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성물 아모르(Amor)
“성물, 아모르를 대여해 달라? 게다가 그걸 움직일 수 있다고? 그 거대한 수정을?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너무 눈에 띌 텐데?”
황태자의 말에 등 뒤에서 바로 답이 들려왔다.
“성물의 핵만 빼서 활용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카룬에서 말입니다.”
“그래? 그런 것도 가능한가? 허, 거참. 볼수록 대단한 친구로군.”
“……차라리 잘된 거 아닙니까?”
황태자의 감탄에 호위 기사 익실란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 황태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들로선 황궁 결계야 내통으로 어떻게든 뚫는다 해도, 성물은 직접 파괴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냥 지켜보기도 곤란했는데 마침 잘됐어.”
결혼식에서 벌어질 변란. 그것을 노리는 놈들의 움직임을 감시할 때, 가장 곤란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차피 이제는 그 효력이 무의미하다 평가되는 성물이지만, 그럼에도 상징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을 파괴되게 두는 것이 과연 옳은가.
‘얼마 전 카룬의 일도 있고 말이야…….’
제국을 천년의 영화로 이끌고자 하는 그에게도 곤란한 선택.
“그래도 성물인데, 악마에 홀린 잡것들이 파괴하게 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타이니 그 친구에게는 여러모로 자꾸 신세를 지게 되는군. 내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줬어.”
하지만 황태자는 이미 반쯤 결단을 내렸다.
“다 전하의 은덕 덕분입니다. 그날, 그 참담한 사건도 용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익실란이 과거의 한때를 회상하며 눈살을 찌푸리는데, 황태자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벌써 기대한 이상의 성과를 내 주고 있지 않나. 어때, 내가 사람 하나는 정말 잘 보지?”
“그래도, 그때 그놈은 분명 선을 넘었습니다.”
주먹까지 부르르 떨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익실란.
하지만 황태자는 그저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자네는 너무 고지식한 게 흠이야.”
“그게 아니라 전하께서 너무 특이…… 흠, 죄송합니다.”
“하하, 괜찮아. 내가 특이하다는 건 나도 잘 아니까. 그런데, 기왕이면 특별하다고 해 주지 않겠어?”
“전하는 당연히 특별하십니다!”
그냥 던진 농담에 너무 우렁찬 목소리가 돌아오자, 황태자는 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익실란은 복마전 같은 황실에서 오래 일해 온 중년의 기사지만, 그럼에도 그의 충성심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좋아. 뭐, 바로 허락한다고 전해 줘. 아바마마의 억지를 막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는데, 이런 요구 정도는 들어줘야지.”
황태자가 생각보다 빨리 결론을 내린 그날 오후.
황궁 외곽의 성물 보호대에 누군가가 방문한 직후, 그곳에 있던 성물 아모르가 사라졌다.
상시 작동하는 대마법의 빛이 가득한 황궁. 그 안에서 투명한 빛을 발하는 성물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끼는 이는 극히 소수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수의 반응은 그야말로 즉각적이었다.
* * *
- 성물이 사라졌습니다.
“……왜?”
갑작스레 허공에 울려 퍼진 목소리에, 침소에 들려던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태자 전하께서 손을 쓰신 것 같습니다. 발렌티아가에서 토렌이라는 기사가 입궁한 직후 사라졌습니다.
“파괴된 것은 아니고?”
- 그런 기색은 읽지 못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물을 휴대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호오, 그런 일도 가능했던가? 휴대가 가능했으면 성물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나올 리도 없었을 텐데?”
황제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실 그의 입장에서 성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카룬의 경고야 소국의 헛소리로 치부할 뿐이니.
‘그까짓 성물 따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솔직한 마음으로는, 구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져 눈에 거슬리기까지 했었으니까.
“그래서 그놈은?”
- 바로 황도에서 사라졌습니다.
“뭐?”
