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웨폰 마스터
“네 덕분에 다른 곳은 성물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지.”
공작의 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물의 결계를 능가하는 대(對)마법 결계.
황궁뿐만 아니라 아세리안의 외벽까지 이어진 고대의 대결계는, 실제로 그 안에 더해진 성물의 결계를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마법적 효력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 대마법 결계의 효능은 아세리안 전체를 마법적 위협에서 보호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마기 색출은 당연하고, 황궁과 성벽에는 내구 강화와 구조물 자동 복구 기능이 더해져 있지. 황궁 내부에는 마나 자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고대의 결계도 있다. 그것에 자유로운 것은 결계에 등록된 황족이나 황실 기사단, 황실 마법사단뿐이지.”
거기에 더해, 비상 상황 발생 시 이미 결계에 등록된 이들에게 쏟아지는 온갖 마나의 축복까지.
“황궁의 결계를 완전히 무너트리려면 황실 마탑부터 파괴해야 한다. 외부의 공격만이 아닌, 내부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야.”
“그렇다면…….”
“결계에 간섭할 수 있는 고위 황족, 특히 직계 황족이 그 참람한 음모에 손을 보태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럼 역시 배후는 2황자라는 겁니까?”
타이니가 전생의 소문을 언급하며 공작을 바라보았지만, 그에 공작의 표정은 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그게 또 문제야. 네 녀석 때문에 소문을 믿지 못하고 내가 직접 몇 번 만나 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에게 그런 확신을 주었을까.
타이니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당신은 그 소문에 대해 굳이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추론하자면…… 이미 벌어진 일, 그것도 제국 내부의 일에 대해 굳이 더 떠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내가 내 생각을 추론하는 게 웃기지만 말이야.
뒤이어 혼잣말처럼 나직이 뱉어 낸 말에는 그의 답답한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2황자는 완전한 원칙주의자다. 소문과 다를 게 없었어. 브레들리 전하의 황위 계승에 대해 조금의 이견도 없었다. 욕심 한 톨 보이지 않았지.”
……뭐?
“무엇보다 네 말대로라면, 결과가…….”
“직계 황족 전부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현 황제의 동생인 푸른 피의 마도사까지도요.”
“……그래, 그랬지. 정말 2황자가 꾸민 짓이라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놈들을 이용하고도 뒤통수를 맞았다는 건데.”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그 딴지에 공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낮춰 봐도 2황자가 그렇게까지 멍청하지 않아. 거의 네 수준으로 멍청한 놈이 아니라면 당할 리가 없는 조건이니까.”
“아니, 진짜 사람을 뭘로…….”
“왜, 뭐? 아무리 설명해 줘도 저 꼴리는 대로 움직이는 놈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 씨…….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두 사람은 기 싸움이라도 하듯 서로 눈을 부라렸지만, 먼저 시선을 내리깐 것은 찔리는 것이 있는 타이니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전력을 보존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렇죠.”
“후, 그래. 결과적으로 잘 온 거기는 하니, 이번에는 넘어가마. 아무튼 2황자는 아니다.”
덧붙인 말에 순간 짜증이 나긴 했지만, 사람을 잘못 본 것 아니냐는 반론은 굳이 내밀지 않았다.
공작은 초인이기 이전에 벌써 20년 가까이 공작가를 이끌어 온 정치인이었으니, 그가 몇 번을 만나고도 사람을 완전히 오판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잠깐, 그런데…….
“결과적으로 잘 왔다고요?”
“착각하지 마라, 네가 잘했다는 게 아니니까.”
“네?”
“엘븐하임에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 비슷한 것을 가진 녀석이 있었다. 또 나는 그걸 미처 몰랐고. 그러니 결과적으로 잘 왔다는 말이다.”
“통행증이요?”
“그건 나중에 설명해 주마. 어쨌건 당장은 황실의 재앙을 막아 내는 것이 먼저니까. 아무튼, 고위 황족 중 누가 주도적으로 움직였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면 3황자나 1황녀일 확률이 높다.”
“3황자와 1황녀요?”
“그래. 욕심은 많고 무능력한 황자의 표본인 3황자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1황녀……. 둘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렇다면…….”
