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반란
“뭐라?”
황태자가 용의 눈을 통해 전해 준 소식에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실 직할령의 소도시 세렝갈, 르이휴, 카리나에서 시장을 비롯한 기사단과 병사들이 평등한 세상을 외치며 봉기했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평등? 아니, 그 전에 봉기……?
황도 아세리안에서 악마추종자들을 찾아내는 일이 지지부진하던 찰나에 들려온 소식은 그야말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소도시 병력들이 무슨 깡으로?”
검제와 타이니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제나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민간에는 정보가 통제되고 있는데, 그 중심 수뇌부들이 죄다…… 허, 악마추종자로 추정되는 상황이라고…….”
“허…….”
공작이 깊은 한숨을 토해 냈고, 타이니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벌써 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신전에도 은밀히 소식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황실 마탑에서도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 경을 파견한다고 합니다.”
그 당혹스러운 소식에 잠시 말을 잃었던 검제는 이내 고개를 돌려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이게 전생에도 있었던 일이냐는 뜻.
하지만 타이니는 묵묵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사건이지만,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 목적은 분명히 보인다.
“……악마추종자들이 황도의 병력을 외부로 빼돌리려 하는 것 같습니다. 세렝갈이나 다른 소도시에 파견된 병력이 일주일 안에 황도에 돌아오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의 말에 검제 역시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런데, 정말 이렇게 눈에 띄게 일을 벌인다고? 카룬의 일로 놈들에 대한 경계심이 치솟아 오른 지 불과 3달이 되지 않았는데?”
그 한숨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당혹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이것이 결혼식에서 꼭 무슨 일을 벌이고 말겠다는 선포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그 말에 타이니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나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세렝갈이나 소도시의 사건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무조건 황태자 전하와 공녀의 결혼식이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음?”
“각하, 황궁의 마법진과 성물의 보호막, 그리고 경계 병력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악마추종자들이 황궁에서 일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말씀하신 대로 지금처럼 세간의 시선이 놈들을 주시하고 있는 마당에는요.”
“그 말은…….”
“놈들이 이 틈에 황궁에서 일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한 사회의 혼란 그 자체를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진압이 늦어진다면, 분명히 황실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날 테니까요.”
확실히, 황궁에서 재앙이 벌어질 거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상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카룬의 변란에서 적지 않은 악마추종자가 죽어 나갔습니다. 아무리 소도시라지만, 황실 직할령의 세 도시를 동시에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라면 놈들도 적지 않은 전력을 소모하는 것일 텐데요. 그 상황에서 황궁을……? 글쎄요.”
제나스의 말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었다.
수십 년간 소식이 없었던 악마추종자들이 카룬에서 벌인 일은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 객관적으로 악마추종자들이 그 이상의 여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추론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황궁에서 사건이 터질 거라 확신한다면.
그리고 놈들이 십여 년 후에 일시에 일어나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면.
‘세 소도시 정도는 놈들의 꼬리 정도에 불과할 거야. 놈들의 목표는 무조건 황궁이다.’
이 판국에 황궁에서 황족들이 죽어 나가는 사건까지 벌어진다면 그 혼란이 정점에 달할 테니까.
공작과 시선을 맞추자, 그 역시 그리 생각했는지 타이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니, 정령을 좀 바쁘게 움직여야겠다. 황도에 놈들이 스며들 날이 머지않았어.”
“각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 도시의 변란은 황궁의 전력을 빼내려는 속셈이 확실합니다.”
“타이니 군?! 아니, 왜 그렇게들 확신하는 겁니까?”
제나스 홀로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각하!?”
“……이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너에게도 설명해 주마, 제나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내 말을 따라라.”
그 무거운 눈빛에 제나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각오조차도 무색해지는 일이 바로 그날 오후에 전해졌다.
황실의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카리나의 반란을 하루속히 제압하여, 발렌티아가 황실의 사돈이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라. 기한은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황제의 직인이 찍힌 공문은 권유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허……. 이건 대체 무슨…….”
“황제 폐하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설마 황제가 악마추종자와 붙어먹……지는 않겠죠. 바보도 아니고. 예, 압니다. 과했습니다, 죄송…….”
타이니의 말에 어이없다는 눈초리가 쏟아졌지만, 지금 일어난 일은 그렇게 의심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황당했다.
“폐하께서 어찌 이런……. 허…….”
그 검제가 계속해서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세렝갈은 황실에서, 르이휴는 신전에서 처리하기로 했으니 카리나는 우리가? 흐……. 황실과 신전에 비견되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기뻐해야 하는 건가?”
평상시라면 완곡하게 거절해도 될 명령이다. 제국의 봉건제는 굳건하니, 아무리 황제라도 직할령에서 벌어진 일에 대영주들을 동원할 명분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묘했다.
“황태자 전하가 밀어붙여서 성사된 결혼식입니다. 거부한다면, 그 핑계를 대고 판을 엎을 수도 있습니다.”
제나스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폐하께서는 변란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우리 가문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싶으신 건가……? 심지어 결혼식 전까지 처리하라고 못을 박기까지 하셨으니,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판을 엎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각하!?”
“……아니,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허, 그나저나 이건 정말 어찌한다…….”
카리나가 발렌티아 영지에서 가깝다고는 하나,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영지에서 군대를 편성하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
그렇다는 건.
“고위 기사들을 동원해 수뇌부를 정리하는 식으로 빠르게 처리하라는 거겠지. 그리고 그럴 만한 정예들은…….”
