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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28화 (128/500)

128화. 자각

“아무리 그래도 혹시나……!”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인지, 장로 에우리나는 마지막까지도 타이니의 말이 틀렸을 가능성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깽!

스아아아.

“저런…….”

“확실하군.”

마기를 품은 늑대가 죽는 순간 뿜어낸 마기와 순식간에 썩어 버리는 사체는 타이니의 말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때부터 에우리나는 침울한 눈으로 입을 열지 않았고, 심문장은 단숨에 회의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새소리 같은 엘프어와 공용어가 난무한 끝에 나온 결론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몬스터 웨이브 기간이니, 현실적으로 당장 파견한 엘븐나이트들을 모두 불러들일 수는 없어. 벼룩을 잡자고 집을 태우는 격이야.”

“이해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뭐라 흠을 잡을 수도 없었다.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몬스터 웨이브가 하필 이 시기에 발생한 것도 의심스러웠지만, 악마추종자들이 마역의 몬스터들까지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엘븐하임은 이미 불타고 있었을…….

‘아니 잠깐만,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데?’

전생에 엘븐하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세계수가 불타고 엘프들이 가지고 있던 7대 성물 중 하나인 유스티티아(Justitia)가 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계수는 엘프의 최고위층만 아는 결계에 숨겨져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내부에서 누군가가 일을 꾸미더라도 시선을 끌어 줄 외부의 소란 역시 필수였을 것이다.

‘에스티나가 있다면, 감히 내부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 굳이 완벽한 조종이 아니더라도 웨이브 시기만 조율할 수 있어도 그녀를…… 아니, 그럼 설마 혹시 이 시점에 벌써 일을 벌이고 있는 건?’

그렇게 연이어 소름 돋는 생각이 떠오르자 다시 주변 장로들을 훑어보지만.

‘없지? 확실히?’

- 컹.

월랑은 이 중에 마기에 물든 이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그 후셀 같은 놈도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

마기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나라와 종족 전체를 배신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생각에 타이니는 다시금 장로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려 애썼다. 특히나 끝까지 그에게 반감을 드러냈던 에우리나 장로와 그 근처의 무리들을 말이다.

그러던 순간, 대장로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마기를 쫓는 자, 광휘의 기사여. 그대는 악마추종자들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미 엘프 내부에 악마추종자가 있을 거라 확신하는 어조.

어쨌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마기가 없는 배신자가 있다고 한들 당장 찾아낼 수는 없어.’

그렇다면.

“성물 유스티티아와 세계수가 목표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엘프들의 경각심을 더욱 일깨움으로써 보안을 강화하는 수밖에.

그 말에 장로들의 얼굴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감히…….”

“어머니 세계수를…….”

“미친놈들이로고.”

웅성웅성.

‘역시…….’

세계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나, 14명의 장로 중 성물 유스티티아를 언급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성물보다 더욱 강력한 신화의 파편, 종족의 근원인 세계수가 있기에 유스티티아의 능력과 가치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느낌.

아마 황실이 황궁 결계를 믿고 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세계수에게는 황궁 결계처럼 침입자를 제약하거나 밀어내는 힘은 없지만.

‘뭐, 엘프들도 생각이 있다면 성물과 세계수를 서로 가까운 곳에 두었겠지. 아니, 엘프들도 성물을 옮길 수는 없으려나?’

엘븐하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 아니 나무 안에 있음에도 성물 결계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세계수와 존재감이 섞인 걸까. 아니면…….’

생각이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물을 밀어내는 성물의 결계와 마기를 정화하고 생명을 잉태하는 세계수의 힘은 서로 호응 보완이 가능한 관계였으니까.

‘같은 공간에 있다면 일이 벌어져도 막기가 한결 수월할 텐데. 물어볼 수도 없고…….’

신화 속 신들의 정원에서 내려온 생명의 근원, 세계수는 이 넓은 대수림의 모체가 되는 나무.

엘프들은 그들의 초대 조상인 하이엘프들 역시 세계수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기에, 그 세계수의 능력을 떠나서라도 보호와 관리에 편집증적인 집착을 내보인다.

자신이 물어본다 한들 절대 그 위치를 말하지 않을 터였다.

또 그렇기에 내부의 배신을 확신하는 바이고 말이다.

“웨이브가 끝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걸세. 그대는 그때까지도 엘븐하임에 머물 생각이 있는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좋네. 우리가 범한 실례는 그동안 충분히 보답하기로 하지. 에우리나.”

“예, 대장로님.”

“그대가 ‘직접’ 손님의 응대를 맡게.”

“예!?”

장로 에우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대장로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중요한 손님께 신의를 보이기 위함이네. 거절하지 말게.”

담담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에 에우리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런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일레인이 어떤 아이인지 아는가, 인…… 흠, 손님?”

“알아야 합니까?”

그 퉁명스러운 대꾸에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는 에우리나.

그녀의 눈빛에 분기가 어렸다.

“……예의가 없군, 자네.”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나름대로 풀어 보고자 건넨 말에 심기를 건드는 반문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타이니는 또다시 태연하게 그녀의 속을 긁었다.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흐…….”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은 에우리나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그대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가출했다가 인간에게 납치되었던 아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작정하고 시비를 걸어서라도 에우리나를 떠보려 했던 타이니도 그 말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의미가 얼추 짐작되었으니까.

“설마…….”

“……아는가 보군. 그래. 공공연한 노예제가 없어졌다고 한들, 인간 세상에서 엘프 노예는 여전히 수요가 있지.”

고대 인간의 국가에서는 노예제가 존재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 거래된 노예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같은 인간족보다는 다른 종족이었다.

