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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30화 (130/500)

130화. 세계수

“우리 수호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

에우리나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어지며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왜?”

“만나서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시나 제 예상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서요.”

“예상이 틀어진다는 건 악마추종자들의 이야기 말인가? 회장에서는 그리 자신하더니?”

“뒤늦게 다른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기에 놈들이 엘븐하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벌일 수도 있다고.”

“호오…….”

에우리나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짐에도 타이니는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그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법.

스스로의 실책을 인지했다면, 억지로 우기기보다는 빠르게 인정하고 더 나아질 길을 찾는 것이 당당한 삶을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니까.

“……인간이 그 나이에 그 능력이라면, 고집이 셀 만도 한데 말이야.”

다행히 그 태도가 에우리나의 눈빛을 조금은 온화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러나.

“하지만 나 역시 수호자의 현 위치를 모르네. 아마 다른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예?”

“몬스터 웨이브의 작전 지휘권은 오롯이 수호자에게 있지. 지금 그녀가 어디에서 어떤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지는 일선의 엘븐나이트들만 알고 있을 테니까.”

“하…….”

타이니의 입에서 절로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망했네.’

대수림의 종단 길이가 곧 몬스터 웨이브의 수비 범위.

그리고 그 길이는 아스란 제국의 남북 길이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에우리나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마 어머니 세계수는 알고 있겠지만, 그분이 계신 곳에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는데 말이야…….”

그리 말끝을 흐리면서 타이니를 바라보는 에우리나.

늙은 엘프의 눈빛에는 묘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뭘 어찌하길 바라서 한 말이 아니야. 만약 자네가 정말 세간에서 말한 영웅이라면, 어머니 세계수께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실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아니면 수호자와 장로 14명이 모두 동의해야 외부인을 들일 수 있네.”

“…….”

그 말에 타이니는 더욱 막막해질 뿐이었다.

“만약 세계수께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다면, 그 또한 몇백 년 만의 일. 우리 일족에게는 경사이기도 하지. 기대해 봐도 괜찮겠나?”

아니, 뭘 최소한의 방법이라도 알려 주고 말을 해야…….

‘무슨 영웅에게 모습을 드러내?’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자네의 말을 장로회에 전해 놓겠네. 그러니 자네는 자네의 가치를 보여 주게.”

에우리나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에야 더 물어볼 수도 없다…….

타이니가 그렇게 생각할 때.

“자네의 정령, 엘븐하임에서는 아무 데나 소환해 놓아도 괜찮다네. 정령도 좋아할걸? 기왕이면 높은 곳에서 말이야.”

내내 그와 부딪치기만 하던 엘프의 장로가 돌아서며 내뱉은 말 하나에 타이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거대한 숲 같은 엘븐하임의 나뭇가지 위를 신나게 뛰어다니던 월랑은, 이내 가장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안착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아 있었을 적 고향의 숲과는 많이 달랐지만, 물씬 풍기는 숲 내음이 달빛 샤워를 더욱 기분 좋게 만들었다.

“좋아?”

“컹!”

뒷덜미를 긁어 주며 미안한 듯 꺼낸 계약자의 목소리에 월랑은 격렬한 긍정을 표했다.

“미안하다. 자유를 많이 주지 못해서.”

“컹! 컹!”

괜찮다.

하늘 가득 떠오른 보름달을 보며 월랑은 고양된 기분을 그대로 표출해 냈다.

“아우우우우우우!”

엘븐하임의 가장 높은 가지 위에 올라 울부짖는 늑대.

인간의 도시였다면 그 즉시 경비대가 쫓아올 만한 일이었지만, 엘븐하임에서는 오히려 감탄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

“♪♪♬!?”

“♬♬♬!”

대다수의 정령술사들이 몬스터 웨이브로 엘븐하임을 떠난 지금, 오랜만에 보는 정령, 그것도 동물 정령의 모습에 점차 많은 엘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름달 아래 모여든 그들의 감탄사가 노랫가락처럼 엘븐하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할 때.

