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공작
“허? 그 녀석들이 황도로 오고 있다고?”
“예, 블랙윙의 보고로는 타이니 경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합니다만…….”
“……제나스 역시 원했겠지. 말은 안 해도, 내심 서운했을 테니까.”
블루윙의 부단장 중 한 사람, 가렌 클레멘의 말에 에스가르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에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가렌을 보니 재차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까.
“타이니 녀석, 오면 정신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겠어. 중대한 일을 자기 멋대로 바꾸다니.”
지금쯤 황도 아세리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 누군가가 들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말과 함께, 공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단장과 타이니 경을 굳이 엘븐하임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가렌이 딴지를 걸었다.
“음?”
그는 공작이 물끄러미 바라보는데도 고개만 갸웃거리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발렌티아 공작가의 기사들이 그 주군인 공작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유명했지만, 그중에서도 가렌은 정도가 지나친 편이었다.
‘뭐 그래서 부단장으로 임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내막을 밝힐 수 없는 일에 간섭할 때면 좀 귀찮기도 했다.
“……악마추종자들이 성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카룬의 사건으로 밝혀졌으니까.”
“그거야 이미 카룬의 왕이 마탑이나 다른 사대 종족의 중심지에 알리지 않았습니까? 굳이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엘프 같은 벽창호들, 그 폐쇄적인 집단이 우리의 일방적인 권고를 듣겠느냐? 직접 가서 전하고 설득해야 움직이겠지.”
“그게 굳이 단장과 타이니 경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저만 해도 엘븐하임에 친구가 있습니다만?”
“……뭐?”
맹점을 찌르는 반문보다도, 그 뒤에 이어진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엘프 친구?”
“예.”
“……자네에게 엘프 친구가 있었어?”
“작년에 로트만 영지에 몬스터를 처리하러 갔을 때, 엘븐하임으로 돌아가는 수행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었지요.”
인간을 배척하는 엘프와 우연히 친구가 되었다?
‘아무리 수행자가 경험을 중시한다고 해도, 엘프가 친구라고 지칭하는 것은 인간과 조금 다른 개념인데?’
공작이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품 안에서 곱게 묶인 하늘빛 머리카락 뭉치를 꺼내 들었다.
긴 머리의 끝을 잘라 내서 묶어 놓은 듯한 모양. 엘프가 타 종족을 친구로 인정할 때 주는 상징이 분명해 보였다.
가렌이 엉뚱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사기를 칠 놈이 아니라는 건 공작도 알고 있었으니,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라고?”
“예.”
“……어떻게?”
“그냥, 잘……요?”
황당해서 물어보는 질문에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가렌은 정말 묘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서, 대륙 사방팔방에 친구가 많긴 했다. 이번에 드렉슬러 대신 이 녀석을 데려온 것도, 황도에 있는 녀석의 인맥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무용지물이 되긴 했지만, 일전에 타이니를 위해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에게 추천장을 써 준 것도 바로 이 녀석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카룬에 간 것도 한 번뿐이지 않았나?’
추천장을 얘기할 때는 그냥 가문 간의 연이라도 있나 보다 하고 말았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그냥 잘이라니?”
“마음을 터놓고 진실되게 대하면, 대다수의 좋은 사람들은 금세 친구가 되는 법이니까요.”
이런 공감하기 힘든 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이니, 거의 이십 년을 봐 온 부하인데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놈, 진짜 뭔 특수한 능력이라도 있나?
“……왜 그렇게 보십니까?”
“신기…… 아니, 아니다. 그러면 차라리 잘됐구나. 녀석들이 오면 너와 함께 보내면 되겠어. 미리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전 단장님이 사라진 것도 몰랐으니까요. 이제 알게 되었으니 말씀드린 겁니다.”
그 말에는 부단장인 자신을 빼놓고 일을 진행한 것에 대한 섭섭함이 어려 있었다.
“그래,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오랜 부하의 엉뚱하게 유능한 점을 새삼 실감하게 되니 또 헛웃음이 나왔지만, 어쨌건 긍정적인 일이었다.
“제나스는 그렇다 치고, 타이니 녀석은 황도에 들어오기 전에 변장을 하라고 해. 아,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적 변신 말고 그냥 변장. 그 녀석도 제나스처럼 머리 염색만 해도 확 달라 보일 테니까.”
