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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86화 (86/500)

86화. 초인 대전

저벅저벅.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독 선명한 걸음 소리가 울리며 주변의 함성을 집어삼켰다.

그리드 반 셀던은 주변 소음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정도가 딱 좋지. 너무 시끄러우면 품위가 없어 보이니까.”

잘 정리된 콧수염을 살짝 튕긴 그가 깔끔하게 빗어 넘긴 하늘색 머리를 점검하고는 다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맞은 편에 다가오는 숙적, 에스가르드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자신의 의도를 이해한 듯, 역시나 심령을 울리는 투기를 뿜어내며 정적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하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오러유저가 작정하고 마나까지 동원해서 뿜어내는 투기는 전장의 분위기를 주도하기 마련이라, 두 오러유저의 투기로 고요해진 이 넓은 공간은 그야말로 그의 맘에 쏙 드는 특별한 무대였다.

“오랜만일세, 에스가르드.”

“그래. 오랜만이군, 그리드.”

이제는 발렌티아 공작이 된 숙적의 목소리는 수년 만에 듣는 것임에도 바로 어제 들은 것처럼 익숙했다.

“남의 나라 잔치에 와서 깽판을 놓는 것도 유분수지, 자기 신분을 자각하고 있긴 한 건가?”

마나를 이용해 쩌렁쩌렁하게 울리게 만든 목소리로 쏟아 내는 비난조차도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린 시절,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소한 이유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라이벌 구도.

이제는 적인지 친구인지도 헷갈리는 모호한 감정으로 얽힌 사이가 되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적이지……!’

그리드는 가볍게 혀를 차며 똑같이 마나를 동원해 목소리를 퍼트렸다.

“깽판이라니? 이래서 자네가 거슬린다는 거야. 고위 귀족답지 않게 품위 없는 말투……. 이제야 제국 사람들도 자네의 본색을 좀 알겠군그래.”

에스가르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자기 행동이나 돌아보고 남의 말투를 지적하시지, 그리드. 행동이 품위 없는 것보다야 말이 험한 게 낫지 않겠나?”

……역시나.

‘거슬리는 녀석이란 말이지.’

챙.

“긴말은 필요 없겠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 보지.”

그리드는 습관대로 왼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부터 빼 들었다.

검을 기본으로, 등에 매단 창과 활, 오른쪽 허리의 손도끼와 팔목에 찬 버클러까지 번갈아 활용하는 것이 그의 전투 스타일.

그런 변칙적인 수법이 기사답지 않다는 이유로,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저 에스가르드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매번 품위를 강조하는 사람이 정작 싸울 때는 품위가 없다는 말도 따라붙었고 말이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얘기지.’

전장의 품위란 결국 승리다.

그리드는 다섯 개의 무기를 다루면서 어떤 전장에서든 상황에 맞게 대응할 수 있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전장의 신사이자 지배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나와 검으로 겨루겠다? 이제 그 무모한 짓거리는 그만둘 때도 된 거 같은데?”

웬만한 아이 키만 한 무식한 대검 하나를 꺼내 들고 적을 으깨 버리는, 저 전장의 깡패와 자주 비교되는 것이 못마땅했다.

더 열 받는 건, 저 말이 일부 사실이기도 하다는 것.

물론 자신이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의 얘기지만 말이다.

“오러유저가 된 뒤에 각별한 깨달음을 얻어서 말이야. ‘몇 년은 앞선’ 선배로서, 한 수 가르침을 주고자 하네.”

그 말에 붉게 달아오르는 숙적의 얼굴이 마음에 들어 빙그레 미소를 짓는데.

“그럼 그 가르침…….”

스슥.

“……어디 한번 받아 보지.”

100m는 떨어져 있던 놈이, 갑자기 눈앞에서 튀어나온 듯 순식간에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그그그극.

“크…….”

놈의 성격처럼 무식하게 일렁이는 붉은 오러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엄청난 힘을 싣고 자신을 압박했다.

쩌저저저적.

그그그극.

역시나, 녀석의 패턴은 여전했다.

“이게 무슨……!”

본능적으로 빈틈을 노려 휘두른 장검이 충격을 분산했음에도, 그 막강한 힘을 버티고 선 지면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검술이냐!”

쾅!

