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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114화 (114/500)

114화. 포상 (1)

황도 아세리안에 믿기 힘든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궁에 마물들이 쳐들어왔다.

황족들 수십이 죽고 다쳤다.

그 때문에 황태자의 결혼식이 연기되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하거나 헛소문이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궁을 향해 날아오른 마물들을 목격한 자만 수천인 데다가, 황궁에서도 가장 높은 궁전 중 하나였던 크레임 궁의 천장이 날아간 것은 외성의 주민들에게도 분명히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 황당하고 엄청난 소문의 정점은.

황제 폐하께서 악마추종자의 마수에 승하하셨다.

황제의 죽음이었다.

“악마추종자들한테 그 정도 힘이 있었어?”

“이제 제국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나야 모르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웅성웅성.

황궁의 재앙이 일어난 지 고작 나흘.

아세리안의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소문에 대해 떠들기 바빴다.

세계 최강의 제국, 그 중심에서 일어난 엄청난 테러는 황도의 주민임을 자랑스러워하던 대다수의 사람들마저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런 황도의 대로를 지나가는, 독수리의 깃발을 높게 단 사두마차의 안에서는 시민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다각다각.

“역시나 시끌시끌하군요. 그런데 2황비나 청혈의 마도사 이야기는 없네요.”

“황실의 이미지를 실추할 만한 이야기야 단속을 했겠지.”

타이니의 말에 검제는 간결하게 대꾸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꽤 굳어 있었는데, 누가 봐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설마 딸이랑 같이 오지 못해서 아쉬우신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라. 네가 알아낸 사실을 어찌 이용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니.”

실없는 농담을 던지던 타이니가 그 말에 눈을 빛냈다.

“그래서 결론은요?”

“없다.”

“엑?”

“당장은 말이다.”

“……무슨 뜻입니까?”

“황태자 전하는 이제 사태를 수습하고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만 해도 정신이 없으실 거다. 그리고 내가 아예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개인의 사욕보다는 대의를 따르실 분이기도 하니, 아직은 그저 지켜보련다.”

“그 대의가 인류 전체가 아닌 제국에서 그친다면요?”

죽은 황제가 언급했던 대륙 정복 계획을 떠올리고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에 검제가 놀란 표정을 짓자 타이니는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호오? 네놈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그 감탄 뒤에 이어진 말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 전까지는.

“하긴, 시련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지. 역시 계속 굴려야…….”

“그거랑 상관없거든!!!”

“뭐 인마?”

“……요.”

하, X바.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데.

강자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알아서 기어 버린 타이니가 속으로 구시렁대는데, 검제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가 만일 인류 전체보다 제국을 위하는 쪽으로 간다면, 그때 네가 알려 준 정보를 활용해야겠지.”

“네?”

“설령 전하께서 우리의 뜻을 따르지 않으신다 해도, 그 정보만 있다면 적어도 한 번은 멀쩡한 제국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황태자의 약점을 언급하는 검제의 태도는 분명 사흘 전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타이니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충분하겠군요.”

“그렇지.”

마왕군이 강림하게 되면 이 세상의 생명체들은 싫어도 뭉칠 수밖에 없다.

악마추종자들 같은 미친놈들이 아닌 바에야 그것이 당연한 일.

그러니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연합이 어찌 뭉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이나 연합, 그리고 다른 4대 종족의 국가끼리 싸우게 되어 인류의 총력에 손실을 보는 것.

그도 그럴 것이, 타이니가 기억하는 전생의 재앙 중 대여섯 가지가 바로 그런 전쟁이었다.

제국 내전, 제국과 왕국 연합의 전쟁, 웨어비스트 왕국의 남침, 오크 종족 연합의 내분, 엘븐하임과 테르티우스의 전쟁 등등…….

하지만 온전한 상태의 제국이라면 가장 확실한 중재자가 될 수 있다.

“네가 말한 재앙 중 제국 내전은 사실상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고, 그 연장선에 있었을 왕국 연합 전쟁 역시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 다른 4대 종족의 일이야 이제부터 손을 써야겠지만,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내전 없이 건재한 제국의 중재를 무시할 수 있는 종족은 없겠죠.”

“그래. 그래서 이번에 이뤄 낸 성과가 중요한 것이다. 정말, 정말 잘했다, 타이니.”

갑작스레 튀어나온 칭찬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검제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칭찬으로 밑밥 깔고 갈구려는 거지? 빨리 속셈을 말해라.

등등의 뜻이 담긴 타이니의 불신 가득한 표정이, 검제를 실소하게 만들었다.