“지금 대다수가 수도의 저택에 와 있지요. 솔직히 카리나가 우리 영지보다는 황도에서 더 가깝기도 하고요.”
검제의 곤란한 시선을 받은 제나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바로 말을 받았다.
그러자.
“……이거 정말 황제 폐하께서 악마추종자들과 손을 잡은 건 아닐까 의심도 드는군.”
“각하!?”
“아, 알아, 알아. 그럴 리야 없겠지.”
지상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가 뭐가 아쉬워서 악마추종자들을 끌어들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당장 수도에 있는 우리 가문의 전력 대부분을 이동시키라는 명을 내가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혼식이 코앞이니 내가 직접 움직일 수도 없고.”
“……제한된 시간까지 고려하면 저희 가문의 인재들을 대거 투입하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요. 확실히 황제 폐하께서 각하를 견제하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지. 차라리 결혼식을 취소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구나.”
“하지만 그러면…….”
“내 딸의 미래가 꼬일 테지.”
검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극단적인 선택지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와 혼사가 오간 여자를 어떤 귀족이 데려가려 하겠는가.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눈앞에 보이는 최선의 선택지를 애써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거기다 그리될 경우, 아마 클로이뿐만 아니라 발렌티아 가문에 대한 추문은 물론 가문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따라붙을 것이다.
가문 위상의 격하.
‘황제 폐하가 노리는 것이 그것일 수도 있지.’
검제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타이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일주일 안에 놈들을 제압하고, 결혼식 전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검제와 제나스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뭐?”
“……타이니 군?”
“저 혼자면 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그 늑대의 정령……? 하지만 아무리 그 속도라고 해도 일주일은 불가능한 거리…….”
그 말에 검제는 인상을 찌푸리고, 제나스는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타이니는 그 불신의 찬 시선을 자신감 어린 미소로 받았다.
“지금 월랑의 능력은 그때와는 또 다릅니다. 게다가 저는 관도가 아닌 산길을 뚫고 일직선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아…….”
“가는데 삼 일, 오는데 삼 일, 놈들을 처리하는 데 하루……. 충분히 가능합니다.”
“허…….”
그 자신감 넘치는 말에 검제와 제나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 그래. 논리는 이해하겠는데…….”
그들이 타이니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블레이더급의 타이니가 챌린저급의 제나스와 대등하게 겨루는 것도 본 마당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반란이란 말이다, 반란! 소도시라고는 해도 연루된 기사만 수십에 병사는 수백에 달할 터. 거기에 악마추종자들이 무슨 함정을 파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무조건 함정이 있을 겁니다. 일반 기사 수십 정도야 타이니 군에게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서두르다가는 그 함정에 오히려 당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초인도 아닌 기사가 홀로 가서 뭘 하겠는가.
“거기다 그 뒷정리 같은 경우는 전투와는 또 다릅니다. 설령 초인이 간다 해도 빨리 끝날 일이 아니죠. 잔당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두 사람의 의문에 타이니는 싱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
“한 가지 조건만 더해진다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그것이 될지가 문제인데요. 좀 민감한 사안일 수 있어서…….”
“그게 뭔데!? 한시가 급하니 뜸 들이지 말고 지껄여 봐.”
“영감, 진짜 성격 더럽…….”
“뭐 인마!?”
“아, 아니. 큼, 그게 좀 곤란한 방법일 수 있다고요. 제 생각은…….”
이어진 말에 검제와 제나스의 표정은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타이니의 말이 끝나자 검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그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아니 가능할 수밖에. 그런데 황실에서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은데?”
“허락 안 해 주면 가서 수뇌부만 때려죽이고 바로 오겠습니다. 뒷정리는 발렌티아 영지 병력이 해 주면 되고요. 함정이야 뭐, 알아서 잘 빠져나오죠.”
“그건 안 된다.”
“예?”
“네놈은 몸을 함부로 굴려선 안 돼. 솔직히 말해서 황궁의 재앙을 막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네놈이 제대로 성장하는 게 중요하단 말이다. 다른 재앙을 막기 위해서면 몰라도, 이런 하찮은 일에 목숨을 거는 건 절대 안 돼!”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비교를…….”
제나스는 황당해했지만, 검제의 눈빛은 진지하다 못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날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눈빛이 단단한 건 타이니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위험하다고 안 하다니?
그런 것은 괴력의 기사, 아니 이제 광휘의 기사가 된 타이니의 사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도 승부입니다, 각하.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목숨 정도는 걸 수 있어야 진짜 남자죠. 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세상 대다수의 정상적인 남자들을 가짜로 만드는 발언에 검제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런 건 승부가 아니라 미친 짓이라고 하는 겁니다, 타이니 군.”
제나스가 질린 얼굴로 한마디 보탰지만, 타이니는 씩 웃으며 할 말을 할 뿐이었다.
‘결혼식 전에만 돌아오면 되니까.’
발렌티아가의 문제도 해결할 겸…….
“그러니 여쭤봐 주세요. 황실에 있는 성물, 아모르(Amor)를 대여할 수 있는지를. 그것만 있으면 제가 위험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집니다. 아, 제가 성물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전달해 주세요.”
성물을 빌리는 것. 그게 타이니가 떠올린 작전이었다.
아직은 접근할 수 없는 황궁 안, 혹시나 있을지 모를 수작에서 성물을 보호할 겸 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