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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20화 (120/500)

120화. 붉은 멧돼지족

“가뜩이나 민감한 시기에 갑옷을 입은 인간이라…….”

멀리서도 유독 커 보이는 덩치에 화려한 가죽옷을 걸친 오크.

100m는 될 법한 거리에서 말하는데도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리 오크의 목소리에, 타이니와 가렌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온 오크가 어느새 그들 앞에 다다르자, 그보다 조금 작은 오크 전사들이 그 좌우로 늘어섰다.

길게 땋아 늘어트린 갈색 머리에 매인 붉은 매듭만 6개.

그것은 그가 챌린저급에 이른 강력한 오크 전사이자 6명의 부인을 ‘더’ 얻을 권리가 있는 귀족이라는 것을 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철저한 실력 위주의 사회인 오크 부족에서 가장 정점에 선 인물.

달리 말하면.

“……족장?”

가렌의 입에서 무거운 음성이 나오고.

“цркцлв?”

“цркцлвыдфвд врщ?”

오크들의 시선이 이방인들에게 집중되며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퍼져 나갔다.

생각지 못한 신분 높은 오크의 등장에 가렌은 타이니에게 눈짓한 후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전사의 도전을 치른 길손입니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 들른 것뿐이니,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가 내민 손에는 붉은 멧돼지족의 증표가 들려 있었다.

굳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었는데, 그것이 통했는지 그들을 노려보던 족장 오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만 이어진 반응은 기대와는 달랐다.

“호오? 나른의 증표? 순찰 대장 나른, 그 아이를 꺾었다? 역시…….”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오크의 흉악한 인상과 어우러지니, 그것만으로 분위기가 한층 살벌해졌다.

‘역시?’

타이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스탬프에 손을 가져가는데, 가렌은 그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것처럼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하하하, 순찰 대장이라면 그 용맹한 여전사 말이군요. 그 전사는 제 옆에 있는 이 친구에게 패배했습니다. 멋진 결투였지요.”

얼핏 상대방의 적의를 더욱 부채질하는 말로 들렸지만, 오크는 긴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을 뿐이었다.

“저리 작은 몸집으로 나른을 꺾었다니, 정말 놀라워.”

험악한 표정과는 달리 연신 감탄을 내뱉는 목소리에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타이니는 자연스레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치렀던 전사의 도전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오크 여전사, 제법이었지.’

남성 오크 전사에 비해 좀 더 작고 날렵한 체구에 어금니도 크게 튀어나오지 않은 외모. 피부만 녹색일 뿐, 얼핏 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여성 오크다.

하지만 그들은 남성들보다 몸이 훨씬 유연하기에, 뛰어난 오크 여전사는 그 전투 능력에 있어 결코 남자 전사에 뒤지지 않았다.

타이니와 싸웠던 이도 웬만한 인간 남자는 가볍게 제압할 만한 탄탄하고 날렵한 근육질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무려 3m는 될 듯한 뼈 창을 든 채 붉은 멧돼지를 몰고 저돌적으로 덤벼들었었다.

익스퍼트 초입으로 보이는 마나의 경지와는 별개로 살벌한 창술과 곡예 같은 기마, 아니 기저(騎猪)술을 보여 준 전사.

그 기술이 워낙 독특하고 신기해 그도 조금 어울려 줬었다.

“기껏해야 블레이더급인 인간이 그 아이를 이겼다니, 과연…….”

그 아이라는 게 타이니와 맞붙었던 오크 여전사를 가리키는 거라면, 지금 이 오크는 거의 블레이더급인 타이니가 익스퍼트급인 그녀를 이겼다고 신기해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오크 전사들, 그중에서도 강한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 오크는 인간보다 강하다. 초인이 아니라면 한 단계 수준은 능히 누를 수 있다.

그것이 그들의 상식이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전사의 도전에서는 도전하는 측에서 상대를 죽일 수도 없는 데다가, 중상을 입히기라도 하면 그 오크 부족 전체의 적이 되고 만다.

한 수, 아니 두 수를 접고 겨룰 수밖에 없는 불공평한 관행이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으니.

그 와중에 타이니는 그 말의 의미보다 족장의 단어 선택이 더 신경 쓰였다.

‘과연이라니?’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단어에 힐끗 가렌을 보는데, 가렌 역시 무언가 느낀 듯 그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자신에게 맡기라는 뜻이었다.

목표에 지장을 줄 것 같은 중요한 결정이 아니라면, 이 종족의 영역에서는 그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 출발 전의 약속.

‘후.’

타이니는 또다시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른은 우리 부족의 천재 전사로, 또래 중에서도 비길 자가 없지. 무술에 매진하느라 아직 첫 번째 남편도 얻지 않은 아이인데……. 소문이 과한 것이 아니었군.”