타이니는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을 들었다.

정확히는 그가 아닌 월랑에게 전달되는 영혼의 노래.

- 아아아아아♪!

얼핏 엘프어와 비슷하게 들리는 노랫소리였지만, 왜인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반갑다?’

처음 보는 정령에게 전하는 그 근원의 목소리. 바로 이 세상에 정령이란 존재가 있을 수 있도록 안배한 신화의 파편이 보낸 인사였다.

“……이게 세계수.”

장성한 손주를 처음 보는 할머니의 인사 같은 느낌이랄까.

- 잘 왔다, 아가야.

그런 느낌을 담은, 월랑을 향한 선율은 푸근하기 그지없었다.

“컹!”

그 감정을 느낀 월랑 역시 그 선율에 호응해 하늘을 향해 기쁘게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러고 나서야 비길 데 없는 마나 감응력을 가진 자신이 왜 여태까지 세계수나 성물의 결계 파동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컹! 컹!”

“알아. 허공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네.”

대수림을 유지하는 생명의 근원. 그리고 멀리 보자면, 대륙 전체의 숲의 근원이자 엘프의 조상이며 정령의 뿌리.

이 세상에 생명을 뿌린 ‘나무’라고 이름 붙은 그 신화 속 존재는 뜻밖에도 엘븐하임의 하늘에 있었다.

우우우우웅.

그것도 성물의 결계와 함께, 존재감을 흐리는 완벽한 은폐장을 펼친 채로.

타이니 역시 월랑을 통해 전해져 오는 영파(靈波)가 아니었다면, 탐색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높은 곳에 말이다.

- 아아아아아♬!

“오라는 뜻 같지?”

“컹!”

“그래, 가자!”

결심이 서는 순간 늑대와 그의 기수가 허공을 밟으며 하늘 위로 내달렸다.

그리고 엘븐하임에서 가장 높은 나무의 두 배 높이는 더 올라가는 순간.

타이니는 자신과 월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막을 통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스아아아아아아.

“어윽!?”

아득할 정도로 강렬하게 전해져 오는 마나와 생명의 향기 속에서 신화 속 존재를 마주했다.

거대하다.

세계수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

어두운 밤하늘 때문인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봐야만 멀리 가지와 잎이 보였다.

이런 거대한 존재가 어찌 은폐장 같은 결계로 숨겨져 있었는지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느껴지는 것은 말 그대로 피부에 와닿는 생명력.

넘쳐흐르는 생명력이 발산하는 존재감이 너무나 거대해서, 그 뿌리 위에 거대한 수정, 성물 유스티티아가 놓여 있다는 게 한참 뒤에나 인식될 정도였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전생의 내가 녹턴을 들고 전력으로 공격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억지로 파괴한다 해도 바로 재생해 버릴 것 같은 강력한 생명력인데.

‘이런 게 불탔다고?’

전생에 악마추종자들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존재가 불타올랐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뒤이어 떠오르는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악마추종자 놈들 중 전생의 자신보다 강한 놈이 있을 리는 없으니.

‘폭뢰. 황실에서 터진 것의 배 정도 퍼부었겠군.’

아무리 신화 속 존재라곤 하나, 느껴지는 자아는 희미하기만 했다.

그러니 그 거대한 생명력과 마나를 가공하여 오러 막을 발생시키거나 공간을 차단하거나 절단하는 등의 권능에 의거한 방어 기술을 쓰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타이니가 엘프들에게 폭뢰의 위험성을 알리고 확실한 방비를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허공을 밟으면서 세계수에게 다가간 월랑이 그 뿌리에 대고 뺨을 비비고 있었다.

존재감을 키울 겸 덩치를 최대로 부풀린 월랑의 크기는 체고 2.5m, 체장 5m에 달했다.

그런 거대 야수가 뺨을 비비적거리는 것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 법도 했지만, 세계수의 압도적 크기에 비하자니 그 외에 다른 단어로는 표현이 안 될 것 같았다.