- 추측건대, 발렌티아와 연관이 있는 놈이니 카리나로 향한 것 같습니다.
“뭐야!? 그럼, 다른 발렌티아의 정예들은?”
- 모두 황도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 대답이 들려오는 순간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기껏 친 올가미를 그렇게 쉽게 벗어났다고!?”
- 황실의 가법상 성물에 대한 임의 위치 조정이나 변경은 견책 사유가 됩니다. 그것으로 태자 전하를 압박하시면…….
“아니, 큰일을 앞두고 아들놈을 견제할 필요는 없다. 당장은 발렌티아가 더 중요하지.”
이를 갈다가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쉰 황제는 이내 다시 허공을 보며 물었다.
“놈이 성물을 휴대해서 간다 쳤을 때, 카리나의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 카리나에 있는 악마를 따르는 잡것들은 성광에 녹아 버리거나 벽에 부딪힌 듯 밀려나서 접근조차 못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현재 흑마법에 현혹된 것으로 예상되는 병사들이나 백성들 역시 모두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발렌티아는 전혀 피해를 보지 않고 말이지?”
- ……예.
“기분 나쁘군. 죽여라.”
- 예?
“놈이 카리나에 도착하기 전에 죽여라. 그러지 못한다면 돌아오기 전에 죽여.”
- 하지만 폐하, 저희 전력은 이미 그 건을 위해…….
“한 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고작 기사 한 놈! 그거 하나 처리 못 하나!?”
- ……명을 따르겠습니다.
황실 내 비밀 암살 조직의 수장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성물을 다루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일개 기사.
생각해 보면 무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하자면…….
‘그 아이를 보내야겠어.’
조직의 미래를 걸고 육성 중인 비밀 병기.
그 아이를 떠올리고 보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발렌티아 공작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위험한 임무에 조직의 미래를 낭비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 * *
“……성물이 사라졌다?”
암실의 상석에서 의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구석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예, 황궁의 성물이 사라졌다는 급보입니다. 저희에게는 좋은 일이긴 한데…….”
“이상한 일이지.”
“예, 그렇습니다.”
“푸른 여우에게 확인은 해 봤나?”
“푸른 여우 측에서 먼저 확인 요청한 사항입니다. 벌써 일을 벌인 거냐고.”
“허,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우리 말고도 성물을 파괴할 만한 사람이 있나?”
“파괴의 흔적은 없다고 합니다. 꼭 파괴가 아니라도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그 거대한 수정을 엄청난 물리력으로 움직이거나…….”
“그랬다면 목격한 사람이 많았겠지. 파괴도, 수정의 이동도 아니라면 짐작이 가는 것은 하나뿐이군. 그분이 말씀하신 그놈…….”
“아……!”
“그래, 그 모르스 놈이 가져간 거야.”
“하지만 그놈이 어떻게 황궁에서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발렌티아가 뒤에 있다고 해도.”
“잊었나? 놈은 용의 눈과도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발렌티아의 식객이 아니야.”
“그렇다면…….”
“황제, 아니면 황태자가 놈과 성물을 이용해서 우리가 뿌린 씨앗 중 하나를 날려 버릴 생각인가 보군.”
“놈은 분명 발렌티아의 명을 받았을 테니 카리나로 갔을 것입니다. 조치할까요?”
“흠. 하긴 해야겠지. 놈이 어떻게 성물을 그리 쉽게 다룰 수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놈의 출신 가문이나 소속과는 별개로, 그 능력이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르니.”
“그럼……?”
“카리나를 비롯한 씨앗들에게 알려라. 혹시나 놈이 나타나거든, 놈이 성물을 어찌 휴대하는지 확인하라고. 몸이 녹아내리든, 마기가 없는 씨앗을 준비하든……. 어떻게든 단서를 보고, 듣고, 그것을 전하라고. 놈을 잡기 위해서라면 ‘그것’의 사용도 허가한다.”
“예? 하지만 그건…….”
