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황궁의 재앙 (3)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크레임 궁에서 폭발이 일어난 직후. 궁 밖.
“쿨럭.”
월랑이 역소환된 순간 깨어난 타이니는, 감각이 본신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궁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이미 무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계 안에서 제대로 무력을 쓸 수 있는 것은 나와 검제, 제나스 정도뿐이야. 가야 한다.’
검제 역시 같은 생각일 줄 알고 찾으려는데.
의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깨었으면 아버지께 가 봐라. 네가 멍하니 눈감은 채로 서 있으니, 우리보고 지키라 하셨다.”
자신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는 발렌티아 기사들과 쌍둥이 형제들의 모습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정말 미쳤느냐, 네놈들!?”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검제와 그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
황실의 상징인 금룡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이들이 검제를 막아서고 있는 광경을 본 순간에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황궁의 경비는 저희의 몫입니다!”
“발렌티아 가문은 잠시 물러서 주십시오!”
“아무리 공작 각하라도 들일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검제와 발렌티아 기사들의 앞을 막아서는 황궁 기사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검제였다.
‘왜 보고만 있어, 저 영감?’
뽑아 든 검에 붉은 오러가 넘실거리며 기사를 위협하고 있었지만, 차마 휘두르지 못하는 모양새.
떨리는 칼이 심중의 극심한 갈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지만, 타이니의 인상은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달라.’
자신이 아는 검제라면 이 상황에 저러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냉정하고 과감했던 검제가 이 다급한 상황에 갈등이라니?
덧붙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발렌티아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 저게 뭐 하는 짓이야?”
타이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스탬프를 뽑아 들고 놈들에게 다가갔다.
링크 때문에 무리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이미 카룬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몇 번의 오버리바운드도 견뎌 낼 수 있음을 알았다.
더구나 지금은.
우우웅.
마나바디가 미친 듯이 마나를 흡수하며 빠른 속도로 힘을 충전해 주고 있었다.
“후으읍.”
타이니는 크게 심호흡하며 육체의 컨디션을 점검한 뒤 스탬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토렌 경?”
“지, 지금 뭐……?”
“지금 나서면 안 됩니다!”
타이니가 곧장 검제에게 향하자 그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그를 말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힘을 회복하는 데에만 집중하면서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이 알던 것과 많이 다르긴 했지만, 이건 정말 실망이었다.
전생보다 젊은 검제가 오히려 더 소극적이라니.
뭐, 예상 가는 이유가 있긴 했다.
‘저것도 그 명분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이겠지.’
비록 매번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신세였지만, 그에게는 똑똑하다는 귀족들이 하는 짓 중에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게 바로 그놈의 ‘명분 지키기’였다.
- 당장은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거시적 관점에서는 명분을 지키는 것이 옳다.
전생에 그가 만난 수많은 현자들도 그리 말하곤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거기다 자신에게도, 경험이 쌓이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일이 잘못되면 반란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도, 발렌티아 가문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도 이젠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멀리 보는 거잖아.’
똑똑한 사람들이 가끔 저지르는 실수.
뒷일을 생각하느라 당장 눈앞의 문제를 어쩌지 못하는 모순이었다.
‘그런 면에서 전생의 검제는 확실히 달랐었는데…….’
지금의 검제는 무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도 타이니가 알던 그보다 미숙해 보였다.
‘이건 확실히 얘기를 해 둘 필요가 있겠어.’
그 거시적 관점 따위는 모르는 자신이 봐도 확실한 것은 있었다.
가끔은. 그래, 적어도 가끔은.
“명분 따위는 무시해야 할 급한 상황도 있다고.”
타이니는 혼잣말로 각오를 다지며,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검제에게 다가갔다.
“……지키겠다면, 당장 궁 안으로 들어가야지! 여기서 뭐…… 타이니?”
타이니는 흥분했는지 가명을 대는 것도 잊은 검제를 지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황궁 기사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뭐지? 물러서라는 말 못 들었나, 발렌티아 기사!?”
스릉.
검을 뽑아 드는 모양새는 꽤 그럴듯했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수위 기사가 고작 익스퍼트라? 황실 기사들이 형편없긴 하군. 아, 오러유저를 막아 세우고 있으니 그렇지도 않은가?’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던 타이니가 피식 웃으니, 기사가 검을 들어 그에게 겨눴다.