오랜 시간 품어 온 짜증이 폭발하며 놈을 튕겨 냈다.

단순하게 힘과 속도만을 극대화해서 무력을 행사하는 놈의 수법이 검술이라 불리는 것조차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진짜 검술을 보여 주마.’

파앗.

일순간 다시 벌어진 놈과의 간격을 순식간에 좁히는 신속한 스텝.

마나는 물론이거니와 육체의 효율까지 극대화하여 움직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는 찌르기.

오랜 궁리 끝에 찾아낸, 최적의 효율과 최고의 빠르기를 가진 일격.

그 끝에서 회오리치는 푸른 오러는, 주인의 뜻을 충실하게 받들어 모든 것을 꿰뚫을 듯 회오리치며 적의 몸뚱이를 관통하려 했다.

그러나.

틱.

파괴의 권능, 오러끼리 부딪친 소리라기에는 말도 안 되게 작은 소음만이 나직하게 울리며 예정된 결과가 비틀어졌다.

“무슨!?”

회심의 공격, 푸른 오러의 소용돌이가 놈의 대검 옆으로 슬쩍 스쳐 지나가는 순간.

불꽃처럼 넘실대는 붉은 오러를 실은 대검이 그대로 자신의 옆구리를 노려 왔다.

‘……빌어먹을!’

검날 흘리기.

갓 기사가 된 애송이들이나 즐겨 쓰는 기초적인 수법에 말린 것이다.

파괴의 권능, 오러를 받아치거나 상쇄하는 게 아니라…….

‘흘리는 게 가능하다고?!’

아주 오래전, 한참 미숙하고 젊었던 시절 처음 당했던 수모가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그리드는 애초의 다짐과는 달리 자신도 모르게 왼팔을 들어 올렸다.

팔목에 찬 버클러에서 푸른색 빛의 방패를 만들어 내며 몸을 가볍게 하는 순간.

꽈아아아아아앙.

그 위를 놈의 대검이 강타하며 콜로세움 전체를 울리는 폭음을 만들어 냈다.

자신의 몸이 속절없이 허공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문 그리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숙적을 바라보며 일순간 등 뒤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분명 화살집 따위는 매지 않았지만, 그의 활대에는 어느새 새하얀 얼음으로 된 화살이 걸려 푸른 오러를 품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샤샤샥.

“칫……!”

콰아아아아앙!

붉은 오러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재차 쇄도하려던 적의 전신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수십 갈래의 얼음 조각이 미약한 오러를 품으며 사방을 뒤덮는 빙폭시(氷暴矢, Frozen Exploding Arrow).

그의 비전 중 하나가 펼쳐지는 순간.

“흥!”

놈이 콧방귀와 함께 대검을 땅에 내리꽂자, 주변을 파고들던 그의 얼음 조각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저건 또 뭐야!?’

쾅.

콜로세움의 벽에 발을 박아 넣어 간신히 몸을 세운 그리드가 그 모습을 보면서 이를 가는데.

- 우와아아아아아아!

-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엄청나게 빨라!

- 역시…….

“검으로 가르침을 준다 하지 않았나? 이게 바로 ‘선배’의 검술인가?”

사방을 울리는 함성 속에서 또렷이 들리는 숙적의 비웃음이 속을 뒤집을 만도 하건만, 그리드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그래, 역시나 검 하나로는 못 이기겠군. 그래야 내 숙적답지.”

사실 평생의 숙적이 자신의 검 하나에 밀려서 패배한다면, 그 또한 실망스러울 터였다.

마음이 설레어 점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그는 오른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손도끼까지 빼 들었다.

“바로 말을 바꾸는 건가? 얼굴 한번 두껍군.”

“그래, 두껍지. 뭐, 나에 대해선 이미 잘 알잖아?”

심장의 두근거림이 얼굴까지 전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온몸 가득한 마나와 육체의 힘을 전부 뽑아내서 놈에게 부딪치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이 전신을 내달렸다.

“……하는 행동은 광전사인데, 말로만 품위를 지껄이면 뭐 하냔 말이다.”

녀석의 말대로다.

자신이 평소에 품위를 강조하는 것은, 스스로의 이런 기질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것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참을 필요가 없었다.

“크하하하! 자, 그럼 2차전을 시작해 보자고!”

쩌저저적.

