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정리
‘죽여야 해.’
황제의 그 어처구니없는 야망을 듣는 순간, 타이니의 머릿속에선 검제의 당부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그 달라진 기세를 느꼈을까.
“……자네?”
황제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데, 그 순간 그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 그것이 스탬프를 휘두르기 직전이었던 타이니의 손을 멈춰 세웠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오, 그대는……. 태자의 호위 기사가 아닌가?”
황제가 챌린저급 기사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왜 하필 지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십여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고개를 숙이는 익실란의 모습을 보니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익실란 경…….”
“오, 타이니 경. 큰일을 했습니다. 이제 이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챌린저급 기사가 조금 전 타이니가 뿜어낸 살기를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즉 익실란은 타이니가 괜한 충동에 일을 크게 만들지 않도록 말려 준 셈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의 등장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왕 늦으신 거 조금만 더 늦게 오시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가 혼잣말 같은 푸념으로 튀어나오자, 익실란의 뒤에 있던 기사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뒤늦게 나타난 기사들에게 빈정대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그러게 말입니다.”
피식 웃으며 작게 대꾸하는 익실란의 모습에 타이니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뭐?’
그 느낌을 채 분석하기도 전에.
“타이니 경, 지금부터 폐하의 경호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수고하셨으니 발렌티아 저택으로 돌아가 계시지요. 클로이 공녀님께서도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익실란이 말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발렌티아라는 말이 또 거슬렸던 것일까.
“그래, 그렇군. 그대는 이만 가 보거라. 내 말 잊지 말고.”
황제는 타이니를 더는 붙잡지 않고 그대로 손을 내저었다.
그쯤 되니 계속 대전에 남아 있기도 뭐한 상황인지라, 타이니는 익실란과 황실 기사들을 두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했다.
‘혹시 모르니.’
- 컹!
그가 대전의 입구를 지나는 순간, 부서진 문의 잔해 사이에서 작은 은빛 강아지가 스르륵 나타나며 그 작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 태자는 무사한가?”
“예, 폐하의 염려 덕분입니다.”
익실란은 황제의 가식적인 말투에 호응하듯 가식적인 대답을 하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 내심은 겉보기와는 전혀 달랐다.
‘죽이긴 죽여야 하는데.’
한 가지가 걸렸다.
무려 오러유저인 발렌티아 공작을 압박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집단. 그러면서도 정작 황자들은 공격하지 않았던 그 수상한 무리.
그 정체를 악마추종자들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발렌티아 공작을 견제한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 그들의 정체는 높은 확률로…….
‘황실의 암살자 집단.’
소문으로만 들어 본 게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다.
“허허, 다 아스란의 영령들이 보우한 덕이겠지. 다행히 나와 태자가 무사하니 이제부터 제국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을 것이야.”
그러니 이 노욕에 찬 눈을 빛내는 황제를 처리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이다.
‘일단 그것부터 받아 내고…….’
익실란은 내심을 감추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이 변란을 수습한 후의 제국은 보다 강력하게 거듭날 것입니다.”
……새 황제의 치하에서 말이야.
그 속뜻을 알 리 없는 황제는 익실란의 말에 무릎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대는 뭘 좀 아는군. 그래, 다른 곳의 정리는 모두 끝난 것인가?”
“예,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시며 마물들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빠르면 몇 시간 내에 황궁은 다시 본모습을 되찾을 겁니다.”
“……이 변란을 주도한 놈들은?”
“일단 유력한 용의자로 2황비 카르티아와 황실 기사단장, 그리웰 폰 라이들러가 지목되었고, 지금 체포 과정에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역시 태자도 알고 있었군.”
태자‘도’?
황제의 그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익실란이 움찔했다.
‘황제도 알면서 방치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죽을 뻔하다니?’
그때, 그의 시야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루드비히 공!?”
저도 모르게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황제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공이라니!? 반역자 따위에게 존칭을 붙이지 마라!!”
반역자?
“……예? 아, 예. 죄송합니다, 폐하.”
그렇게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익실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히 공이 왜 반란을? 그렇다면 설마 타이니 경이 마도사를?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데? 그럼 역시……?’
그의 생각이 갑자기 나타나 검제를 도왔던 연합의 초인에게 이어지는데.
“이놈이 감히 나를 배신하는 바람에 연합의 개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빌어먹을 놈이로다.”
때마침 죽은 동생을 노려보며 분기 어린 음성을 토해 내는 황제가 그 짐작을 확인시켜 줬다.
물론 루드비히가 왜 반역을 일으켰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흠. 그런데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통해 폐하께 부탁을 드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뭐라?”
그 말의 어디가 불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황제의 표정이 또 안 좋아졌다.
그러나 익실란은 미동도 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황실의 ‘그림자’들을 동원할 권한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문만 무성한 그 집단 말입니다.”
돌려 말하거나 떠볼 시간은 없으니 바로 직언을 던졌지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누구 마음대로!”
역시나 황제의 반응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순순히 넘길 생각이 없다면.’
이쪽도 순순히 나갈 필요가 없겠지.
싸늘하게 웃음 지은 익실란이 뒤에 서 있던 부하들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챙!
“……네, 네놈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들의 섬뜩한 살기가 피부에 와닿자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림자를 부르실 수 있다면 당장 부르셔야 할 겁니다, 폐하. 아니면 그 권한을 가진 증표를 넘기시든가요.”
황제는 눈앞의 기사들을 애써 꾸짖듯 노려보았지만, 익실란이 살기에 찬 미소를 짓는 순간 저도 모르게 루드비히의 시체 쪽을 흘끔 바라보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아차 싶었는지, 다시 익실란을 쏘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네놈들이 제국의 황제를 능멸하려 하는 것이냐! 그게 태자의 뜻이더냐!? 이놈들!! 천벌이 두렵지 않으냐!!”