“물러서라고 했다!”
“지랄.”
“뭐?”
딱 그 순간 힘이 충분히 회복되었다.
힘줄이 불끈 솟아난 손에 스탬프의 손잡이가 꽉 감겨드는 순간.
그는 벼락같이 망치를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한순간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육편이 되어 흩어지는 황궁 수위 기사.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듯 주변 모두가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볼 때.
“뭐 해!? 공녀님을 구한다!! 가로막는 놈은 다 죽여!!”
타이니의 외침과 함께 발렌티아 기사단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우와아아아!”
“공녀님을 구하자!”
“죽여!”
검제와 그 아들들이 멍하니 굳어 있는 동안, 기사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 막아!”
“못 들어가게 해!”
“단장님 명이다! 막아라!”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든 양측 기사들이 맹렬하게 부딪치는 순간.
얼어붙었던 누군가의 시간이 뒤늦게 풀렸다.
“흐, 나도 늙었나…….”
스릉.
정신없이 망치를 휘두르는 타이니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검제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파아아아앙.
그가 검을 휘두르자 붉은 오러가 회오리치며 앞을 가로막는 황궁 기사들을 일순간에 두 쪽 냈다.
“전부 죽여라! 그리고 내 딸을 구해라!”
“우와아아아!”
발렌티아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자 황궁 기사단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뒤쪽!”
“뭐가 날아온다!”
후방에 있던 발렌티아 기사들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선두에서 정신없이 황궁 기사들을 때려죽이던 타이니가 얼핏 뒤를 돌아보니, 수없이 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광경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익숙한 외형.
“……마물!?”
카룬에서 성령 결계를 지킬 때 보았던 박쥐 날개를 가진 인간 형태의 마물들.
그 마물들이 어림잡아 천 마리는 넘어 보이는 군집을 이루어 황궁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카룬의 성령 결계 안에서도 검은 구슬에서 소환되어 형태를 갖춘 후에나 타격을 받기 시작했던 마물.
그 전에는 타이니의 감각에도, 월랑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았던 괴물이었다.
‘월랑의 감각을 피한 거야 혼이 없어서 가능했다 치더라도.’
놈들의 무시무시한 전투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때와 동급의 괴물이 천여 마리나 몰려온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막막함에 절로 얼굴이 굳어지는데.
“키에에에엑!”
선두에서 날던 마물 수십 마리가 그가 있는 곳 반경 500m 안에 접근하는 순간, 그대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네.”
아무래도 카룬에서 본 놈보다는 확실히 약한 개체들인 듯했다.
성물의 결계에 힘없이 녹아 버린다면, 그보다 더 강력하다는 황궁의 결계에는 아예 접근조차…….
“어?!”
- 으아악!
- 괴물이다!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에 주위를 둘러보니, 타이니가 가진 성물 결계 밖에서는 마물들이 기사들을 거침없이 죽여 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
황궁 결계는? 그게 뜬소문이었던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런 놈들이 지금 궁 안에도 있다면?
제나스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영감! 이놈들 죽일 시간에 벽부터 뚫어야겠습니다!”
“누가 영감이…… 빌어먹을!!”
황궁 기사들을 학살하는 와중에도 발끈하던 검제는 타이니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는 안색을 굳혔다.
“발렌티아 기사들이여, 황궁 기사들을 처리해라! 타이니 네놈은……!”
이제 가명을 부를 생각도 없는지 다급하게 고함을 지르는 검제.
그러나 타이니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황궁의 한쪽 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윗부분이 깨어져 빛이 새어 들어가는 곳.
그리고 아까부터 그 너머에서 성물의 결계에 자꾸만 반응하는 이가 있는 곳.
‘클로이……! 가까워!’
그러니 여길 부수고 들어간다.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검제가 초를 쳤다.
“황궁 결계가 멀쩡하니 네놈 힘으로는 어림도 없어! 괜히 힘 낭비하지 말고 기다려라! 이 정도 소란이 일어났으니 곧 그리드 놈이 올 거다!”
검제가 끈질기게 달라붙는 황궁 기사들을 종잇장처럼 베어 내며 소리를 질렀다.
