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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98화 (98/500)

98화. 루나 모르스

대체 뭐라는 거지?

‘이게 대체……?’

아무리 미숙한 시절이라지만, 사신이 저렇게 감정 표현을 격하게 하는 것은 처음 봤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데, 사신은 타이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옅은 보라색의 긴 머리와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돋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

전생에는 차갑게만 보였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순수하고 순박한 인상으로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엘프처럼 길지는 않지만 끝이 살짝 뾰족한 귀.

‘하프 엘프…….’

그 모습은 타이니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보다 조금 앳돼 보이긴 하지만 거의 그대로였다.

다만…….

“쿼터 엘프, 소문 있어서, 헛소문이라, 생각했다. 엘프의 피…… 거, 검은 머리, 안 나오니까……. 그, 그런데 어떻게?”

여지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와 혼란스러운 목소리는 항상 냉정하기만 했던 사신의 모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타이니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카룬의 전대 국왕에게 극소수만 알 거라고 들은 엘프 혈통에 관한 정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바로 정신이 들었다.

그도 눈치는 있으니, 지금까지 나온 말들의 앞뒤를 맞춰 보자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사신이 진짜 모르스 가문의 후예였어!’

그것을 깨닫고 나니, 예전에 위장용 신분을 만들 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도 이해가 됐다.

분명히 전생에 스치듯 들어 본 것일 터였다. 사신의 출신 가문을.

그렇다면, 이거…….

‘진짜 묘하게 꼬였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지만, 타이니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 나 말고는, 없을 거라, 했는데……. 황실에, 공 세우고, 다시 영지,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혼란스러운 듯 끊임없이 무언가 중얼거리는 사신은 자신의 표정 변화를 주목할 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이 틈을 타 머리라도 때려서 기절시켜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다 실패하면 X 된다.’

그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연기를 계속하는 게 나을 듯했다.

“……쿼터 엘프는 잘못된 소문이오. 가문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살아남았을 줄은 나도 몰랐소. 그것도 습격자로 만날 줄은…….”

“하지만, 너, 그림자의 법, 느껴지지 않아……. 왜?”

이 당시의 사신은 말도 제대로 못 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걸까.

친하진 않았다지만, 전생에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동료의 여러모로 미숙한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체질에 맞지 않아서 다른 걸 익혔소이다. 가문의 다른 수법이야 몇 가지 응용하는 것 정도일 뿐이고.”

그러나 그 와중에도 표정 관리만큼은 철저히 했다.

“체질? 그렇지……. 맞는 사람, 더 드물다. 하지만 검은 머리, 검은 눈…… 직계 같은데?”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나?”

사신의 표정이 지나치게 순수해 보여 더 양심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당장의 일이 더 급하니.

‘언젠가 솔직히 말하고 오해를 풀면 되지.’

그 생각만 가슴에 쌓아 두고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없겠소.”

“확실히…… 가능성, 있지.”

그 자연스러운 연기에 사신의 혼란스러운 눈빛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내 행동, 모두…… 가문의 부흥, 위함. 가문의 사람, 죽일 수 없다.”

지금 상황에 더없이 좋은 말까지 튀어나왔으니, 타이니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남은 의문도 풀고자 했다.

“그럼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말해 줄 수 있소? 황실의 그림자인 당신이 왜 나를 공격한 건지…….”

“그런데, 아까도…… 어떻게, 내가…… 황실 소속, 알아?”

허를 찌르는 듯한 그 질문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런…….

‘똥멍청이 같은 놈!’

타이니는 속으로 좀 전의 자신을 향해 한바탕 욕을 쏟아 내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카리나로 갔던 일을 아는 것은 발렌티아와 황실뿐이오. 발렌티아에서 나를 해할 리 없느니, 누가 나를 해치려 든다면 황실 아니겠소?”

“그럼…… 사신이란, 말은…… 누구?”

뜨끔.

말투가 어수룩할 뿐, 바보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말이 헛나왔소. 당신 수법이 원체 섬뜩하다 보니……. 처음에 단검을 던진 수법, 사신투(Grim Reaper’s Throwing)잖소?”