“칭찬은 칭찬으로 받아들여라, 이놈아! 어차피 앞으로도 네가 쭉 고생해 줘야 하니까.”

“……거 말 좀 예쁘게 해 주시죠?”

“그럼 내가 하리? 아니면 그리드한테 해 보라고 할까? 어디 대륙 전쟁 한번 일으켜 봐?”

검제가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간섭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구실이 될 수 있다.

회귀의 비밀을 공유한 또 한 명의 동료인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 역시 그만한 힘을 가진 건 마찬가지.

타이니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눈앞에 보이는 얄미운 표정에 자연스레 입이 튀어나왔다.

“아니면 뭔가 보상이라도 주든가.”

“가?”

“……요.”

거참 서러워서, 빨리 크든가 해야지.

들으라는 듯 대놓고 구시렁거리는 타이니를 보며 피식 웃은 검제가 이내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소리를 내뱉었다.

“안 그래도 선물을 준비했다.”

“진짜!……요?”

“그럼. 대전 회의가 끝나는 대로 너를 위한 특별 훈련 코스…….”

“저 먼저 엘븐하임에 가 있을까요?”

타이니가 표정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리며 마차 문을 열려고 하자.

“……는 아니고, 황태자 전하께 따로 부탁을 드려 놨다. 기대해도 좋아.”

검제는 농담을 관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래, 내가 언제 허언을 한 적이 있더냐?”

“음…… 없죠.”

“뭐지, 그 머뭇거림은?”

“하하, 한 번쯤은 있을 것 같아서 기억을 되짚어 봤는데 없어서요. 쳇.”

허언이 아니라 미친 짓이라면 자주 했는데 말이지.

타이니가 그리 말하며 심히 아쉬운 듯 혀를 차자 검제는 또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튼 기대해도 좋을 거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너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시는 것 같으니.”

“……말은 고마운데 말이죠.”

황태자의 첫인상을 좋게 본 만큼 자기 아비를 죽인 그에 대한 꺼림칙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타이니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 마음을 읽었는지 검제가 차분히 말을 더했다.

“전하를 믿어도 좋다. 솔직히 선황은 빈말로도 좋은 황제는 아니었으니, 황실의 법도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폭군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지.”

“그런 말을 다 하시는군요.”

“……귀족의 도리라는 허물을 벗고 생각해 보니 그제야 본질이 좀 보이더구나. 나는 귀족 중에서도 친황제파로 불리던 사람인데,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흠, 흠.”

그 말에 타이니가 눈을 빛내자, 검제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황태자 전하는 다를 거란 말이다. 거기에 기대를 걸어 봐야지.”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질 무렵.

마침내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아세리안의 내성, 황궁의 앞에 도착했다.

* * *

- 황궁 변란에 대한 수습과 제국의 미래를 논하려 하니, 모든 귀족들은 대전 회의에 참석하라!

황태자가 소집한 대전 회의에는 많은 귀족들이 와 있었다.

본디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들이 여전히 수도에 많이 남아 있었기에, 소집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고위 귀족이라 해도 초대받은 당사자만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위세를 뽐내고 싶은 그들은 황도에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대전 회의의 소집에도 많은 이들이 휘하의 귀족들까지 모두 이끌고 황궁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때문에 참석자들이 모두 황궁을 통과하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헉, 발렌티아 공작가!? 드, 들어가십시오!”

발렌티아가의 위세를 말해 주듯 독수리의 깃발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별다른 검문 없이 통과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다만 황궁 내부에서 마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으니, 입구에서부턴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일행이 마차를 세운 순간, 선두의 마차에서 내린 누군가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모시겠습니다, 각하.”

“제나스, 좀 쉬라니까. 지금도 안색이 안 좋아 보이지 않느냐.”

검제가 타박하듯 걱정 어린 말을 건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제나스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황궁에서 받은 타격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주듯 여전히 창백한 제나스의 안색은 거의 그 자신의 은빛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아무리 각하께서 호위가 필요 없는 강자라 해도 잡다한 일은 있지 않겠습니까. 손이 필요하실 겁니다.”

“그거야 이놈 시키면 되는 거고.”

턱짓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이놈’이라 부르는 모습에 타이니가 순간적으로 또 발끈하려는데.

“그리고 저도 이번에 나름대로 활약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직접 얼굴을 뵙고 포상을 받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제나스가 그리 너스레를 떨자 공작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황궁을 방문할 때 호위 병력을 지나치게 많이 대동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법. 마차와 호위 기사들을 돌려보낸 일행은 황궁 기사의 안내를 따라 대전으로 향하는 대로를 걸었다.

그런데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 호위 기사 열댓 명을 대동한 화려한 차림의 중년 귀족이 보였다.