오른손에 든 장검의 끝에서부터 얼음이 맺히며 검신 전체를 새하얗게 만들고, 손도끼 역시 얼음에 뒤덮이며 뭉툭한 모양이 되었다.

“그럼, 어디 한번……”

양손에 든 무기 위로 이글거리는 푸른 오러를 피워 올린 그리드가 히죽 웃으며 숙적을 향해 돌진했다.

“……죽어 보자! 아하하하하!”

순간 흐릿하게나마 미소를 보이는 숙적의 얼굴도, 지금은 반갑기만 했다.

쾅!

콰아아아앙!

쩌저저저적.

우르르르릉.

붉은 오러와 푸른 오러가 부딪칠 때마다 콜로세움 전체가 흔들렸다.

오직 대검 하나만으로 압도적인 속도와 파괴력을 뽐내며, 콜로세움을 통째로 두 쪽 낼 듯한 붉은 오러를 수시로 뿜어내는 검제.

그에 맞서 다섯 개의 무기를 번갈아 활용하며, 번개처럼 공격을 흘리고 반격하는 웨폰 마스터.

그들이 부딪칠 때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능히 죽일 만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동쪽 실드! 좀 더 마나를 모아!”

“젠장, 힘이……!”

“윽, 이게 사람의 힘이야!?”

“저것이 진짜 초인…….”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는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장을 둘러싼 마법사들의 실드가 금방이라도 깨져 나갈 듯 자꾸 흔들렸다.

처음엔 환호하며 대결을 구경하던 시민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소름이 돋아 오른 팔을 부여잡고 멍한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대결을 관전하고 있는 이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어딘가 다른 감상을 뱉어 냈다.

“……여전하군. 미숙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그렇게 품위 타령을 해 대면서, 정작 눈이 돌아가면 광전사처럼 싸우는 웨폰 마스터.

그 모습에 슬며시 옛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그 감상을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리는 없었다.

“타이니 군, 지금 뭐라고……?”

“아, 아닙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딴생각 말고 집중해서 봐 두세요. 기사에게는 매 순간이 귀중한 영감을 줄 만한 대결입니다!”

제나스의 호통에 타이니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하지만 경도 저 신경 쓰실 시간에 대결에나 집중하시죠? 결빙의 속성을 가진 오러유저는 저 웨폰 마스터뿐입니다.”

충고하듯 응대해 보지만, 타이니의 말은 제나스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그는 이미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채 대결을, 정확히는 웨폰 마스터의 속성 활용법을 눈에 담기 바빴던 것이다.

검과 손도끼, 버클러로 정신없이 몰아치는 접근전에서는 터져 나가는 얼음 조각들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변해 적을 노리고.

그것을 피해 조금이라도 멀어졌다 싶으면, 어느새 손에 들린 활이 적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얼음의 폭풍들을 쏘아 냈다.

그러다 빈틈이 보인다 싶은 순간 공간을 접은 것처럼 갑자기 튀어나오는 커다란 장창까지.

‘저 말도 안 되는 무기 스왑은 이 시점에도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구나.’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 괜히 정겹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압도하는 것은.

콰아아아아아앙!

한 번의 휘두름으로 그 파상 공세를 전부 무효화하는 검제의 저 대검이었다.

“대체 이게 뭐냐고!!”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는 그리드의 마음이 이해가 될 정도로 충격적인 그 기술은 먼 훗날 검제의 상징처럼 알려지는 비기, 위력 봉쇄(Power Lockdown).

아마도 그의 선조가 썼었다는 절대 방어와 맥락이 같은, 그러나 한 단계 하위 버전의 기술 같았지만.

‘무한정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한계도 뚜렷하고…….’

지켜보는 타이니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그리드 역시 감을 잡았는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장검과 도끼를 집어넣고 꺼내 든 기다란 장창 끝에서 타오르는 새하얀 얼음과 푸른 오러.

전신과 다섯 개의 무기에 분산시켰던 오러를 한 곳으로 집중한 모습이었다.

‘정답이다.’

전생의 기억으로 대련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타이니조차 집중하게 되는 순간.

웨폰 마스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꼼수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흐, 누구 마음대로!”

화끈하고 차가운 두 사람의 상반된 성향을 반영하듯 넘실대는 붉고 푸른 오러가, 어지럽게 얽혀 들며 경기장 전체를 상서로운 빛으로 물들인 그 순간.