애초에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자살해 버리는 오크나 수인족은 열외로 두더라도, 하늘 요정의 후예라는 엘프의 미모와 땅의 요정의 후예라는 드워프의 제작 능력을 탐하는 인간들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만큼은 엘프와 드워프도 서로보다는 인간을 더 증오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

그러다가 그것이 너무 지나쳐 일개인의 타락이 아닌 나라 규모의 사업으로까지 번지자, 분노한 엘프와 드워프의 대군이 인간의 나라들을 침공했다.

수인과 오크도 인간의 지원 요청을 외면했고, 당연히 무수한 인간 국가가 멸망했다.

‘그리고 제국이 태어났지.’

당시 희귀한 고대 핏줄의 후예라는 이유로 역시나 노예 처지였던 ‘샤우트 반 아스란’은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명목으로 들고 일어나서 두 종족의 도움을 받아 제국을 일구었다.

물론 그 뒤에 다시 두 종족과 사이가 틀어진 역사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자면 끝도 없고.

그렇게 성립된 아스란임에도 하층민들이 반쯤 노예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지만, 적어도 타 종족을 대놓고 노예로 삼는 이들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아이를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였지. 노예상과 그 아이를 팔아넘긴 자는 물론 그 관계자들까지 모조리 찢어 죽였지만, 그 아이는 이미 엉망으로 망가진 뒤였지. 그 아이가 다시 외부의 엘프들과 어울리게 되는 데만 50년이 더 걸렸어.”

“아직도 그런 미친놈들이……!”

타이니도 그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시비를 걸려던 것도 잊고 분노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에우리나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래, 여전히 그런 쓰레기들이 있더군.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다독이며 재활을 도왔네. 나 역시 그 아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뭐, 나야 300년 전 일이기는 하지만.”

300년…… 아득하게 지난 그 세월에 관해 말하는 에우리나의 눈빛에는 아직도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 분노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것인지 일레인이라는 그 흑마법사 엘프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타이니를 볼 때부터 보이던 반감의 이유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가 비참하다고 해서 지은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말은 그럴 만한 아이가 아니라는……!”

“5서클의 흑마법사였습니다, 그 엘프.”

그 말에 이번에는 에우리나가 움찔했다.

“몇 명의 사람을 제물로 바쳤을까요? 수천의 일반인을 처리한 게 아니라면, 최소 5서클급 마법사나 마나유저 10명을 제물로 바쳤을 텐데요. 혹시 그녀의 동료였던 이들 중 실종된 이는 없습니까?”

그 말에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듯 에우리나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고개를 저었다.

“……속단하지 마라.”

“아니, 어쩌면 일반인과 능력자들 반반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죄악이 과거를 이유로 용서가 될까요?”

“긴 고행의 시간 끝에 간신히 비참한 과거를 털어 낸 아이야!”

“털어 냈을지 덮어 뒀을지, 확실히 알고 계십니까? 그저 덮어 둔 것뿐이라면, 악마가 파고들 틈은 넘쳐날 것 같은데요.”

“엘프의 정신은 그리 나약하지 않아!”

“……장로님은 정말 털어 내신 것으로 보이는군요.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타이니는 이쯤에서 에우리나를 떠보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이 늙은 엘프가 그가 본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연기자가 아니라면, 지금 보이는 분노와 긍지는 진짜일 테니까.

‘적어도 악마추종자들하고 붙어먹을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상대방이 관두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힘겹게, 힘겹게 시련을 이겨 낸 아이가 고작 악마의 꾐에 빠졌다니……. 난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그 아이의 결백을 믿어 보고 싶네.”

참혹하게 일그러진 에우리나의 표정.

이 노엘프는 어쩌면 그 엘프 흑마법사에게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믿음과 현실은 다른 법이지요.”

“……엘븐나이트들이 돌아왔을 때 그 안에 악마추종자가 없다면 내 믿음이 맞는 거겠지.”

질기네, 이 양반.

“제가 해 온 일에 대해 아실 텐데요. 그걸로는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에우리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그대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대가 있는 곳에 두 번이나 일어난 일이 세 번째 또 일어나면, 그건 그대가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닌가? 이 넓은 세상에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순전히 자신의 바람에서 나온 억지 주장일 뿐.

괴로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본인도 그리 믿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

타이니로서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만약 제 말이 틀렸다면, 제 목…….”

숨을 걸겠다.

그렇게 장담하려던 찰나, 타이니의 머릿속에서 방금 전 에우리나의 말이 메아리쳤다.

- 세 번째 또 일어나면, 그건 그대가…….

그 말을 수긍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 하나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그 흑마법사 엘프를 생각하면 이번 재앙 역시 악마추종자들이 벌인 일이 맞아. 그런데 내가 두 번이나 방해했는데, 또 내가 있는 곳에서 일을 벌일까? 조직원이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악마추종자라도 같은 이유로 두 번의 실패를 겪는다면, 그 원흉이 있는 곳보다는 차라리 다른 데서 일을 벌이지 않을까?

흑마법사 엘프도 쳐 죽였으니 이미 엘븐하임에 올 것이라 예상도 할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든 타이니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전생의 기억, 그 정보만을 맹신하다가 놓친 허점이 가슴속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영감한테 알려야 한다. 알리고 다른 곳에서 정보도 수집해야 해. 그리고 만약…… 아니, 역의 역일지도. 그래 놓고 내가 떠나면 엘븐하임에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머릿속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왜? 말을 끝까지 안 하고?”

눈을 가늘게 뜬 에우리나의 독촉이 이어지는 순간.

“목……소리를 드높여서 사과드려야죠. 그럼요. 전 잘못은 쿨하게 인정할 줄 아는 당당한 남자입니다. 하, 하, 하…….”

그는 반사적으로 초라한 변명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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