“……아, 납득.”

사신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타이니의 임기응변은 완벽했다.

“그럼 이유를 말해 주겠소? 나를 습격한 이유 말이오.”

“황제의 명령……. 가능하면, 카리나 가기 전에…… 아니라도 돌아오기 전에, 죽이라 했다. 그런데 너, 정령…… 너무 빨랐어.”

까득.

바로 튀어나온 그녀의 대답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황제가 왜?”

“몰라. 지시, 따를 뿐…….”

“끄으으응.”

어째서 황제가 이 시점에 나를, 아니 발렌티아를 공격하는가.

가뜩이나 불안한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그 정신 나간 황제 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악마추종자가 지척에 와 있고, 카룬에서는 이미 한바탕 대란이 일어났다.

한데 이 와중에 변란의 조짐을 무시하고 권력 다툼이나 하겠다고?

그럼 자신은 뭐 때문에 이렇게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는가.

고작 그런 놈을 살리자고?

‘이따위 황실을 꼭 지켜야 하는 거야, 영감?’

이 자리에 없는 검제를 향해 한탄해 보지만, 당연히 대답이 들려올 리 없었다.

‘젠장,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지. 일단 황도로 간다. 이런 고민은 검제에게 떠넘기고…….’

이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았다.

“난 최대한 빨리 황도로 돌아가 봐야겠소. 그, 누……님은 어쩔 생각이시오?”

‘누님’이라는 단어를 억지로 뱉어 내려고 하니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돌아서지 않았다면 분명히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누님……? 나?”

하지만 다행히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제가 이제 열넷입니다.”

그 말에 사신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지금 타이니와 사신은 170cm 남짓한 비슷한 키. 사신도 여자치고는 큰 키라지만, 타이니는 나이에 비해 훨씬 큰 키라고 봐야 했다.

이 시대에 평범한 성인 남자의 키가 딱 이 정도였으니, 어디 가서 20대라고 해도 믿을 만한 덩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신은 그보다 다른 데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누나…….”

그 혼잣말에 불안한 느낌을 받은 타이니가 다시 슬쩍 뒤를 돌아보는데,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린 사신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거기다.

“……가족, 있어.”

떨리는 음성과 함께 흘러내리는 눈물.

“더는, 혼자 아냐…….”

그 맑고 큰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서글퍼 보였다.

지켜보던 타이니의 눈동자까지 같이 흔들릴 정도로.

‘젠장…….’

양심의 가책이 사정없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이를 악물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정중하게 사과하리다.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반드시…….’

불쾌하고 찜찜한 감정이 가슴속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

좋은 사람, 그것도 아군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렇게나 힘이 든다는 사실이 새삼 사무치게 와닿았다.

암살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마지막 이성의 외침도, 사신의 순수한 눈물을 보는 순간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나, 루나 모르스. 동생은?”

또다시 들려온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써 돌아서려던 타이니도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도 들어 본 적 없는 사신의 이름을 이렇게 듣게 되다니.

“……알고 있잖소? 타이니……요.”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바람에 차마 거기에 ‘모르스’라는 성까지 붙일 수는 없었다.

표정을 정면에서 보였다면 연기라는 게 대번에 탄로 날 뻔했지만, 사신은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타이니 모르스……. 내 동생, 또 봐! 누나, 기억할게.”

그 말과 함께 그녀의 기척이 사라지려는 순간, 잊고 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떠오른 타이니는 다시 사신을 향해 다급히 돌아섰다.

“이런 바보 같은……!”

아무리 황실의 소속이라 해도 암살자는 암살자.

임무에 실패한 암살자들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뒤늦게 생각이 난 것이다.

‘사신의 몸에 해라도 생기면 안 돼. 그럼 예상 전력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 이건 사사로운 감정에 동한 게 아니라, 단지 계획이 틀어질까 봐 걱정하는 거야.

“지금 그냥 돌아가면 안 되잖아! 임무일 텐데!”

어느새 타이니는 밤하늘의 숲속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급한 목소리에 대답해야 할 사람은 어느새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 괜찮아. 누나가, 감당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타이니는 그 목소리의 잔향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그녀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정말로…… 기분이 더럽네.”