“놈들이 그 주변에 사람을 깔아 두었을 거다. 네놈이 지금 도착했으니 제이도 조만간 도착하겠지. 블랙윙의 전력을 전부 집중해 보면 무언가 나올 거다.”
공작의 말은 얼핏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에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왜 전생에는 2황자라고 소문이 난 거지?’
근거는 없지만, 굉장히 신경 쓰이는 그 소문.
아니, 정확히는 그 소문에 관해 이야기할 때 씁쓸해 보이던 공작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뭐라 말을 하려 하는데, 그 생각을 짐작한 듯 공작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2황자의 주변에도 사람을 붙였다. 누구와는 다르게, 나는 내 안목만 믿고 모든 일을 진행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타이니는, 공작이 ‘내 안목’이라 말하면서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 심히 거슬렸다.
이 인간이 지금…….
“아니, 지금 큰일 치르고 회복되자마자 달려온 사람한테……!”
울컥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 잘했다, 정말로.”
“뭐라…… 에?”
갑작스러운 칭찬에 다시금 멍해지는데, 공작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 나라를 구한 것과 별개로, 덕분에 다시금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할 일에 대한 확신이……. 그래서 더 다급하기도 하고.”
“무슨 말……?”
의아한 생각에 반문하려는데, 공작이 바로 말을 돌렸다.
“뭘 처먹었는지 키도 엄청나게 자랐고, 마나량도 확 늘었는데? 곧 블레이더급에 오르겠구나, 그렇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이 역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 바로 관심이 돌아가고 말았다.
“뭐, 그야…… 하던 가락이 있으니까 당연하죠.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제아무리 인류의 전력을 많이 보전한다 해도, 군단장이나 마왕의 골통을 깨 버릴 사람이 없다면 무용이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 될 것이라, 타이니는 감히 장담하고 있었다.
공작 역시 그리 생각한다는 듯,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 시간을 확 단축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절하면 안 됩니까.”
“안 돼.”
그럼 왜 물어본 건데!!?
타이니가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저 얼굴을 묘하게 찡그릴 때.
- 가, 각하! 큰일 났습니다!
방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를 구해 주었다.
* * *
“뭐라고?”
“그리드 반 셀던……. 그, 그 웨폰 마스터께서 각하께 대련을 청했습니다.”
다시 한번 전해진 기사의 말에 공작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하, 때가 어느 땐데! 그 상황 파악 제대로 못 하는 인간이 진짜……. 하, 일단 줘 보거라.”
“예, 각하.”
기사가 건네는 둘둘 말린 전서.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양피지의 겉면에는 검과 도끼가 교차된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현시점 왕국 연합의 유일한 초인.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의 문장이었다.
그것을 읽던 공작의 얼굴이 굳어질 때.
타이니는 오히려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렇지! 그게 이맘때 일어난 거였지?’
아스란 제국의 다음 대 황제가 될 황태자의 결혼 소식은, 이미 반년 전부터 세계 각국에 알려져 있었다.
우호적인 국가나 귀족들에게 축하 사절을 보낼 여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고, 또 그를 통해 제국의 위세를 뽐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발렌티아 공작가가 몇 달이나 빨리 황도에 올라와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의 당사자 가문인 만큼 이미 수많은 축하 사절이 몰려오고 있었고, 그들이 주는 선물들이 황도의 발렌티아 저택 앞에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가르드 공작은 귀족들 대부분을 만나지 않고 칩거를 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초인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은 예전부터 그와 악연으로 얽힌 사이였다.
‘젊었을 때부터 쭉 싸워 왔다고 했던가.’
제국과 왕국 연합의 관계상, 그 사이에 놓인 기사들의 대립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30년 전만 해도 국지전이 한창이었던 제국과 연합의 전장에서 셀 수 없이 부딪쳐 왔다 들었다.
나이는 웨폰 마스터가 다섯 살 정도 많지만, 둘 다 그 당시 최고의 유망주로 불리던 몸.
각자 가문을 승계하기 전에는 휴전 후에도 서로를 찾아다니며 실력을 겨루었다던가.
- 말이 좋아 실력을 겨룬 거지, 둘 중 하나가 조금이라도 더 부족했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 그랬다면 또 제국과 왕국 연합 간 전쟁이 발발했겠지.