검제의 안색이 대번에 찌푸려지는데, 그 귀족 역시 그를 알아보았는지 일행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에스…… 흠, 발렌티아 공작. 이거 오랜만입니다.”

푸른색 머리카락에 흔하지 않은 붉은 눈동자, 거기에 깡마르고 주름진 얼굴의 조합은 누가 봐도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인상을 만들어 냈지만, 그의 인사만큼은 정중했다.

오히려 그를 대하는 검제의 태도가 까칠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로히터 공작. 아예 쭉 안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황궁 안에 십수 명의 기사를 데리고 오시다니, 관례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봅니다?”

말투만 정중하지 사실상 시비나 다름없는 그 말에 로히터 공작, 알론 폰 로히터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세상이 흉흉한 마당에 법도로 정해지지도 않은 관례 때문에 안전을 등한시해서 되겠습니까? 나야 공작처럼 초인도 아닌데 말이죠.”

“흠, 영지에 일어난 난리도 수습하기 힘드셨을 텐데. 제가 로히터의 여력을 얕봤나 봅니다.”

검제의 그 너스레에 알론 로히터의 붉은 눈이 살기를 담고 빛났다.

“역시 네놈이…….”

“네놈이라니요. 말씀을 조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로히터 공작님? 아니면 제가 모욕죄로 결투를 신청할지도 모르는데요.”

공작의 그 너스레에 알론의 인상이 무참히 구겨졌다.

“……두고 보겠다, 에스가르드.”

“지금 보시죠? 뭐 반가운 얼굴이라고 두고두고 보시려고?”

그 유치하기까지 한 도발에 알론은 이를 갈며 물러섰다.

잠시 후 그가 충분히 멀어지자, 검제의 등 뒤에서 타이니의 탄성이 들렸다.

“역시 성격 더럽…….”

“그렇지. 한 번에 알아보는구나. 저 녀석이 바로 늙은 뱀이라 불리는 알론 폰 로히터다. 클로이의 성년식에 수작을 부린 쓰레기지.”

“아…….”

그 말에 잠시 멈칫한 타이니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의 말에 동의하듯 설명을 늘어놓고도 무언가 찜찜했던 검제가 이내 다시 타이니를 째려보았다.

“아, 너 혹시 저놈이 아니라 나를 보고……?”

“아뇨! 그럴 리가 없죠! 암요. 우리 클로이 공녀님의 성년식을 망치려 한 놈한테 한 말입니다!”

그 간절한 변명에도 검제의 입꼬리는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퍽이나.”

“아니, 진짜!!”

“역시 아무리 갈궈도 꺾이질 않아, 이 성격 더러운 애새끼는.”

누가 누구보고 성격이 더럽다고!

타이니로선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이미 검제의 손은 그의 귀를 거칠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이씨!”

“아이씨? 하, 정말 대단하단 말이지. 그러니 황태자 전하를 뵙기 전에 푸닥거리 좀 하자꾸나.”

“화, 황궁! 여기 황궁이야, 인간아!!”

“어쭈? 인간?”

“각하, 지금은 좀 자제하시죠. 황궁입니다.”

“제, 제나스……!”

“저택에 돌아가면 시간이 많으니까요.”

“……경!!?”

아군이라 믿었던 이한테 배신당한 타이니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랐지만, 그날 그가 정말 놀랄 만한 일은 따로 있었다.

“황궁 변란의 주 공신, ‘검제(Sword Emperor)’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 공작과 ‘광휘의 기사’ 타이니 경의 활약을 치하하며…….”

황태자가 공식적으로 검제라는 칭호를 인정하고 광휘의 기사라는 이명까지 입에 올린 것만 해도 기가 막힌 일인데.

“발렌티아 공작의 요청에 따라 그 공에 대한 보상은 모두 광휘의 기사에게 몰아주겠다. 황실의 직계들을 구하고 적을 물리친 공적을 인정하여, 황실 보고에 보관 중인 초월무구 중 하나를 광휘의 기사에게 부여하노라!”

더욱 파격적인 선언이 이어지자 소리 없는 경악이 대전을 한차례 휩쓸었다.

“만약 조건에 맞지 않아 그가 고른 초월무구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에 준하는 수준의 재화나 보물로 갈음하겠다.”

임시 황제, 황태자의 배포는 타이니뿐만 아니라 그 선포를 들은 모든 귀족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전을 장악한 충격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

“……황공하오나, 폐하. 소인의 선택이 가능하다면 초월무구 대신 다른 청을 드리고 싶사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타이니의 입에서 더욱 충격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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