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황제
“역시, 영민하시군요.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마마.”
마치 연극배우처럼 만들어진 미소를 짓는 귀부인을 보며, 클로이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
최선의 대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나마 이것이 지금 지을 수 있는 가장 괜찮은 표정이었다.
도무지 그 필요성을 알 수 없는 이 예절 수업은 사람의 정신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으니까.
‘앉을 때 손가락 각도가 대체 왜 중요한데, 왜!? 그런 걸 신경 쓰는 변태가 세상에 어딨어!?’
속으로 욕이라도 퍼붓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또 그러다 보면, 평소 자신이 뜯어말리던 아버지나 오빠들의 행태가 스스로에게도 보이는 듯해 기분이 축 처지기도 했다.
황궁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옥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유일한 내 편이라 생각했던 비비안조차 정해진 구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 침소에 들어갈 무렵이 아니고서야 대화를 나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차라리 신전에 귀의해 버릴 걸 그랬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이내 예절 수업 선생이 떠난 걸 확인한 클로이는 한숨을 내쉬며 발치에 있던 은빛 강아지를 들어 올렸다.
“월. 너 없으면 어쩔 뻔했니.”
“컹? 킁, 킹.”
잘 자다가 갑자기 들어 올려진 월랑이 배를 간질이는 클로이의 손길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언니한테 와.”
“킁.”
마음대로 하라는 듯 다 포기한 표정으로 클로이의 품에 푹 안긴 월랑은 이내 다시 고로롱 소리를 내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화들짝 놀란 클로이가 월랑을 슬쩍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서자, 황금안의 잘생긴 청년이 들어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습니다, 클로이 공녀.”
“전하, 그냥 비빈으로 칭하셔도 되는데……. 부담스럽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아직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예의는 지켜야지요. 아, 물론 식을 올린 뒤에는 예의를 안 지키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하.”
그 어설픈 농담에 클로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이 갑갑한 궁 생활을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두 번째 활력소가 바로 이 미래의 낭군이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자꾸 오셔도……?”
“그…… 바쁘니까 힘을 얻고 싶어서 왔습니다.”
“……예?”
“요즘은 공녀의 얼굴을 보아야지만 의욕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클로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국의 황태자라는 사람이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할까.’
좀 전까지 가슴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어 왔다는 것이 결코 빈말은 아니지만, 오늘은 조금은 곤란한 부탁도 해야겠습니다, 공녀.”
매일 찾아와 소소한 담소를 나누던 황태자가 그답지 않게 조금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클로이도 절로 긴장이 됐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전하.”
“오늘 저녁에 폐하와 함께 만나기로 한 일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법 수업을 받고 있었…….”
“혹시 폐하께서 마음 상할 만한 말씀을 하시더라도, 나를 봐서 좀 참아 주었으면 합니다. 티 나지 않게요.”
“……예?”
……이건 무슨 소리지?
자연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데.
“……대외적으로도 조금씩은 알려졌지만, 폐하께서 발렌티아가에…… 아니, 정확히는 장인어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귀족들 중에서도 워낙 독보적인 위치에 계시니까요.”
“예?!”
그 말을 들은 클로이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물론 그런 소문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줄곧 무시해 오던 차였다.
‘그런데 왜 날 황태자비로……?’
그도 그럴 것이, 현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
혼란스러운 그녀의 심정을 짐작한 듯, 황태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공녀와 내가 함께하듯, 황실도 발렌티아가와 함께 가야지요. 그러기 위한 혼인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내가 이 혼인을 억지로 밀어붙인 탓에 폐하께서 심기가 좀 더 불편해지신 겁니다. 조금만 이해해 주었으면 해요.”
“……예.”
그 말에 대답하는 클로이의 표정이 조금 흐려지자, 황태자가 아차 싶은 기색으로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아, 물론 내가 이 혼인을 밀어붙인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공녀에게 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은 진실이니, 내 마음을 의심하지는 말아 줬으면 해요.”
“예, 전하.”
내내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황태자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마음을 잘못짚었다.
클로이 역시 고위 귀족의 자식. 하물며 귀족으로서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 온 사람이다.
비록 출가와 혼인 사이에서 고민은 했을지언정 정략혼에 대한 거부감은 그녀에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감이 자상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굳은 이유는.
‘좋은 말만 해 주려 하는 이분이 이렇게 경고할 정도면, 발렌티아에 대한 황제 폐하의 악감정이 보통은 아니라는 것 같은데…….’
황태자의 말에서부터 느껴지는 황제의 적대적인 태도와 가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 미리 걱정은 하지 말자. 그냥 자상한 전하의 과한 걱정일 수도 있잖아. 만약 그렇다 해도…….’
본디 긍정적인 그녀는 최대한 낙천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이 순간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무심코 말로 꺼내 버렸다.
