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악마추종자? 엘프?
스피릿 웨이브(Spirit Wave), 정령의 파도.
기술의 이름은 단순했지만, 덩치를 극대화한 대정령 카일룸에게 오러를 씌우는 것만 해도 기경할 일이었다.
심지어 5개의 분신을 ‘더’ 만들어서 사방을 초토화시키니, 그 기술의 난이도는 실로 극악하다 못해 신비롭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그것도 지금이 아닌 전생의 타이니가 그리 느꼈을 정도니, 당연히 그 위력도 불문가지.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격하의 상대라면 휩쓸리는 순간 가루가 되어 버릴 공격을 시야에 닿는 모든 곳에 쏟아붓는,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었다.
‘역대 세계수의 수호자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기 위해 개발한 것을 자기가 완성시킨 기술이라 했던가.’
한 번 사용하면 에스티나 역시 탈진할 정도지만, 대군을 상대할 때는 어떤 대마법보다 강력한 기술임에 틀림없었다.
거기다 전생의 에스티나는 저 기술에 더 높은 경지를 향한 답이 있다고 믿었었다.
- 7개체의 카일룸을 다루게 되면 오러마스터가 되지 않을까? 뭐, 50년째 하는 고민이지만 말이야.
그때 그를 비롯한 동료들은 웃고 말았다.
오러마스터의 경지는 어떤 수단으로도 닿을 수 없을 듯 막막하게만 보였으니까.
하지만 정령술사가 되고 영혼의 힘에 대해 어렴풋이 깨달은 지금, 타이니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었어. 에스티나가 우리 중에 가장 오러마스터에 가까웠던 거야.’
- 정령에 오러를 덧씌우는 게 아니라, 오러로 내가 아는 정령을 일순간 실체화시키는 거야.
에스티나는 그걸 스피릿 오러(Spirit Aura)라고 불렀다.
‘정령화된 오러’라고 하던가?
정령술사가 된 지금도 감조차 잡히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렇기에 현생에서의 만남이 더 기대되었다.
스피릿 웨이브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러, 혹은 마나로 정령의 또 다른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기술이라면.
‘그걸 배울 수만 있다면 오러마스터에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오러로만 가능한 기술이거나 정령술사로서 7~8단계에 올라야 쓸 수 있는 기술이라 해도, 이론을 기억해 두는 것만으로도 훗날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타이니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는 이유에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그것보다는.
“오랜만에 보겠네, 에스티나.”
검제나 웨폰 마스터, 사신과는 달리 정말로 친했던 옛 동료와의 재회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컸다.
점차 가까워지는 마역과 대수림의 경계선.
그곳에 있는 일단의 엘프들이 눈에 들어오자 타이니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하지만 그가 다가간 순간.
“♬!?”
“♬♪!?”
그를 발견한 엘프들 사이에서 일순간 소란이 일더니.
파바바바박.
달려가던 그의 앞으로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엘프들이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공용어로 소리치는 순간에야 타이니는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깨달았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마수의 핏물을 전신에 뒤집어쓴 흉측한 모습이었음을.
“아, 이런…….”
오랜만에 옛 기억에 취해 날뛰다 보니 가장 단순한 것을 잊었다.
파아아앙.
황급히 마나를 동원해 핏물을 대충 털어 내는데.
“마나를 어떻게 저렇게?”
“인간?”
“……검은 머리?”
엘프들이 오히려 더 경계하는 기색을 띠자 타이니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최근에 퍼진 명성 때문인지, 한동안 머리 색에 대해 걸고넘어지는 자를 본 적이 없던 터라 더욱.
그러나 이내 정신을 다잡은 타이니는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엘븐하임에서 에스티나 님을 찾아온 외부인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황급히 말을 꺼내는데, 무리에서 가장 앞서 나온 엘프가 그 사이 이미 월랑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오, 정령? 인간 정령술사인가요?”
“어…… 그렇습니다.”
역시 엘프는 엘프인가.
자신의 말보다 월랑에게 관심을 보이는 엘프의 모습에 헛웃음을 짓던 타이니의 시선이 자연스레 후방의 엘븐나이트들에게 향했다.
마나를 품은 듯한 푸른색 금속 갑옷 차림의 엘프들이 전선 여기저기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한데 그 갑옷의 모양이 인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뒤집어쓰는 형태가 아니라 가면처럼 관자놀이와 귀 부근만 가린 투구 아래로 금속 초커가 목을 감싸고 있다. 그 밑으로는 활을 쓰는 어깨와 급소인 가슴, 그리고 하반신의 급소와 고관절 부근만을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을 광경.
더 큰 문제(?)는 남자 엘븐나이트들도 거의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어우 씨.’
한 남성 엘프와 눈이 마주친 타이니가 본능적인 거부감에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금속을 제련하고 광물을 캐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자연 파괴를 혐오하는 엘프들은, 그들 중에서도 희귀한, 금속을 다루는 소서러가 달빛의 마나로 자연에서 뽑아낸 ‘마나 메탈’만을 갑옷의 재료로 사용한다.
당연히 물량이 희귀할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최소한의 급소만을 가리는 형태를 선택한 것이다.
그 자연 친화적 차림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엘븐나이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와, 털 고운 것 좀 봐. 어르신은 어디서 오셨을까요?”
“크릉.”
“늠름하기도 하셔라. ♬♪♬♪?”
“킁.”
눈앞의 엘프들은 이미 적개심을 완전히 버린 듯, 공용어와 엘프어를 섞어 가며 월랑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래도 안에 천이라도 좀 두르지. 뭔 전통인지…….’