그 말에 가렌의 표정이 조금 어색해졌다.

‘전투’ 실력 위주의 오크 사회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경지에 따라 반려를 ‘더’ 얻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남성에게만 다처제가 허용되는 인간족의 기사인 가렌으로서는 그 표현 자체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문?’

가렌이 타이니를 슬쩍 돌아보자, 타이니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나를 알고 있어.’

어느새 눈초리가 가늘어진 타이니가 스탬프의 손잡이를 움켜쥐는데, 가렌이 그런 그의 어깨를 힘주어 두드리며 오크를 향해 다시 웃어 보였다.

“우리 타이니 경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는 천재로 불립니다. 어린 나이에 광휘의 기사라는 이명을 얻은 기린아이기도 하지요. 재앙을 물리친 자라고, 혹시 소문을 들어 보셨습니까? 아신다면 그 전사분의 패배는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인정하실 겁니다.”

대놓고 타이니를 치켜세우는 가렌.

오크의 반응을 떠보고자 한 행동이었지만.

“그래, 그래야지. 그 정도는 되어야 나른을 이긴 것이 말이 되지. 그렇다면 그 솜씨, 나에게도 좀 보여 줄 수 있는가?”

족장 오크의 말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이건…….“

타이니가 또다시 미간을 좁히는데, 그가 나서기도 전에 족장 오크의 뒤쪽에서 먼저 반응이 터져 나왔다.

“바타르 님!”

“지금은 시기가……!”

“조용!!”

부하들의 항의를 일축한 오크, 바타르가 다시금 예의 그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가렌과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전사가 강자를 보고 어찌 그냥 넘어갈까? 오랜만에 인간의 강자들을 보니 내 피가 끓는구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들에게 결투를 청하고 싶은데. 어떤가, 인간의 기사들이여?”

가렌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타이니를 돌아보았고.

‘괜히 호의를 거절해서 일이 꼬이는 것보다야.’

타이니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약간 찝찝한 구석은 남아 있었지만, 오크의 족장이 이렇게 중인환시에 말을 떠들어 놓고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에서는 야만 종족으로 분류되지만, 그들이야말로 명예와 무력에 목숨을 거는 진짜 전사들이다. 전사의 도전이라는 관습 또한 그래서 생긴 것이 아니던가.

“……저희가 따로 일정이 있어 하루 이상의 시간은 내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흐음, 좀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좋다. 그대들을 내 집으로 초대하겠다.”

그렇게 둘은 생각지도 못하게 붉은 멧돼지족 족장의 거처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 * *

다행히 바타르는 단순히 막무가내 성격의 오크는 아니었다.

“자, 특별히 인간의 입맛에 맞는 요리들만 주문했네. 아는지 모르지만, 우리 오크족의 고기 요리는 인간족의 음식과 견줄 수 없는 풍미를 자랑하지. 실컷 즐겨 보게나.”

얼핏 보기에도 웬만한 저택보다 넓을 듯한 거대한 천막 안.

바타르가 손뼉을 치자 호리호리한 체형의 오크 여자들이 연이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자기들이 타고 다니는 멧돼지를 잡기라도 한 건지 살점 한 덩이가 거의 사람 머리만 해 보이는 고기 요리였다.

알 수 없는 소스에 버무려져 고소한 향을 풍기는 그 요리는 외관만으로도 타이니 일행의 이목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그다음으로 눈길이 간 것은 음식을 내오는 여인들이었다.

윗입술의 양쪽으로 살짝 삐져나온 어금니만 아니라면 그냥 녹색 피부의 키 크고 아름다운 인간 여자로 보이는 외모였다.

‘피부가 녹색이라는 것이 조금 이색적이지만…….’

자라 온 환경이나 누나에 대한 트라우마 탓에 전생부터 여자에 별 관심이 없었던 타이니로선 그 정도의 인상이 전부였지만, 가렌은 인간에 비해 다소 과감한 복장의 여인들을 보고는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기 바빴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황급히 타이니의 어깨를 잡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네만, 음식을 내오는 여자들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되네. 보통 오크 사회에서 손님에게 음식을 내오는 건…….”

“압니다. 부인들이죠.”

물론 가장이 여자라면 남편들이겠지만.

“……이것도 알고 있었나?”

“예, 어쩌다 보니요. 많은 이야기를 해 준 친구가 있거든요.”

그리 대답하고 나니 새삼 저릭의 그 우락부락한 얼굴이 보고 싶어지는데, 그 순간 바타르가 다시 한번 손뼉을 치자 음식을 나르던 부인들이 그의 곁에 늘어섰다.