‘웨폰 마스터……. 그래, 약속한 게 있으니 오긴 오겠지. 하지만…….’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황궁 기사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이는 그의 말을 타이니는 가뿐히 무시했다.
굳이 웨폰 마스터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후으읍!”
근육이 팽창하며 일순간에 육체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고.
쿠우웅.
쩌저저적.
극대화된 중력 속성이 가뜩이나 무거운 그의 몸을 16배나 무겁게 만들며, 그 무게가 온전히 실리는 지면에 균열을 일으켰다.
“합!”
이내 우렁찬 기합과 함께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온몸의 근육이 다시 수축하는 순간.
이번엔 16분의 1로 줄어든 중력에 극도로 가벼워진 몸이 탄성을 받아 튕겨 나가며 망치를 휘둘렀다.
번개처럼 휘둘러진 망치 머리에 노을 빛 기운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순간.
백만 분의 일 초라 할 만큼 짧은 틈에 중력이 다시금 최대치로 전환되었다.
타이니식 전투 살법 1식. 벼락 떨구기.
꽈아아아아아앙!!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그의 비기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황궁의 벽을 말 그대로 터트려 버렸다.
“크하하하하. 어때, 영감!!”
검제를 향해 거만하게 웃어 보인 타이니가 황궁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향해 뚜렷한 적의를 드러내는 두 마리의 마물이 보였다.
아마도 지금 시가지에서 날아온 놈들을 훨씬 강화한 것 같은 녀석들.
감각에 느껴지는 수준은.
‘거의 챌린저급!’
상상을 넘어서는 적의 등장에 순간 당황했지만, 다행히 그 너머의 클로이는 무사했다.
‘다행이다.’
늦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타이니가 겉으로는 여유를 가장하며 히죽 웃어 주는데.
“역시 부수는 데는 해머가 최…….”
“딸!!”
“……곢!?”
갑자기 뒤통수에 얼얼한 충격이 전해지며, 꼴사납게 땅에 처박힐 뻔했다.
“아빠 왔다!”
“뭐 하는 짓……!?”
본의 아니게 검제의 발판으로 전락한 타이니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
쩌어어어억.
검제의 붉은 오러가 일순간에 시야를 가득 채우더니, 두 괴물의 허리를 단번에 갈라 버렸다.
아무리 오러유저라 한들 6단계급 괴물들을 일격에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검제가 선보인 기술이 무엇인지 아는 타이니는 소리를 지르다 말고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절단(切斷).’
검제의 비기 중 가장 공격에 특화된 기술.
그 위력을 알기에 더 어이가 없었다.
“뭘 저렇게까지…….”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격하의 적들을 상대로 기력을 왕창 쏟아 내는 기술을 쓴 것이니까.
그만큼 클로이를, 딸을 아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검제는 그만큼 힘을 쏟아부은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공식 석상에서는 칼같이 격식을 차리던 클로이가 비명 같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으니까.
그 뒤편으로는 황자와 황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안색이 창백해진 검제가 딸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순간.
그의 뒤쪽에서 검은색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칼날이 황급히 고개를 숙인 검제의 목을 스치고.
“암습!”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그림자의 칼날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채채채채채챙.
암습자가 한두 명이 아닌 듯 순식간에 그림자의 폭풍에 묻혀 모습이 안 보이게 된 검제.
“아빠!!!?”
“피해라! 클로이!”
그 순간 다시 불길처럼 일어난 붉은 오러가 일순간에 그림자들을 튕겨 냈다.
그러자 칠공에서 핏물을 쏟아 내는 복면인 하나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외마디 비명도 없이 툭 떨어졌다.
‘저만한 일격에 고작 한 명!?’
반사적으로 검제를 향해 달려가던 타이니가 경악하며 눈을 부릅뜬 순간.
그 역시 뒤통수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느꼈다.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상체를 숙이며 반 바퀴 회전한 타이니가 등 뒤의 습격자를 향해 스탬프를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부지불식간의 습격이었지만 분명 제대로 힘이 들어간 공격.
하지만 그 일격에 허공으로 튕겨 나간 그림자는 그리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듯 다시금 바로 그림자의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그 예상 밖의 광경에 타이니는 뒤늦게 다시 감각을 극대화했고.
‘젠장, 이건…….’