하지만 익실란은 엄포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 가면서 황제의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수호 아티팩트들도 안 보이는군요. 황제의 관도 그렇고. 하하, 아무래도 ‘저 반역자’가 가지고 있나 보지요?”
“황제의 아티팩트는 오직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하는 꼴을 보니, 네 주인도 알 만한…….”
스각.
황제는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부릅뜬 눈으로 목을 떨궜다.
푸슈슈슉.
그리고 그의 목에서 솟구치는 피를 뒤집어쓴 익실란은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황제의 시체와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기라도 하듯 엉망으로 부서진 채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대전의 천장.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수호 아티팩트를 모조리 빼앗긴 채 불행히 낙석에 맞아 승하하셨다……. 무슨 뜻인지 알지?”
시체까지 돌 더미에 짓이기라는 뜻.
“예, 대장. 뒷일은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그래. 그럼, 나는 황제의 아티팩트들을 가지고 전하…… 아니, 폐하께 가겠다. 잘 마무리하도록.”
“예!”
기사들의 대답을 들으며 핏물을 닦아 낸 익실란은 조심스레 루드비히의 시체를 들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대전 입구 돌무더기 속에 숨은 은빛 강아지가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잘된 거……겠지?”
소란한 황궁을 터벅터벅 걷던 타이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제를 직접 처리하면 혹시나 증거가 남을지도 모르니 제 손을 더럽히지 않은 것은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깨달은 몇 가지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황제를 죽여 버린 익실란.
그가 본인의 뜻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으니, 황태자의 뜻인 게 분명하다.
‘그 사람 좋아 보이던 청년이 독한 구석이 있었군.’
좋은 사람으로 정평이 난 것은 물론이고 그 고약한 검제에게도 칭찬을 듣던 황태자가 말이다.
물론 죽은 황제는 자신도 순간 이성을 잃고 때려죽이려 했을 만큼 인류의 해충 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자기 아버지인데 말이야…….’
세간의 평판이 아니더라도, 귀싸대기 사건을 계기로 타이니에게 꽤나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던 황태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 대한 평가를 일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더불어 새로운 고민도 생겼다.
‘이걸 검제한테 말을 해, 말아?’
사실 지금 그의 마음이 복잡한 이유 중에 더 큰 축은 다름이 아니라 검제에게 있었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그가 자신보다 현명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카룬의 일도, 어쩌면 황궁의 일도 완전히 어긋났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현명함과는 별개로.
‘지금의 그는 너무 고지식해. 저런 황제를 지키라고 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는 그냥 죽게 놔두는 게 옳았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다 잘 풀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일 뿐이다.
사실 황제를 구하라고 한 일까지 따질 것도 없이, 황궁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황실 기사단을 바로 처리하지 못한 것만 봐도 타이니가 아는 검제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확실히 전생의 검제가 아니야.’
매사에 효율을 따져 계획을 세우고 목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단호하게 쳐 내곤 했던, 보는 사람이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냉정하고 과감했던 그가 아니었다.
아마도 전생의 검제는.
‘황실의 재앙을 계기로 성격이 완전히 바뀐 거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계기가 되어야 했던 대사건을 막아 버렸다.
덕분에 아스란이 내전으로 빠져드는 것은 막아 낼 수 있었지만, 타이니로선 전생에 가장 든든했던 동료의 미숙함이 와닿은 탓에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결국.
“……누가 황제를 죽였는지 알려 줘야겠어.”
그것으로 충격을 받은 그가 껍데기를 깨 주면 좋겠지만.
설령 아니더라도 마왕군 강림이라는 대사건을 예고했으니, 적어도 제국에 분란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황태자의 약점을 검제가 쥐고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마음을 정한 타이니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석양이 질 무렵 발렌티아 저택에 도착한 타이니.
이내 대문이 열리고, 창백한 안색의 클로이가 그를 맞이했다.
“타이니, 그게 정말 너였……! 누구……, 세요?”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녀를 따라 나온 비비안 역시 놀라 입을 쩍 벌리는 것을 보고서야 타이니는 새삼 자신의 눈높이가 크게 달라졌음을 자각했다.
‘아…….’
공작가를 떠난 지 1년밖에 안 지났지만, 그때보다 50cm 가까이 자란 그였으니.
이제는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인 클로이보다 조금 더 커 보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미친 성장 속도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로이…… 누……나. 제가 좀 많이 컸죠?”
그 위화감을 무마해 보려 괜히 어색한 호칭까지 꺼내 보는데.
“누구……시죠? 왜 우리 타이니라고……. 우리 애는 이, 이렇게 작고 귀여운 아이인데……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클로이는 손으로 허공에 알 수 없는 형체를 그리다 이내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 그러니까 더 쉬셔야 한다고 했잖아요! 왜 굳이 나오셔서……!”
“말도…… 안 돼. 말도…….”
비비안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마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끊임없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 맞은편에서는 어렴풋이 들려온 ‘귀여운’이라는 단어에 소름이 돋은 타이니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팔뚝을 벅벅 긁었다.
“끄으응.”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타이니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부탁한다.’
- 크르르.
질색하며 거부하던 늑대 정령은 결국.
“컹! 컹!”
이내 아주 작은 강아지로 변해 클로이 앞에서 살살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은 클로이가 냉큼 월랑을 안아 들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떨리는 손끝으로 다시 타이니를 가리켰다.
“월……? 그럼 진짜……?”
“예, 제가 타이니입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씩 웃어 보이는데.
“왜!!!!!?”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클로이의 고함이 수도의 발렌티아 저택 앞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