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검제, 그리고 미래
두 오러유저 간의 대결은 세간에 커다란 화제를 낳았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십여 년 만에 성사된 오러유저 간의 대결인 데다가, 수만의 군중이 직접 목격까지 했으니,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결과 역시 충격적이었으니.
발렌티아 공작이 웨폰 마스터를 이겼다!
무기의 달인(Weapon Master)보다 검의 달인(Sword Master)이 더 강하다!
발렌티아 공작이야말로 검의 황제(Sword Emperor)다.
검제(Sword Emperor)라는 별명이 황도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타이니가 ‘결국 또 같은 별명이 붙네.’ 하고 신기해하고 있을 때, 그 황도의 가장 중심지인 황궁의 내부에서는 그 소식을 들은 누군가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필 별명이 붙어도 그런 별명이……. 익실란, 지금 여론 조작은……?”
황태자, 브레들리의 말에 호위 기사 익실란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힘듭니다. 무엇보다 대련의 목격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는 중인지라…….”
“왜 하필 ‘황제’야! 또 아바마마를 자극할 것 아닌가?!”
탄식을 토해 내는 황태자를 바라보던 익실란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제국의 안정을 위해 이렇게 희생하고 계신다는 것을 신민들이 알아야 할 텐데요.”
“……희생이라.”
피식.
“희생이랄 것까지야 없지. 그녀만 한 배필은 없으니……. 하지만 어째 그조차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군. 기껏 인연을 맺으면 뭘 하나? 장인어른이 또 황제 폐하의 열등감을 자극하게 되었는데…….”
그 자조적인 푸념에 익실란은 더 이상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모셔 온 어린 주군이 얼마나 큰 고민을 품고 있는지 잘 알기에, 창밖의 밝은 햇살을 보면서도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는 그의 곁을 말없이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차분히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익실란.”
“예, 주군.”
“아직도 그 마음은 유효한가? 황실 기사단을 개혁하고 싶다는…….”
그 말에 움찔하던 익실란은 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지금의 황실 기사단은 분명히 잘못되었으니까요.”
“그래……. 이미 10년 전부터 그리웰 경을 능가해 황실 최강의 기사라 평가받은 그대가, 고작 내 호위 기사에 묶여 있는 것은 확실한 인재 낭비지.”
“저, 전하!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아니, 틀린 말은 아니야. 이대로 아바마마의 기사 경시 정책이 계속되면, 결국 제국은 두 쪽으로 쪼개진다. 기사와 마법사는 우리 제국을 이루는 두 축이거늘……. 그래서야 곤란하지.”
“전하…….”
“심지어 그 이유가 지배자의 열등감이라면 더더욱 말이 안 돼.”
나이에 비해 주름이 깊은 자신의 아버지, 황제를 떠올리는 황태자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무의 절반 이상을 아들에게 떠넘기면서도, 황실 마탑을 비롯한 황실의 무력 수단만큼은 꽉 잡고 놓지 않는 황제.
‘외부에서는 아버지를 무난한 지배자로 생각하고 있지만, 제국은 그 때문에 속에서부터 썩어 가고 있다. 신전도…….’
혹자는 지금이 제국의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그것은 더 커질 수도 있던 국력이 지배자의 역량 탓에 상쇄된 결과일 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황태자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툭 튀어나온 말.
“2황비는 여전히 ‘그들’과 접촉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움찔하던 익실란은 이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참 어리석은 여자야. 이미 사라진 가문에 집착해서 현재를 포기하려 하다니.”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처리…….”
“아니.”
황태자는 담담히 손을 들어 올리며 익실란의 말을 끊었다.
“내버려 둬.”
“……예?”
“이참에 황실의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아. 더구나 내 손을 직접 더럽혀야 하는 것도 아니라면.”
“전하!?”
익실란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병든 부위라면…….
오랜 시간 그와 함께한 익실란은, 지금 황태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세히 알아봐. 2황비의 손발이 되어 주는 자가 그리웰 경 말고 또 있는지. 그리고 수작을 부린다면 언제를 목표로 하는지. 뭐, 대충 짐작은 가지만 말이야.”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전하.”
“그럴 리가?”
“……예?”
“내게는 자네도 있고, 이제는 연합의 칼을 꺾은 제국 최강의 검도 있네. 그 든든한 벽들을 두고 내가 위험해질 확률은 낮겠지.”