“그런데 전하. 제가 심하게 긴장할 것 같아서 그런데, 혹시 폐하를 뵐 때 월을 데려가도……?”
“컹?”
늘어졌던 월랑의 귀가 쫑긋 서는데, 그런 녀석을 보며 황태자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공녀. 정말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헛말이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역시나 안 되는 게 당연하겠지.
그렇다면…….
“킹?”
아쉬운 얼굴로 월랑의 머리를 쓰다듬는 클로이는 속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도 황제 폐하를 뵌 지 오래라고 했어. 폐하의 악감정이 소문보다 더 심하다면, 일단 가문에 알려야 해.’
가뜩이나 어수선한 시기.
아버지가 황궁 내부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 *
“황제 폐하 듭시오!”
내관이 그리 소리를 치자마자 거대하고 화려한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대전으로 들어섰다.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태자와 클로이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황금빛 화려한 비단 용포를 두르고 금룡이 조각된 황관을 쓴 노인, 황제는 그런 두 사람을 아주 느린 걸음으로 지나쳐 대전의 옥좌로 향했다.
이십여 미터의 거리를 거의 1분에 걸쳐 이동한 황제가 옥좌에 털썩 앉는 순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내관의 신호에 따라 황태자와 클로이가 동시에 인사를 했고, 황제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클로이가 이미 전해 들은 법식대로 말하며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에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흠칫할 정도로 강렬한 안광.
새하얗게 센 머리와 주름진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황금용의 자손임을 뜻하는 황금안만큼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번득이는 눈빛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 만큼.
그때.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바마마.”
옆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돌려 주었다.
“물론 강녕하지. 태자가 국정 대다수를 대신해 주는데 강녕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온 말은 친자식을 향한 것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차갑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황태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황실의 관례에 따라 국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제국은 언제나 폐하의 것입니다. 제가 가진 이 권한 역시 폐하의 뜻에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그 권한, 도로 내놓겠느냐?”
이어진 황제의 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 역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일순간 시선이 부딪치는 황제와 황태자. 그 눈빛은 아비와 자식이 주고받는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웠다.
“원하신다면…….”
“되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나온 황태자의 말은 바로 잘렸다.
“그래 봤자 모든 귀족이 들고일어날 테지. 황실 마탑과 황실 기사단만 내주고 간신히 밀어낸 황제가 다시 돌아온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냐.”
그 말에, 억지로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던 황태자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실의 법도에 의한 절차였습니다, 아바마마.”
“그 법도가 어찌 황제의 위에 있는지 궁금한 사람은 나뿐인가?”
한 명의 폭군이 제국을 망치지 않도록 만들어진 법도.
그것을 뒤집어엎으려는 욕망이 그대로 느껴지는 발언에 황태자는 거듭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 노욕을 부리는가.
더 이상 누릴 영화가 무엇이 있다고…….
‘역시 아바마마는 제국의 해악이다.’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억지로 삼키며, 황태자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법도대로, 오늘은 황태자비가 될 발렌티아 공녀와 함께 왔습니다.”
그러고는 법도가 황제의 위에 있음을 강조하듯 자신의 반려를 소개했다.
그에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돌린 황제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감히 또 하나의 황제라 칭하는 자의 여식이라지.”
“폐하, 그건 무지한 신민들이 붙인 별명일 뿐입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면…….”
황태자가 그답지 않게 발끈해 나서는데.
“‘제국의 검’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의 여식, 클로이가 인사드립니다, 폐하.”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나온 클로이의 목소리에 황제의 눈에 이채가 번득였다.
“……제국의 검이라?”
“소녀의 아비가 최근 연합의 검을 꺾고 과한 영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제국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속 좁게 견제하지 말라는 의도가 굉장히 순화되어 담긴 말이었다.
그에 슬쩍 미간을 찌푸리던 황제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그래! 과연,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는 건가. 태자가 딱 자신 같은 반려를 골랐어.”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트린 황제의 입에서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제의 표정만으로는 그 진심을 읽을 수 없었다.
“그 당돌함이 싫지는 않아. 하지만 그 영민함은 이제 황실을 위해서만 발휘해야 할 것이다, 태자비.”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이것은 의례상 하는 말이 아닌 경고다. 태자비가 아닌 공녀와 공작에게 하는 경고.”
“아바마마!”
태자가 황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아스란의 혈통은 고대부터 인류의 지배자로 점지된 혈통이니, 모든 인간의 위에 서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명심하라. 초인이니 검의 황제니 하는 같잖은 이름이 결코 황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그리 외치는 황제의 눈에 담긴 것은 분명한 광기였다.
한순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클로이는 그 말에 차마 방금처럼 당돌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나.
- 컹!
- 지배자의 혈통은 무슨……. 역시 X신 중에 상 X신이었어.
그녀의 두꺼운 예복 주머니 안에서 황제의 말을 듣고 있는 손가락만 한 정령의 주인은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