괜히 적들의 이목을 끌 만한 일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최대한 신경을 써야지.’
……라는 생각이었는데, 가렌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당장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뭐?”
“너무 빠르게 이동 중인 데다가, 중간중간 도시에 들르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메시지를 전할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곤란한데.”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광휘의 기사는 지금 아세리안에서도 그야말로 뜨거운 화제였다.
전설의 마수 크라켄의 등장이 세상에 선사한 충격이 그만큼 컸던 탓이었다. 콧대 높은 제국에서조차 변방의 뜬소문이라고 일축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황도에 등장한다면 시선이란 시선은 다 몰고 다닐 게 뻔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타이니 경도 생각이 있으면 변장 정도는 당연히 하겠지요.”
가렌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공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멍청한 놈한테 그런 걸 기대하지 마라.”
쿨럭.
“……예?”
무언가 말을 이으려던 가렌이 순간 사레가 들릴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
그 어린 천재를 가르치며 주군이 학을 뗐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너무하다 싶은 표현이었다.
“……그래도 단장님이 곁에 있지 않습니까?”
“그놈은 애초에 남의 말을 들어 처먹을 놈이 아니다. 무식한 놈이 신념까지 있거든. 그러니까 내 말도 무시하고 이리로 오고 있지.”
까드득.
이를 가는 공작을 보며 가렌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완전히 바보 취급이 아닌가.
무술과 마나에 대한 재능으로는 모두가 공인한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
하지만 머리는 나쁘다?
‘이런 걸 보고 신은 공평하다고 하는 건가?’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대책은 있었다.
“……잘하면 황도에 들어서기 전에 손을 쓸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어떻게?”
“단장님과 타이니 경은 거의 일직선으로 황도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마중할 사람을 그 경로로 보내서 알리면 됩니다.”
“지금 우리 가문을 주시하는 눈이 많다는 건 알고 있겠지? 블랙윙의 전력도 일전의 사건 때문에 동부에 몰려 있다는 것도.”
“물론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문의 사람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다행히 황도의 외성 순찰대 기사 중에 아는 친구가 있습니다.”
“오? 그래?”
공작의 감탄한 표정을 보며 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친구에게 부탁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가렌은 그 기사, 그레임 폰 리버티 남작이 고작 삼 일 전에 사귄 친구라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레임을 믿지만, 보통 사람들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믿기 어려워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훌륭한 주군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아닌가? 타이니 경의 경우를 보면…….’
그 말도 안 되는 천재 꼬마가 공작가에 머문 기간은 고작해야 두 달. 심지어 거의 오자마자 주군의 신뢰를 받고 가르침까지 받지 않았나.
‘……말은 저렇게 하셔도, 실제로는 깊이 신뢰하고 계신 거 같은데?’
가렌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달라진 줄도 모르고, 공작은 이를 뿌드득 갈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게 처리하고, 녀석들에게 황성에 도착하는 즉시 나에게 오라고 전해. 타이니 녀석은 제나스의 시종 역할 정도면 되겠지? 암, 그놈한테는 시종도 과분하지.”
* * *
“푸엣취!”
거창한 재채기에, 막 불씨를 피워 내던 모닥불이 그대로 꺼질 뻔하다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다.
“아씨, 누가 내 욕을 하나.”
머쓱해서 쓱 하니 코를 닦고 딴청을 부리는데, 옆에서 같이 불을 지피던 제나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제 이틀만 가면 됩니다, 타이니 군. 정말 노숙도 잘하는군요. 도시에는 들를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는 정말 감탄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길바닥에서 거적때기를 덮고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잠드는 게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 그때에 비하면, 몸을 녹일 모닥불과 배를 채울 음식이 있는 지금은 호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과거를 생각하다 보니, 불쾌했던 기억 하나가 떠오르고 말았다.
‘언제였더라…….’
20년 뒤, 말세가 도래하기 직전.
공작과 클로이가 혼란스러운 제국을 간신히 수습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당시 공작과 클로이는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내실을 다지기 위해, 백성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을 금지했다.
심지어 귀족의 전통 놀이인 사냥을 금지시키기까지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 나간 짓을 벌이는 귀족들이 생겨났다.
야영만 한다는 명목으로 사냥터에 온갖 사치품을 가져다가, 일회용으로 써먹고 버리는 황당한 낭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편을 즐긴다고 했던가?’
