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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22화 (122/500)

122화. 오크족의 분란

“자네, 제국의 새 황제와 친하다지?”

다시 돌아온 천막 안, 자리에 앉자마자 나온 바타르의 말은 타이니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글쎄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이 또르르 굴러갔다.

황궁의 난리를 극복하는 데 일조했고, 그 덕분에 과분한 선물도 받았다.

하지만 첫 만남부터 싸대기를 후려갈긴 데다가 황태자가 전 황제를 죽인 것을 알고 있기까지 하니, 찜찜함이 꽤 남아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서로 마음을 터놓지는 못하지만 이득은 되는 관계. 이걸 친하다고 할 수 있을까?

“……친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공적인 관계로 엮여 있을 뿐이랄까요.”

후련하게 한바탕 겨루고 난 뒤라 그런지 말이 솔직하게 나왔다.

그런데 그 말에 바타르는 이빨을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크하하, 친하다는 뜻이군. 다행이야.”

타이니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친하지 않다면 누가 감히 제국 황제에게 그런 언사를 할까. 별로 안 친하다? 공적인 관계? 크하하하!”

그, 그게 그렇게 되나?

그 호쾌한 웃음이 그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가렌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그에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은 타이니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뭐 어찌 생각하시건 상관은 없습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아, 그래. 웃을 때가 아니지. 사실 내가 일부러 자네들을 찾았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을 테지? 그게, 흠…….”

바타르는 한차례 숨을 고르더니 다시 그 험악한 얼굴을 굳히며 목소리를 낮췄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 모르스, 제국을 재앙에서 구한 영웅. 그대에게 묻고 싶네. 아스란 제국은 전쟁을 준비하는가?”

“그 모르…… 에?”

또다시 나온 모르스라는 성을 지적하려던 타이니는, 그 뒤로 이어진 말을 듣고 그대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뭔 헛소리야?’

황급히 가렌을 돌아보는데 그 역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타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족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는가?”

“금시초문입니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시는지?”

“금시초…… 뭐? 아, 모른다는 뜻인가? 흠, 그럼 제국은 아니라는 건가?”

홀로 생각에 잠긴 바타르 앞에서, 타이니와 가렌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내 바타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오크의 땅에 분란이 일어나려 하고 있네. 우리의 사촌 격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코뿔소족이 오크의 통합을 주장하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거든.”

그 말에 타이니와 가렌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이유는 방금 전과는 달랐다.

“전쟁이야 오크들에게는 일상……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도 아닙니다, 가렌 경. 오크들에게 전쟁은 곧 명예가 맞으니까요. 지금 족장의 말이 상식을 벗어난 거죠.”

타이니는 가렌을 두둔하며 뚱한 얼굴로 바타르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오크들은 최강을 가리기 위한 대전사 결투나 부족 전쟁, 혹은 사냥 등을 통해 주변의 부족들과 말 그대로 피 튀기는 생존 경쟁을 한다.

경쟁이 심화될 경우 부족 하나가 통째로 멸절되는 일도 꽤 흔했는데, 그것은 강건한 신체를 가진 오크가 50세를 넘기는 경우를 잘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 침대에서 죽는 것은 전사의 수치. 그래서 자신이 늙어 약해진 것을 느낀 오크 전사는 자신이 싸우다 죽을 전장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아마 나도 그러지 않을까 싶고.

굳이 저릭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오크의 사인으로 가장 흔한 것이 결투나 전쟁으로 인한 전사라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래서 문제지.’

몇 년 뒤에 벌어질 오크족 최악의 내란을 무슨 수로, 무슨 명분으로 막아야 할지 검제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봤지만 답을 내지 못했을 정도.

‘그런 오크가 전쟁을 걱정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거기다 그게 제국이랑 무슨 상관이야?’

타이니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바타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

“다른 이야기일세. 근처의 몇 부족을 연합하여 오크 종족 전체를 뒤집어엎으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야. 오크와 어울리지 않다는 말이지.”

바타르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무거운 눈빛으로 다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거기다 그 모든 게 그들 곁에 숨어든 외부인의 수작이라면, 최악인 거고.”

“외부인이요?”

“인간. 검은 코뿔소족의 족장 네르구이 옆에 인간들이 있다. 그 놈들이 오크답지 않게 연합이니 뭐니 책략을 쓰며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인간이?’

멍해 있던 타이니가 간신히 반론을 하려던 찰나.

“인간이 오크 족의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말입니까?”

가렌이 갈색 눈을 빛내며 먼저 물었다.

“그렇다. 그리고 나는 놈들이 제국에서 보낸 간자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에 가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능성이 없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 왕국 연합이 제국 동부의 가장 큰 위협, 수인족 왕국 웨어비스트가 북부의 위협이라면, 오크는 제국 서부의 최대 위협이다.

그것은 제국인들에게 상식이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타이니의 머릿속에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죽은 X신, 아니 황제의 헛소리.

- 대륙은 제국의 이름 아래에서 통일될 것이다. 그리고 자네는 그 선두에서 모든 영광을…….

‘설마 그 미친놈이 사전에 무슨 짓을 하고 있었나?’

순간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일단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타이니 경?!”

“호오?”

가렌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고, 바타르가 흥미로운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전의 황제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 황제는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제국 전체의 뜻도 그러할 것입니다.”

아니더라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오러유저이자 황제의 장인인 검제가 반드시.

타이니는 옛 동료에 대한 믿음을 담아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제국은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타이니 경!?”

