉽게 나왔다.
“아…… 당연하지.”
갓 핸드 그 양반하고 영혼의 교류가 일어났다가는, 신전의 추살령을 걱정하기 전에 자신이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몇백 년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릴 정도로 머릿속의 90%를 신앙심이 차지하는 인간이니까.
“날 뭘로 보고.”
“뭘로 보긴, 덩치만 큰 바보로 보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순히 설득하는 당초의 목표를 넘어, 전생의 동료였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기까지 하는 에스티나의 모습에 적지 않은 안도감이 든 것이다.
다만 조금 이상한 것은.
“……기억을 봤다 해도 내 입장에서 봤을 텐데, 지금의 태도는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전혀. 흠, 오히려 네 입장에서 봤기에 더 신뢰가 가지.”
“뭐?”
“음, 이해가 안 가나? 네가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알잖아. 그리고 네 기억을 보면, 전생에 내가 널 어찌 생각했을지 대략 다 짐작이 가거든.”
“……그런가.”
“뭐, 게다가 이젠 네가 그렇게까지 날뛰었던 이유도 짐작이 가고.”
“음?”
갑자기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에스티나.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누나의 일. 슬픈 일이지만, 네가 거기에 매여 살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그 말에 타이니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자, 그 모습을 본 에스티나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다. 이건 내가 너무 갔네. 미안해.”
“……아니, 괜찮다. 뭐 그런 거 가지고.”
에리나 누나의 일은 그의 역린이긴 했지만, 그것을 언급하는 의도가 시비인지 걱정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수양이 얕지는 않았다.
그러자 에스티나가 다시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전생의 내가 사람은 잘 봤나 봐.”
음?
“그건 또 무슨 말……?”
“아니, 아니야. 일단 쉬어. 나 대신 오버리바운드가 온 건 알지? 지금의 너라도 최소 한 달은 쉬어야 할 거야.”
그녀가 너스레와 함께 옆구리를 푹 찌르는데.
“윽.”
온몸에 쩌릿하게 퍼지는 통증에 자연스레 신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나선 게 무색하게, 에스티나의 부상을 자신에게 옮긴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에스티나에게 영구적인 후유증을 남기는 것보다야 자신이 한 달 앓고 마는 것이 훨씬 나을 터였다.
다만.
“……젠장.”
애초에 설득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에스티나를 찾아온 건데, 한 달을 통째로 날리게 생겼으니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어? 그렇게 나오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데?”
“아, 아니. 난, 그 뜻이 아니라…….”
황급히 손을 내젓는 타이니를 보며 에스티나는 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현생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웃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정령술을 배우고 싶어 한단 것도 알겠으니 잠시 기다려. 웨이브 중이라도 낮엔 여유가 있으니까.”
“하, 하지만 지금 내 상태가……?”
“정령술 수련은 꼭 마나가 없어도 되거든.”
“뭐?”
“겪어 보면 알아. 그럼 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이만.”
찡긋 윙크를 남긴 에스티나가 그 말을 끝으로 간이 천막에서 사라지자, 타이니 역시 결국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최선의 방향으로 일이 풀리게 된 것이다.
거기다.
“확실히 달라.”
딱딱하고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검제에 비하면 에스티나는…….
쿨럭.
“아, 아니지. 썩을! 내가 왜? 아놔, 그 영감…….”
진짜 무섭다는 건 아니지, 암. 자존심 상하게시리. 흠, 흠.
아무튼 검제나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웨폰 마스터,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사신……. 그들을 만났을 때와는 달리, 전생에도 친했던 옛 동료가 그대로 돌아온 느낌은 특별했다.
자연스레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 * *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몬스터들의 산발적 공세가 끝나자, 엘븐나이트들은 다시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처음 타이니가 지목했던 세 명의 엘븐나이트 중 남은 한 명, 중상을 입은 탓에 도망치지 못한 엘프가 있는 곳으로.
“……정말 입을 열지 않겠다는 말이냐, 유리엘?”
타이니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어조에, 묶여 있던 창백한 안색의 금발 엘프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엉뚱한 말을 꺼내 들었다.
“에스티나 님, 당신은 지치지 않으십니까?”
“뭐?”
“왜 우리가! 우리 엘프가 더러운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가 저 더러운 인간이나 오크, 드워프 놈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에스티나가 굳은 얼굴로 죄인을 바라보는데, 곁에 있던 라므엘이 눈치를 보더니 슬쩍 앞으로 나섰다.
“우리의 원죄다. 조상이 지은 죄를…….”
“조상이 지은 죄를 왜 우리가 갚아야 합니까!? 심지어, 진짜 그 죄를 지은 자들은 죄다 마계로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끝까지 인류와 함께했던 이들의 후예입니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악마추종자 엘프 유리엘은 동조를 구하는 듯 주변의 엘븐나이트들을 일일이 돌아보며 눈을 맞추었다.
“우리가 왜 여기서 피를 흘려야 합니까!? 대체 왜…….”
그에 일부 젊은 엘븐나이트들의 눈빛이 무거워지는 것을 본 에스티나가 싸늘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차라리 마계에 넘어간 조상들과 같은 길을 가겠다고 생각한 건가?”
“……저, 저는 억울했을 뿐입니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평생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요!!!”
이제는 거의 고함을 지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울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흔히 말하는 ‘엘프답지 않은’ 욕망이 가득 느껴지는 말.
이성적인 엘프라면 당연히 거부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에스티나는 그 순간 일부 젊은 엘프들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자신도 젊은 엘프에 속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타이니의 기억을 보기 전이었다면, 그 광경은 아마 그녀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에스티나는 달랐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세계수가 불타고 성물조차 잃어버린 미래, 그 시기 엘븐나이트들은 고작 1,000여 명에 불과했다.
현재 1만이 넘어가는 엘프의 정예들이 십 분의 일도 남아 있지 않은 말세.
그런 광경을 보고 나니, 젊은 엘프들의 감정적 일탈 정도야 그녀를 흔들지 못했다.
그렇기에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욕망으로 인해 의무를 저버린 엘프에게 허락된 것은 죽음뿐이다.”
“수호자님, 저는……!”
스각.
배신자 유리엘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목이 떨어졌다.
털썩.
마치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로 생을 다한 듯, 고함을 지르던 표정 그대로 떨어지는 머리.
그와 동시에.
푸스스스스.
순식간에 썩어 들어가며 악취를 풍기는 시신.
그 광경을 보며 에스티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검을 수납했다.
달칵.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 단숨에 끝을 내 준 에스티나는 주변의 엘븐나이트들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뿌렸다.
“오늘 일은 몬스터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 비밀로 한다. 그리고 웨이브가 끝나는 즉시, 경계 전역에 흩어진 엘븐나이트들과 레인저들을 한곳에 모은다. 그때 일시에 배신자를 색출하겠다.”
엘븐나이트의 수장, 세계수의 수호자가 종족 내부의 수술을 위해 칼을 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