꽈아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꺄아아악!”

“뭐, 뭐야!”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경기장 전체를 울리는 폭음과 진동이 한 박자 늦게 사위에 퍼지며 세상을 뒤흔들었다.

“……동쪽 실드 완파!”

“서쪽도 완파!”

“북쪽은 반파!”

“피해자는……!?”

자욱하게 솟아오른 흙먼지 사이로 관중석의 실드를 담당하던 마법사들이 어지럽게 뛰어다니는데, 그 난리 통에서 간신히 몸을 건사한 관객들은 그저 가만히 숨을 죽인 채 흙먼지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역시나 충돌의 결과가 궁금했던 마법사들이 경기장에 가득한 먼지를 치워 버리자.

“어……!”

“오……!”

“우와아아아아!”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의 눈에 뚜렷하게 들어온 광경.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은 하늘색 머리 사내와, 그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금발 사내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오러의 막은, 그 붉은빛만 보아도 누구의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발렌티아 공작님이 이겼다!”

“제국이 승리했다!”

“웨폰 마스터가 뭐야!? 우리 제국은 검만으로도 최고다!”

“우와아아아!”

관객 대부분이 황도의 주민으로 이뤄진 만큼,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요란한 소음 속에서, 그리드가 피를 토해 내며 이를 갈았다.

“그, 엿 같은 기, 기술은 뭐, 뭐지? 개, 개 같은 꼼수를…….”

검은 핏물을 왈칵 토해 낸 웨폰 마스터가 황당함과 분노가 어린 얼굴로 숙적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입가에 슬쩍 배어난 핏물을 닦아 낸 검제가 피식 웃었다.

“내 말투 보고 품위 운운하지 않았나?”

“다, 닥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야? 네놈이……! 네놈 같은 고지식한 놈이, 그따위 꼼수를 생각해 냈다고?”

그리드의 얼굴에선 황당함이 가시지 않았다.

일격이 교차하는 순간,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몸이 뒤집히며 공격이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팔다리와 몸통, 그리고 마나까지, 모든 게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랄까.

그 더러운 기분 속에서 죽음을 각오한 순간, 놈의 대검이 멈추었다.

에스가르드의 입가에 흐르는 핏자국은 그 반작용을 감수한 결과였으니, 그것이 그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했다.

한마디로 완패였다.

“마법이라도 쓴 거냐? 아니, 어떻게 오러유저한테…….”

“역장 조작(Control force field). 미래에 내가 사용하던 기술이라고 하더군. 네 말대로 꼼수긴 하지만, 쓸 만하지?”

대뜸 말을 끊고 나온 황당한 대답에, 그리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알고 싶으면 찾아와. 소개해 주고 싶은 녀석이 있으니까.”

주변을 둘러싼 붉은 오러의 막.

그것이 이 대화 내용이 새어 나가는 걸 차단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리드가 모호한 표정을 지을 때, 갑자기 그 막이 사라졌다.

그리고 숙적이 보란 듯이 자신의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는 승자로서 내기의 결과 이행을 요구한다.”

담담한 검제의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콜로세움 전체에 울려 퍼지자, 그리드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놈과의 사적인 관계가 어떻든, 자신은 왕국 연합을 대표하는 초인이다. 이렇게 약점을 잡히면 형님이자 주군이신 그분을 볼 낯이 없어질뿐더러, 동맹국들의 위상에도 폐를 끼치는 것이었다.

다만 몇 년은 앞서 경지에 올랐으니, 절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벌인 일인데…… 결국 패배해 버렸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지.’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이 목숨으로 대신하면 된다.

질끈 깨문 입술에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놈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졌다.

“그리드 반 셀던은, 오늘부터 제국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황도에 머물라! 그것이 승자인 나의 요구다!”

본디 초인급의 무력을 가진 사절은 당국에 위협이 될 수도 있기에 국가 경조사 전에 선물만 주고 떠나는 것이 관례.

애초에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것도 그리드의 고집 때문이었다.

‘아예 머물라고?’

그 엉뚱한 선언에 그리드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숙적을 바라보는 순간.

- 찾아와라, 알겠지?

숙적의 입술 모양이 다시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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