“우리가 왜 황실 직할령 중에서도 그 구석진 영지들에서 일을 일으켰는지 모르나? 그 세 군데에서 벌어진 일은 그날까지 절대 황도에 알려지지 않는다. 그건 그 정령술사 놈의 속도를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대로 실행해.”
“……예,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다시 암실은 침묵에 잠겨 들었다.
* * *
파바바박.
체고만 2m에 가까운, 거대한 은빛 늑대가 등에 사람을 태운 채 어두운 산길을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믐달이 고즈넉하게 떠 있는 하늘.
별빛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의 산속에는 본디 마수나 몬스터가 넘치기 마련이지만.
“쾌적하군.”
늑대의 기수, 타이니의 말처럼 주변에는 마수는커녕 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지금 그의 품 안에 있는 성물, 아모르의 힘이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투명한 장벽이 그를 중심으로 반경 500m의 공간에 펼쳐져 있었다. 마기가 없는 이 세계의 생명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 신이 내린 선물이 그의 쾌적한 질주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파아아아앙!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도록 산길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월랑이었다.
타이니가 성장함에 따라 더욱 덩치가 커지고 힘이 강해진 월랑.
든든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하나 아쉬운 점은 있었다.
“월랑, 정령술사 4단계는 아직 감이 안 잡혀?”
“컹!”
잘 모르겠다는 뜻.
그에 타이니는 다시 한번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최근 연이은 깨달음으로 성장의 방향을 다시 잡아가면서, 본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지름길이면서도 더욱 확실한 대도(大道)가 있다는 것을.
바로 정령술사로서의 성장.
‘정령술사로서의 성장은 내 영혼을 성장시킨다. 확실하게……!’
누군가 들었다면 당연한 말 아니냐고 했을 법한 소리.
본디 마나유저나 마법사가 다음 단계에 들어서면, 영혼의 격이 높아졌다는 표현을 쓴다. 실제로 육체를 넘어선 힘인 마나를 다루는 능력자들은 경지가 성장할수록 육체보다 영혼이 더 커지는 것을 체감하곤 하니까.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타이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의 영혼은 이미 초인의 경지를 경험했으니, 과거의 경지를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영혼의 변화를 겪지 않는 것이다.
단, 월랑과 엮인 정령술사로서의 격은 예외였다.
‘영혼이 커지고 질적으로 상승할수록, 오러마스터 이상의 경지로 가는 길이 쉬워진다.’
그러니 실질적인 전투력의 상승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 정령술사로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만, 월랑이 3단계의 경지를 주도적으로 알려 주며 유도했던 것과는 달리 4단계는 그리 쉽게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아니면 에스티나를 만나서 물어봐도 되고.’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그거 하나에 목을 매기에는 당장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러니 잡념은 털어 버리고, 당장은 현재에 집중한다.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자, 월랑! 더 신나게 달려 보자!”
달릴 때였다.
“아우우우우!”
밤하늘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달리는 월랑은 신이 난 듯 힘찬 하울링을 쏟아 내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뒤를 쫓던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너무 빨라. 산길을 평지처럼, 이건 못 쫓아.”
호리호리한 체형의 복면인이 월랑이 박차고 나간 커다란 발자국을 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반적인 탈것 아님. 오크족의 다이어울프, 비슷한 종으로 추정. 일반 기사도 아님. 사전 정보 오류…….”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혼잣말.
바로 곁에서도 알아듣기 힘들 것 같은 낮은 목소리, 음절을 끊어 읽듯 되뇌는 것이 그의 버릇인 듯했다.
“아세리안 서쪽 성문, 카리나까지, 일직선 방향. 지형지물도, 신경 안 씀. 돌아올 때도, 그럴 확률 높음, 길목을 잡고, 기다린다.”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움직이기 시작한 복면인.
그가 몇 발자국을 내딛는 즉시, 그 몸은 어두운 밤에 녹아들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