그 말에는 익실란도 차마 반발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일은 2황비와 ‘그들’이 저지를 터.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혹시나 놈들이 무리한 수를 두더라도, 파악만 해 두고 방관하도록 해. 위험이 뭔지 안다면, 그건 더 이상 위험이 아니지. 안 그래?”
어린 주군의 말은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 잠시 머뭇거리던 익실란은 이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이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하여!”
익실란의 대답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의 피앙세를 보러 가 볼까. 정령 덕에 외로움이 조금은 덜어졌으려나?”
그리 말하는 황태자의 얼굴에는 오늘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클로이를 생각하면 따스해지는 마음 덕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 꼬마 기사…… 아니, 이제는 꼬마도 아닌가? 갑자기 큰 키도 그렇고, 아무튼 희한한 능력이 많은 녀석이야. 기사로서 재능도 그렇고.’
타이니.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 검은 머리 청년은 정말 대단한 인재였다.
‘설령 기사로 대성하지 못하더라도 눈여겨 뒀다가 중용해야겠어.’
광휘의 기사라는 거창한 이명도 그의 가치를 다 반영하지 못한다.
미래의 오러유저, 전설의 마수를 쫓아낸 영웅.
그 꼬리표들도 다 좋지만, 무엇보다…….
‘천민 출신이라는 그를 등용함으로써, ‘새 황제’는 출신에 상관없이 인재를 뽑는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겠다.’
그렇게 아바마마와는 달리 공정한 지배자로서 제국의 전성기를 일굴 것이다.
‘그래, 반드시……!’
황태자가 그렇게 긍정적인 다짐으로 직전의 스트레스를 떨치려 하는데, 무거운 분위기를 완전히 떨치지 못한 익실란이 끝내 한마디를 덧붙이고야 말았다.
“……2황비의 일을 발렌티아 공작에게도 말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타당한 의견으로 들렸지만, 황태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돼.”
“예?”
“일이 벌어지고 난 뒤, 혹시라도 내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 나오면 큰일이야. ‘용의 눈’을 제외하면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명심해 둬, 익실란.”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익실란은 황궁의 밤이 유난히 어둡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 * *
황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련이 끝나고 불과 이틀 뒤.
발렌티아 가문의 수도 저택에 웨폰 마스터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일은, 곧바로 이 저택의 주인에 관한 칭송으로 이어졌다.
“역시…….”
“우리 공작 각하의 아량에 마음이 움직인 거야.”
“역시 검제…….”
그럴 만한 일이었다. ‘어떤 요구’든 들어주기로 했었다는 내기의 전후 사정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고작 황도를 유람(?)하는 것으로 끝내 버린 검제의 너그러움은, 내부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정말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웨폰 마스터가 공작의 저택을 찾아온 게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당사자들의 마음은, 너그러움이나 감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라니까 왔소이다. 아, 부상을 수습하느라 하루 늦은 점은 양해 바라오. 그런데 왜 이런 자리를……?”
검제의 요청에 따라 수행원도 모두 내보낸 그리드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숙였다.
다만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듯 잔뜩 구겨진 미간은 숨기지 못했다. 뭘 발랐는지 광택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빗어 넘긴 푸른 머리 탓에, 그의 넓은 이마가 훤히 드러난 채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미세하게 떨리는 콧수염은 덤이었다.
“……우리 사이에 안 어울리는 점잔은 집어치우고 편하게 말씀하시죠, 그리드 대공.”
검제의 그 말에 그리드는 옆에 서 있는 타이니를 슬쩍 보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귀족은 사적인 자리에도 품위를 지켜야 하는 법. 공작이야말로 아랫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모범을 보이시는 게 좋겠소이다.”
누가 들어도 맞는 말로 반박당한 검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 성격 더럽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 그냥 편히 말하지?”
“허, 어디서 그런 모함을 하시오? 공작, 귀족으로서 몸가짐을…….”
“……힘을 가진 사람은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더욱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 그렇기에 내가 품위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다.”
검제를 타박하려던 그리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신의 말을 끊은 타이니에게 돌아갔다.
자신이 주변에 자주 하는 말이긴 한데, 그걸 외국의 놈이 안다고?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철없던 어린 시절에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사촌 동생을 죽인 트라우마가 만든 습관이라 말했었죠.”
이어진 말에는 그의 표정이 단숨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가슴속 깊이 간직해 뒀던, 이제는 자신과 형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모르는 가슴 아픈 비밀.
“……너, 뭐 하는 놈이냐?”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퍼지는 살기.