귀족들이 그 이상한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서민 체험을 해 본다며 말 같지도 않은 야영…… 아니, 유행성 정신병을 만들어 냈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더랬다.
상황이 그러하니 귀족의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명목의 의뢰도 받은 참이었는데, 마침 자신에게 그걸로 시비를 거는 놈이 있었다.
- 경도 한번 즐겨 보시오. 귀족이라면 한 번쯤은 서민 체험을 해 보는 것도……. 아, 경 출신이……? 죄, 죄송합니다! 저, 정말로 진심이 아니…… 끄아악!
친절하게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켜 준 놈을 위해, 길바닥에서 일주일 정도 숙식을 해결하는 체험을 시켜 주었더랬다.
물론 식사는 잘 챙겨 주었다. 하루에 육포 하나씩.
어찌나 육포를 좋아하던지, 이름 대신 육포라고 불렀던 기억도 난다.
그 후에 놈은 자신과 눈만 마주쳐도 얼어붙기는 했지만, 불편을 즐긴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두 번 다시 안 했던 것을 보면 정신병은 깨끗이 치료된 듯했다.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그…… 그, 뭐였는데?’
막상 황도를 앞에 두니 별 쓸데없는 기억이 떠오르나 싶어 새삼 실소가 나오는데.
“아! 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저는 몰라도 타이니 군은 변장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 내가 쓰던 염색약이 있는데……. 흠, 이걸로 되려나?”
제나스가 품속에서 이상한 통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보였다.
“……변장을 굳이 왜 합니까?”
지금 황도에 있는 모 귀족이 들었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반문을 태연히 꺼내는 타이니였다.
“음? 지금 타이니 군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파다하게 퍼졌을지 짐작이 되지 않나요? 지금 그 상태로 황도에 들어서면 운신도 힘들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타이니도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어차피 변장한다 해도 알 사람은 다 알 겁니다. 여태 행적을 숨기지 않고 달려왔잖습니까.”
알 사람은 안다.
여기서 ‘알 사람’이란 그들의 행적을 주시하고 있을 악마추종자들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그러나 제나스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알 만한 사람이 아는 것과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은 차이가 크지요. 그리고 황도 아세리안에는, 아마 타이니 군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이 훨씬 많을 겁니다.”
물론 타이니는 아세리안에 사람이 많다 못해 넘쳐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게 더 마음에 걸렸다.
“변장했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게 더 수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다른 가능성을 더 크게 생각하고 있었다.
크라켄의 출현이 세상에 준 충격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희대의 사건에 뒤따른 파장을 더 염려했기에 나온 말인 것이다.
‘악마추종자는 둘째 치고, 혹시라도 황실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면…….’
괜한 변장을 하고 아세리안에 숨어들었다간 될 일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다.
타이니가 그에 대한 우려를 차분하게 설명하자, 제나스 역시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그 말도 그럴듯하긴 하군요…….”
제나스는 잠시간 고민한 끝에, 결국 타이니의 변장을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하지만 불과 하루 뒤.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 공작님의 전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황실 경비대 소속 기사가 등장하여 타이니의 의견을 단숨에 뒤집어엎었다.
“변장 필수. 광휘의 기사님이 거절할 시…… 주리를 틀어 버리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하, 공작님도 유머 감각이 뛰어나시군요.”
기사의 말에 제나스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떠오르고, 타이니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씨…….”
유머일 리가 있겠냐.
‘백 퍼센트 진심이겠지! X발.’
짜증이 물씬 묻어나는 그 명령에 인상을 구기던 타이니는, 이내 그 말을 전한 기사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쾌한 전언을 가져다준 그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 어? 그, 그…… 누구였더라?”
“예? 아, 저는 외성 순찰대 소속 기사, 그레임 폰 리버티입니다. 부족하지만 명목상 남작이라는 작위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광휘의 기사님이나 북풍의 기사님의 위명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갑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묻자 기사, 그레임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충실히 대답했다.
“아, 이야기가 새어 나갈 걱정은 절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루 휴가를 내고 이곳에 온 사실 역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와 제 친우, 가렌 경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함구하겠습니다!”
그레임이 결연한 표정으로 그리 외치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어째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 육포!?”
“……네?”
황도 아세리안을 하루 거리 앞둔 들판.
잠깐의 소란 끝에 타이니의 머리 염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