그에 가렌은 기겁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넌 제국에 소속되는 것도 거부했잖아!?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그 부릅뜬 눈에는 차마 뱉지 못한 속내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바타르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흠, 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안 그럴 것이다……. 그런 뜻으로 들리는데?”

“……제 짐작으로는 그렇다는 겁니다.”

“타이니 경! 왜 감당할 수 없는 말을 그렇게……!?”

“좋아, 믿지.”

“족장!?”

가렌은 종잡을 수 없이 오가는 대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혓바닥은 속일 수 있어도 주먹은 정직한 법. 타이니 경의 싸움법은 진짜 사나이의 그것이었으니. 그가 명예를 건다면 나는 믿으면 그뿐이다. сдыктаьа втдпщ!”

……뭐지 이 미친놈들은?

‘너네가 뭔데 국가 간의 일을 논의하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가렌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지만, 두 사람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타이니는 바타르가 내민 거대한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갖다 대며 씩 웃었다.

“сдыктаьа втдпщ(친구를 위해)!”

“호오, 이 말도 아나?”

“좋은 친구가 있어서.”

“하하하, 그래? 이거 더더욱 믿음이 가는군.”

“……둘 다 미친 거 같아.”

꿍얼거리는 가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타이니와 바타르는 서로 덕담까지 주고받았다.

그날 저녁.

바타르는 그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 주었고, 붉은 멧돼지족의 주술사가 가렌의 애마, 산드라를 회복시켜 주기까지 한 덕에 그들은 바로 다음 날 자밍우드를 떠날 수 있었다.

거기에 세심한 배려까지 곁들여졌다.

“엘븐하임으로 간다고 들었다. 족장의 명이다. 오크족의 영역까지 내가 안내하겠다.”

키가 180cm 정도 될 법한, 오크 여전사의 말에 타이니와 가렌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하, 하…….”

그도 그럴 것이.

녹색의 피부 아래 붉은 문신이 아른거리는 근육질의 미녀가 적대적인 눈초리로 창을 겨누고 있었으니, 이건 안내가 아니라 싸우자는 의미처럼 들렸던 것이다.

게다가 이 여전사의 이름은 나른. 붉은 멧돼지 족의 순찰 대장으로, 타이니에게 전사의 증표를 헌납한 전사이기도 했으니까.

“혹시 지금 다시 결투하자는 건…….”

“아닐 겁니다, 아마. 하지만 오크족끼리도 서로 싸우는 게 일상인데, 타 부족의 영역으로 안내를 해 주겠다니…….”

가렌과 타이니가 서로 다른 이유로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 대화를 들었는지 나른이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흥. 걱정 마라, 인간. 우리 부족, 구릉 지대 오크족들과 두루 친하다.”

하지만 그들로선 그 말이 더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오크족이 주변의 부족들과 두루 친하게 지낸다고?’

전투 종족 오크에 대한 상식이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얼굴을 찌푸리자, 그 표정을 본 나른도 덩달아 인상을 쓰며 강조하듯 말했다.

“우리 족장님, 최고의 전사이자 지도자다. 무의미한 소모전으로 인한 희생, 원치 않으신다. 전사의 기량을 겨루는 것은 사냥이나 대련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 부족, 이만큼 커졌다.”

그 말에는 두 사람도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 바타르, 역시 굉장한 사람이군요.”

“아…….”

그리고 타이니는, 자밍우드에 머문 1박 2일 동안 느꼈던 미묘한 괴리감의 정체를 그제야 깨달았다.

“없었어…….”

“음?”

“아니, 아닙니다.”

전생에 바타르를 본 적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 말인즉, 그처럼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인재가 재앙의 날 이전에 죽고 말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의 죽음은 오크족의 변란으로 인한 것일 터.

‘아직은 몇 년 남은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바타르의 말이 신경이 쓰였다.

‘오크족 옆에 숨어든 인간이라…….’

아마도 선황이 벌여 놓은 일일 것이다.

그것을 황태자가 이어 나가리라 생각되진 않았지만.

“……발렌티아에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어디서 통신이 가능할까요?”

타이니는 앞서 나가는 나른에게 들리지 않게 나직한 목소리로 가렌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역시 자네도 호언장담한 게 불안한 거지?”

가렌이 씩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그게 아닌데…….’

“걱정 말게. 그럴 줄 알고 이미 붉은 멧돼지족의 친우에게 족장이 한 말을 가문에 전해 달라 말해 놨으니.”

“……예?”

“오크족이 정통 마법 대신 주술이라는 독특한 마법 체계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알고 있나?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대신 마법 통신은 안 되거든. 그래서 친우한테 부탁을 해 놨지.”

“아니, 제 말은, 붉은 멧돼지족에 친구가 있으셨단 말입니까?”

불과 어제, 본인 입으로 이곳의 오크들이 인간족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타이니의 그 미심쩍은 시선을 받은 가렌은 아무런 문제를 못 느낀다는 듯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럼. 어제 잔치에서 만난 호탕한 친우지. 그에게 부탁해 놨으니, 곧 가문에 전해질 걸세.”

“어제……요?”

“그럼, 마음이 통하면 친구지. 우정에 기간이 중요하겠나. 그 친구가 알아서 잘해 줄 거야. 어허, 뭐지 그 눈초리는? 그냥 믿게. 아니, 그 친구를 믿지 못하겠으면 나를 믿게!”

……둘 다 못 믿겠는데.

가렌의 호언장담에 타이니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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