후에 둘이 했던 이야기를 타이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대략 3년 전, 승패를 주고받던 두 젊은 기사의 경쟁이 한쪽으로 확연히 기울어 버렸더랬다.
당시에도 ‘무기의 달인(Weapon Master)’이라 불리던 그리드 반 셀던이 먼저 오러유저가 되면서, 라이벌 구도가 깨져 버린 것이다.
물론 그땐 이미 발렌티아 공작과 셀던 왕국의 대공이었던 둘이 싸우지 않은 지 족히 몇 년은 지난 뒤였지만,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리드를 에스가르드의 위로 놓았다.
재작년, 에스가르드가 불과 마흔아홉 살의 나이로 오러유저의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이 양반은 지금 자기 위치도 모르나!? 우리가 지금 무력 겨루자고 대련이나 할 때야!? 대체 이 시국에 왜!!?”
둘 다 지고한 신분으로서 제국의 중대사를 앞두고 있으니, 공작이 격분해 저리 소리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거절하면 패배를 인정한 걸로 알겠다고? 하? 이 미친 인간이 진짜!!”
저렇게 도발적인 문구를 받은 이상, 공작 역시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하, 좋아.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봐야겠군.”
분명히 대련 요청이었는데, 공작의 표정은 거의 생사결을 요청받은 것처럼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연히 소식을 전한 기사, 가렌은 그런 공작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가, 각하. 그래도 지금 시점에 오러유저 간의 대련을 벌이시는 건 부적절할 듯합니다. 폐하께 말씀드려서 미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혹시나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그런다고 물러날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안 좋은 소문만 퍼트리겠지. 맨날 귀족의 품위 운운하는 주제에 속 긁는 것은 양아치 수준이니까…….”
말하는 꼴로 봐서는 지금 당신이 더 양아…… 흠, 흠.
속으로 피식 웃던 타이니는 이내 자신을 쏘아보는 공작의 시선을 느끼며 애꿎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야 뭐야?’
머지않아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에 슬쩍 고개를 내려보니, 어느새 가렌을 내보낸 공작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게 전생에도 있었던 일이더냐?”
“……예.”
“……그나마 다행이군.”
격분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냉정한 표정으로 뱉어 내는 말.
“그럼 이건 놈들의 수작이 아니라는 건데, 셀던에서 시켰을 리도 없고……. 그 철없는 인간이 그냥……! 하…….”
……그 상황에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나.
정말 이중인격이 아닐까 싶어서 눈살을 찌푸린 채 공작을 바라보던 타이니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결과도 알려 드릴까요?”
그에 공작이 처음으로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알려 주지 마라. 비슷하게라도 언급하면 입을 찢어 주마.”
“아, 진짜! 말을 해도 좀…….”
“차라리 잘 됐어. 이참에 그리드 그 양반을 좀 설득해서 여기에 좀 더 머물라고 해야지. 그럼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그거야 그렇겠습니다만, 그게 맘대로 되겠습니까?”
“지금 보았듯이 제멋대로인 양반이다. 꼴리면 누가 말리든 말든 일단 저지르고 보지. 입으로는 품위가 어쩌고를 달고 사는 인간이 하는 짓은…….”
뭐, 그 양반이 그렇기는 하지.
그럼…….
‘……재미있겠네.’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옛 동료들이 아직은 미숙하던 시절에 맞붙는 대련을 볼 걸 생각하니, 자연스레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알고 있다.
남들은 하나도 갖기 힘든 초월무구를 연계로 사용하며 초인 그 이상의 무력을 뿜어내는 웨폰 마스터였지만, 어차피 형식이 대련인 이상 둘 다 초월무구는 쓰지 않는다.
그것은 웨폰 마스터에게 아주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식.
“내가 이겨 놓고 조건을 거는 게 좋겠지?”
“좋을 대로 하시죠? 결과는 묻지 말라던 양반이, 뭘…….”
“크크,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웨폰 마스터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자고.”
공작의 자신감은 결코 과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미래에 쓰던 수법을 들었지. 그간 얼마나 체화했을까?’
만약 그중 한 가지라도 터득했다면, 그 예정된 결과조차 바뀔 것이다.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