일순간에 방 안을 가득히 메운 그 살기가 오롯이 타이니에게 집중되자,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문 타이니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답했다.
“당신이…… 내게…… 직접…… 끙, 말해 준…… 사실입니다…….”
“개소리! 난 네놈을 본 적조차 없다!”
“미래에…… 말이죠.”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격분한 그리드의 전신에 이내 푸른 오러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타이니에게 집중되던 살기가 몇 배는 증폭되는데.
우우웅.
더 이상 그냥은 버틸 수 없어진 타이니가 마나를 끌어 올려 가까스로 기세를 밀어 내자, 그리드의 눈동자가 더욱 가늘게 변했다.
그리고 그때.
“사실일세, 그리드.”
스아아아.
붉은 오러가 일렁이며 그리드의 살기를 밀어 냈다.
그러자 그의 갈색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검제의 간섭이 그의 성질을 더욱 돋운 것이다.
“이건 무슨 수작이지, 아스!?”
다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애써 분노를 누르는 듯했다.
“내 애칭까지 생각날 정도면 대화는 가능하겠군. 좀 더 참고 들어 보라고, 그린.”
평생을 싸워 온 숙적이자 그 관계가 너무 오래 지속된 탓에 서로의 애칭까지 아는 악우(惡友)가 되어 버린 두 초인은, 한참이나 시선을 부딪치다가 이내 약속이나 한 듯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에 타이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검제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나이에 옛날 애칭이나 들을 줄은 몰랐다.”
“네놈, 이름이 너무 길어. 사석에서까지 그 긴 이름 부르긴 귀찮다.”
“……뭐, 진정했으면 됐네. 어쨌건 이 아이의 얘기를 들어 보게. 충분히 들어 볼 만한 얘기일 테니까. 아니, 꼭 들어야만 하는 얘기지. 특히 ‘우리’는.”
우리라는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쉰 그리드가 다시 타이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이, 애송이. 내가 들어야 할 얘기란 게 대체 뭐냐? 만약에 또 방금 같은 헛소리나 지껄이면 정말로 뼈와 살이 분리될 줄 알아라.”
눈을 살벌하게 부라리며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
품위 운운하던 귀족은 어디로 갔는지, 화난 검제보다 더 뒷골목 깡패 같은 그리드의 모습에도 타이니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래……. 그래야 당신답죠.”
“당신? 하, 이 애송이가…….”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리드 영감님.”
“여, 여, 영감!!? 이 새끼가 정말 미쳤나!!?”
“……들으라고! 좀만 더 들어!! 그리고 타이니, 네놈도 쓸데없는 사족은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해!!!”
흥분한 그리드를 공작이 겨우 말리는데,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타이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드 반 셀던…… 음, 올해면 56세겠군요. 원래대로라면,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 15년쯤 뒤일 겁니다. 셀던 왕족이 천사종의 피를 이은 증거라 자랑하는 그 하늘색 머리가 반쯤 새하얗게 셌을 때 말입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너무나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또한…….
“너무 그럴듯해……. 그래, 확실히 다 내가 했을 만한 행동들이야. 그런데 정말…… 미래가 그렇게 X같이 바뀐다고?”
“……그렇습니다.”
“하……. 황당할 따름이군.”
그리드는 황당하다 못해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은 이야기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황당하다.
그의 시선이 차분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악우, 에스가르드를 일견했다.
짧은 침묵 후, 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설령 그 말을 내가 믿는다 해도…… 그걸 왜 굳이 내게 말해 주는 거지? 미래의 동료라서? 어쨌거나 지금은 아니잖아? 심지어 난 제국인도 아니고 말야. 그리고, 너 혼자 미래를 안다면 따로 쓸데가 더 많을 텐데…….”
“말씀드렸듯이, 제국의 힘만으로 이겨 낼 수 있는 위난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미래의 정보로 취할 수 있는 이득을 다 취한 다음에 말해도 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차피 그로 인해 얻을 부귀영화 따위, 제겐 의미 없습니다. 아마 검제 역시 마찬가지이실 테고요.”
“……나야 가질 만큼 가졌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악우는 둘째 치고,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아니, 본인 말대로라면 이제 고작 열네 살인 덩치 큰 어린애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저 나이에 부귀영화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고?’
게다가.
“무엇보다……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목숨을 걸고라도 약속을 지킬 ‘진짜’ 기사라는 것을.”
“……X발.”
그 무엇보다 자신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 그 말에, 그리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