“……귀여운 척 싫다더니.”

“……컹!?”

타이니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월랑이 스스로 한 일에 당황한 듯 화들짝 놀라며 세계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크르르.”

애써 인상을 써 보는데.

- 사아아아♪

다시금 쏟아지는 세계수의 영파에 월랑은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웃으며 다시 뿌리에 볼을 비비적거렸다.

무슨 현혹이나 마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세계수가 영파를 통해 월랑에게 전하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월랑의 영혼에 스며드는 것이 보였는데, 타이니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절대 해롭지 않은, 오히려 녀석에게 도움이 되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바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마 이게 바로 엘프의 정령들이 관례적으로 받는다는.

“세계수의 축복인가?”

- 아아아♬.

그 말이 맞다는 듯 울리는 영파.

고양되는 월랑의 영혼을 통해 전해진 감각에, 타이니 역시 자연스레 미소가 나오고 안정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 결계 안에 들어선 이후 내내 공간 밟기를 쓰고 있는데도 마나의 소모는 아주 적기만 했다.

그 모든 것이 세계수에서 자연스레 뿜어져 나와 월랑에게 스며드는 마나 때문이라는 것을 타이니는 그제야 자각했다.

월랑의 영혼에 더해진 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세계수가 그들을 호의적으로 대한다는 것 또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수 님.”

순간 인간의 언어로 말해도 될지 미심쩍었지만.

- 우우웅♪.

다행히도 바로 긍정의 뜻이 전해져 왔다.

그래서 타이니는 내친김에 더욱 길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염치없게도 하나만 더 여쭙고자 합니다. 작금의 수호자, 에스티나 님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급하게 전할 일이 있습니다.”

말로는 전해지지 않을지도 모르니, 뿌리에 손을 얹고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너무 긴 이야기였을까.

‘답은……, 없나……?’

정적이 이어지자 타이니가 실망한 표정으로 뿌리에서 손을 떼는 순간.

우웅.

“컹!?”

여전히 뿌리를 볼을 비비고 있던 월랑의 영혼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있었다.

대수림의 서쪽 끝 어딘가에서 무수한 괴물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오러 화살을 날리는 에스티나의 모습이, 흐릿하지만 확실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감사합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나온 말은 뻔한 인사뿐이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은 이게 나무에게 할 만한 말인지 잠시 망설여지긴 했지만.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특히나 작은 공 같은 물건들이 갑자기 다가올 때는요.”

그는 다시금 뿌리에 손을 얹고 폭뢰의 이미지를 전하려 애썼다.

과연 그 뜻을 알아들을까 싶었는데.

- 아아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세계수가 의문을 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파심입니다. 그냥 기억해 두세요.”

타이니는 마치 있어 본 적도 없는 집안 어른에게 당부하는 느낌으로 뜻을 전했다.

그러자 이내.

샤라라랑♬.

일순간 그의 주변에 따스한 바람이 불며, 어두운 밤을 잠깐이나마 환하게 밝히는 빛이 반짝였다.

특별한 힘이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분을 쾌적하게 해 주는 향기에 영혼이 고양되는 듯한 뿌듯함이 느껴져 절로 미소가 나왔다.

짧은 시간의 만남에 왜인지 조금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뿌리에 놓여 있는 성물 유스티티아에도 눈길이 갔다.

가지고 가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지만.

‘이 은폐장 자체가 세계수의 능력과 성물 결계가 합쳐진 거야.’

그러니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컹!”

- 아아아♬!

아쉬움을 떨쳐 낸 인사에 세계수가 다시 화답했고, 타이니와 월랑은 허공의 결계를 넘어서 엘븐하임의 상공으로 다시 튀어나왔다.

그리고 모든 엘프가 노래하듯 그를 주시하는 광경 속에서.

“……바로 가자, 마역으로.”

늑대와 그 기수는 서슴없이 서쪽을 향해 허공을 밟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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