그리고 그녀들의 팔과 옆구리 사이를 비집고 울퉁불퉁한 녹색의 머리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아기?’

엄청난 덩치의 부모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주 작아 보이는 꼬마들의 수는 무려 열.

그 열 명의 오크 아기들이 하나같이 입가에서 흐르는 침을 훔치는 순간.

“자! 손님들을 모셨으니 일단 식사부터 하고 보세! 들게나!”

바타르가 다시 손뼉을 치고, 오크 아기들이 와앙 소리를 내며 일제히 요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와그작와그작.

“꺄!”

쩝쩝.

“꺄륵.”

꿀꺽.

“끼힝!”

갖가지 귀여운 소리와 함께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접시 위의 커다란 고기를 한 덩이만 잘라 내고는 눈앞에 있는 한 아기 앞에 전부 덜어 주었다.

“꺄?”

“맛있게 먹어라, 아가야.”

종족이 달라도 인류는 인류인지, 험상궂은 오크의 외형이 그대로 축소된 것처럼 생긴 아기들임에도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물론 자기 몸만 한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기세만 보아서는 영락없는 오크였지만 말이다.

아드드득.

쫩쫩.

그 모습을 귀엽게 여기는 듯하면서도 살짝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가렌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오크들의 손님 초대 방식이네. 손님이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여기는…….”

뒤늦게나마 타이니에게 오크의 예절에 관해 설명해 주려는 것이었는데, 그는 시선을 돌리다 말고 어색한 표정으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촵촵촵.

와드득, 와드득.

“와우, 이거 맛있군요. 에비, 저리 가! 이건 내 거야!”

우걱우걱.

찹찹.

오크 아기 둘의 원망 어린 눈빛을 받으며 자기 몸통만 한 고기를 한 열심히 물어뜯고 있는 타이니.

“흠…….”

그러다 이내 쳐다보는 아기들의 시선에 양심이 찔렸는지, 타이니는 머리를 긁적이다 자기 무릎 위에 앉은 아기들에게 자신의 잇자국이 나지 않은 고기를 조금 덜어 주었다.

“……같이 먹자.”

“꺄?”

그러다 보니.

와구와구.

“키힝!”

쩝쩝.

“맛있다. 그치?”

“꺄!”

쩝쩝쩝.

“너희들 맨날 이런 거 먹고 사니?”

“꺄륵.”

“부럽네.”

와드득 와드득.

‘말이 통하는 거냐?!’

가렌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아기들과 어울려 정말 가족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타이니.

확연히 차이 나는 피부색만 아니라면 그냥 좀 덩치 작은 오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저게 실례일까, 아닐까?’

가렌이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하하하하! 자네 정말 잘 먹는군. 부인들, 미안한데 음식을 좀 더 가져다주지 않겠소?”

바타르가 황당한 듯 웃음을 터트렸고, 그 곁의 부인들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렌이 오크의 예절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식사 시간에 주인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예의일 리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가렌이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감싸 쥐는데.

“우와, 음식이 정말 맛있네요. 쩝쩝. 실례가 아니라면, 이거, 촵촵. 이거, 3개씩만 더 주시면, 우걱, 충분할 것 같…… 쩝, 습니다.”

‘충분히 실례야!’

타이니는 예의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음식을 재주문하며 연신 고기를 뜯기에 바빴다.

“꺼어억!”

잘 먹고 나니 자연스레 트림이 튀어나왔다.

그에 바로 가렌의 눈총이 느껴졌지만 타이니는 그저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잘 먹었으면 잘 먹은 티를 내 주는 것이 오크의 예의.’

그 사실을 알기에 그는 충분히 배가 불렀음에도 후식(?)으로 나온 양고기 한 접시를 입 안으로 쓸어 넣었다.

“자네 짐승인가…….”

옆에서 들리는 신음 같은 목소리는 사뿐히 무시했다.

오크의 예의와는 별개로 음식이 맛있기도 했고, 그에게 많이 먹는 건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우드드득.

그의 내부에서는 뼈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실시간으로 근육이 채워지고 있었다.

‘바쁘게 오느라 몸을 다 못 채웠는데, 이제야 제대로 회복하겠군.’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잡아먹은 소 한 마리로는 부족했던 참이었다.

황궁에서 축났던 몸이 이제야 비로소 완전히 회복되고 있었다.

그로 인한 만족감에 자연스레 미소를 짓자, 상석에 앉은 바타르가 씩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충분히 대접한 듯하니 내가 더 뿌듯하군. 그럼 식후 운동 정도는 가볍게 괜찮겠지? 광휘의 기사, 타이니 ‘모르스’ 경.”

오크 전사의 융숭한 대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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