타이니가 속으로 투덜대는 와중에, 그들 중 유난히 짙은 녹색으로 빛나는 갑옷 차림의 엘프 한 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 엘프 중에서도 유독 키가 커 보이는 엘프가 옅은 녹색 머리를 바닥에 늘어트린 채 쓰러져 있는 광경.
“에스티나…….”
자연스레 반가운 마음이 솟구치는 그때,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자신을 발견한 전방의 엘븐나이트들 중 몇몇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갑자기 에스티나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표정과 행동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싶던 때.
“크르르!”
엘프의 손길을 즐기고 있던 월랑이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으르렁거렸다.
자연스레 영혼으로 전해진 정보를 통해, 그 세 명의 엘븐나이트의 심장에 어려 있는 마기가 타이니의 심상에도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타이니는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악마추종자!!!!”
우렛소리 같은 고함이 주변의 시선을 끌어모은 그 순간, 타이니의 손에서 스탬프가 벼락처럼 놈들을 향해 던져졌다.
동시에 월랑이 자신을 둘러싼 엘븐나이트들을 뛰어넘어 그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앙!
타이니의 행동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데다가, 먼저 나선 엘프들이 월랑의 존재를 확인하고 마음을 놓고 있던 차였다.
그 상황에서 노을빛 마나를 머금은 워해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빙글빙글 돌며 날아오는데, 밤을 새운 전투 탓에 탈진해 있던 대부분의 엘븐나이트는 움찔하지도 못한 채 그 망치가 향하는 곳을 눈으로 좇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목표가 된 대상, 마기를 품은 엘븐나이트가 창백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드는 순간.
타아아아아아앙!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스탬프가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을 튕겨 낸 것은 몸체에 새겨진 고풍스러운 문양 위로 7가지 빛깔을 은은히 뿜어내는 활이었다.
세계수의 수호자에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초월무구, 아르쿠스(Arcus).
즉 조금 전까지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녹색 머리의 엘프, 에스티나가 타이니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쿨럭.”
창백한 안색의 그녀가 기침과 함께 옅은 피를 토해 낼 때.
“이런!”
이미 그 앞에 도착한 타이니가 월랑의 등 뒤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월랑이 에스티나의 뒤쪽에서 검을 빼 들고 그녀의 등을 찌르려던 엘븐나이트를 덮친 것은 거의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결과.
“크앙!”
쾅.
푸확.
피를 토해 낸 엘븐나이트가 튕겨 나가자마자.
“인간!”
“적이다!”
“♬♪!”
한 박자 늦게 전장에 다시금 살기가 번지며, 무수한 활들이 타이니를 겨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게 무슨 짓이지, 인간?”
자신의 목에 와닿은 칼날을 느낀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항복.”
* * *
“악마추종자? 우리 자랑스러운 엘븐나이트 중에?”
에스티나의 적의 어린 시선을 받은 타이니는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탈진 상태에서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미약한 오버리바운드가 온 듯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좋게 풀고 싶었지만.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오직 당신을 구할 생각뿐이었습니다.”
“인간의 명예라. 그런 말을 믿기에는 상황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명예로운 엘븐나이트를 모욕해 놓고서!”
에스티나의 눈빛은 그 말을 듣고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
옆에 있던 주황색 머리 엘프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는 순간 에스티나의 눈이 슬쩍 커졌다.
“……늑대의 정령, 검은 머리. 그렇군. 그대가 그 광휘의 기사인가? 악마추종자들의 음모를 두 번이나 막아냈다는?”
마역의 확산을 막고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종족이니만큼 악마추종자에 대한 적대감은 엘프족이 최고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상황이 좋게 풀릴 것 같아 황급히 대답하려는데.
“예, 맞습…….”
“그리고 수행자 일레인을 죽였다는 그 인간.”
덧붙여진 에스티나의 말에는 다시금 한숨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엘븐하임에서 결론을 짓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그대가 내 동료를 죽이려 한 사실이 없어지진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을 구하려 한 것뿐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정말 적이었다면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을 부축했을 때를 말한다는 걸 깨달은 에스티나의 눈빛이 그제야 흔들렸다.
엘프치고는 한창 젊은 200세 초반의 나이에 소서러가 아닌 마나유저로 오러익시더급에 오른 그녀는, 신체 능력이 타 종족에 비해 떨어지는 엘프의 체질상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종족의 한계는 벗어던지지 못했으니, 보통 6~700년을 사는 장생족인 엘프 특유의 느린 신진대사에 따른 더딘 회복 속도는 그녀의 뚜렷한 약점이기도 했다.
스피릿 웨이브를 사용하여 몬스터 대군을 쓸어 버린 직후 내상까지 입은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다면, 최소한 치명상을 피하지 못했을 터.
“……그건 반박하지 못하겠군.”
복잡한 생각을 거친 끝에 에스티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타이니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공격하려 했던 엘븐나이트 외에도 두 명의 악마추종자가 더 있습니다. 저를 의심하시는 것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들 또한 따로 격리를 부탁드립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유리엘은 내 충실한 동료였다. 대체 그렇게까지 의심하는 이유가 뭐지?”
“그거야…….”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말은 그만! 그녀가 정말로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이전에도 기회는 많았다.”
“그거야 제가 왔기 때문이겠죠.”
“무슨 말이지?”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악마추종자들이 마기를 숨겨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정체가 발각될 위기라면 당신의 목숨이라도 거둬 가겠다. 뭐 그런 생각이었겠죠?”
그 말에 에스티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흥. 목숨이라‘도’? 내 목숨을 고작 그 정도 가치로 보는가?”
“놈들의 최종 목적이야 세계수나 성물일 테니까요. 아, 물론 저는 그보다는 당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그 말에 에스티나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