그렇게 자책하며 혼잣말을 내뱉다가.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사건을 정리한다. 그래야…….”

사신이…… 아니, 루나 모르스가 산다.

황실이 뒤집힐 일이 벌어진다면, 실패한 암살자라 한들 당장 필요한 전력을 처분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니…….

“서두르자, 월랑!”

“아우우우우우우우!”

다시금 질주하기 시작한 은빛 늑대와 기수.

그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 * *

“뭐?! 다시 말해 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실에 분노에 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카, 카리나에 3일 만에 나타난 그 모르스 놈이 폭뢰 세례를 받고서도 멀쩡히 벗어났다고 합니다.”

상석에 자리한 그림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심적인 충격이 상당해 보였다.

“대체 어떻게 그 거리를 3일 만에? 그놈 정령이 비행형도 아니잖아!? 아니면 놈이 정령술사 초인이라도 돼!? 그냥 기사 겸 정령술사잖아!! 이도 저도 아닌 반푼이!”

카룬의 일을 망친 주범을 반푼이라 폄하하면 그에게 가로막힌 조직은 더 하찮아질 뿐이었지만.

한 우물을 파지 않고 두 개의 능력을 동시에 키우는 멀티 클래스는 대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능력자들의 상식.

상석의 그림자가 쏟아내는 분노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가 아니라 순수 정령술사라 해도, 그 정도 경지의 보통 야수형 정령들보다 몇 배 이상 빠르다는 말인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빌어먹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속도라면, 그놈이 3일 안에 다시 황도에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예, 그렇습니다.”

상석의 그림자가 다시 고함을 내지르자 보고하던 그림자의 고개가 더욱 깊게 숙어졌지만.

“우리의 비밀 무기를 보고 견뎌 내기까지 한 놈이, 거사 직전에 도착할 수도 있단 말이지?”

상석의 그림자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지기만 했다.

암실 안 원탁에 앉은 다른 그림자들이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보고하던 그림자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 한 놈의 의견만으로는 황실의 방비 태세를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더군다나 놈은 지금 정체를 숨긴 채 황도에 잠입한 것이니만큼, 우리가 사전에 공작을 한다면 오히려 황제와 발렌티아의 갈등을 더욱 키우는 요소로 다룰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그제야 원탁의 여기저기서 목소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무엇보다 폭뢰는 우리 중 다수도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못했던 물건입니다. 그분의 역작 중 하나지요.”

“동의합니다. 저희가 폭뢰를 대량 생산한 것도 최근 들어서의 일이니, 그 존재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놈이 뭐라 지껄인다 한들, 그 의견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말이지만, 그림자들에게는 솔깃한 말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말로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상식’이라는 것이었으니까.

모두가 그럴듯한 논거를 품은 말이었지만, 상석의 그림자는 무엇이 못마땅한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아무래도 안 되겠어. 거사를 앞당긴다.”

폭탄 발언을 꺼내 들었다.

자연히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예?”

“안 됩니다!”

“맞습니다! 어떻게 준비한 자리인데요!?”

“황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특히나 황제와 황태자는 반드시…….”

하지만.

“그 모르스의 잡놈 때문에 카룬에서의 일이 모두 틀어졌다. 그분께서 지금 직접 나서지 못하시는 것도 모두 그놈 때문이야. 그런데 놈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기다리자고? 만약 놈이 또 무슨 짓을 벌여서 계획이 틀어지면? 그땐 누가 책임질 거지?”

폭풍처럼 쏟아져 나온 상석의 목소리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꼭 결혼식 당일만 황족들이 다 모이는 것은 아니야. 황제를 제외한 황족들은 결혼식의 예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날 모여 약식으로 예행연습을 한다.”

게다가 상석의 그림자가 한 말에는 나름의 설득력도 있었다.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여자한테도 작전의 변경을 알리고, 황제는 푸른 여우에게 직접 처리하라 일러라. 위험 부담은 있겠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우리로선 발렌티아 공작이 황제 곁에 없는 전날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고, 그렇게 그들의 계획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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