주변의 상황을 재차 인식하는 순간 속으로 욕설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사람으로 이루어진 그림자 폭풍을 보면서도 눈치채는 게 늦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합격진(合擊陳)이요, 영감!”
쾅!
다시금 공격을 튕겨 낸 타이니가 이번에는 충격에 뒤로 한 발 밀려났다.
좀 전과는 완연히 다른 위력.
‘그새 힘의 배분을 다시 잡은 건가!? 젠장!’
그것은 여럿이서 손발을 맞춰 공격하는 일반적인 병진이 아니었다.
특정한 장소에서, 특수한 마나의 흐름을 이용하여 다수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키는 비전.
동대륙에서 전래된 그 기술은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비전 자체가 희귀했는데, 제대로 구현할 수만 있다면 단순히 개개인의 전투력이 더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그 몇 곱절로 증폭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주변의 마나 자체를 지배하는 초인에게는 의미가 없어야 정상이었지만.
‘빌어먹을 황궁 결계!’
저 합격진은 황궁 결계의 마나를 움직이며 계속해서 그와 검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마물은 잡지 못하는 황궁 결계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계속 방해만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더러운 자식들이!”
쾅.
고함과 함께 그림자의 폭풍 중심에서 다시금 붉은 오러가 움직였다.
그런데 그 공격은 검제 자신을 둘러싼 적들이 아닌 폭풍의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클로이, 그리고 쓰러진 제나스와 비비안을 노리려는 그림자 칼날을 쳐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
“흐아압!”
검제가 커다란 기합과 함께 주변의 그림자들을 튕겨 내며 모습을 드러냈고, 서둘러 클로이를 안아 들더니 그대로 제나스와 비비안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딸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건 나한테 맡기고, 그 틈에 차라리 몇 놈 더 죽였어야지!’
클로이를 보호하는 모습을 적에게 보이다니, 스스로 약점을 노출한 꼴이 아닌가.
흐름이 최악이었다.
“썩을!!!”
쾅.
검제가 저렇게 수비적으로 나온다면.
‘공격은 내가 해야겠어.’
타이니는 자신을 습격하는 그림자를 다시금 쳐 내면서, 계속해서 감각을 증폭시켜 합격진의 허점을 찾았다.
그러다 이내, 이상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왜 황자들은 공격하지 않는 거지?’
너무 늦게 깨닫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황당한 상황.
새삼 황궁 결계를 이용하는 놈들의 합격진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쾅!
한 놈을 향해 망치를 휘두르자, 놈이 단검으로 그 공격을 받아 내더니 유려하게 충격을 흘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니 심증이 더욱 굳어졌다.
‘설마 이것들, 악마추종자들과 연계한 놈들이 아니라……?’
순간 머릿속에 섬뜩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타이니는 놈들의 공격을 받아 내면서도 황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쾅!
“저건 또 뭐……?!”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격전을 지켜보는 황자들 뒤로 슬금슬금 접근하는 황실 기사들이 보였다.
절대 호의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색들.
상황이 다급한 것과는 별개로, 그놈들의 행태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려던 영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놈들은 황실 소속이 아닌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황궁의 내부 사정을 알 리 없는 타이니에겐, 그림자들과 황실 기사들의 배치되는 행동이 심각한 혼란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 꽈아아아아아아앙!
이곳 크레임 궁보다 더 안쪽, 황궁의 중심부 쪽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젠장, 중앙 궁!? 타이니! 혹시 모르니 폐하를 보호해! 지금은 너밖에 없다! 빌어먹을 그리드 놈, 대체 뭘 하는……!”
이어진 검제의 외침에 당황으로 물들었던 타이니의 눈이 더욱 흔들렸다.
‘황제를? 지금 이 상황에?’
성물은 자신이 가지고 있고 클로이도 살렸다.
여기 있는 황태자까지 보호하면 이미 최악의 사태는 막아 낸 것이 되는데?
쾅!
“젠장,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이 복잡해도 너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림자의 공격을 튕겨 낸 타이니가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흔드는데, 그 망설이는 기색을 읽은 것일까.
콰콰쾅!
“그래야 우리가 황궁 기사들을 학살한 명분을 챙길 수 있다! 가라!”
붉은 오러의 폭풍 가운데서 다시금 검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