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80화 (80/500)

80화. 황도로 가는 길

“역시 자유 도시라 그런지, 쓰레기들이 꼬불쳐 둔 게 제법 많네요.”

찰랑. 탁.

타이니는 금화만 꾹꾹 눌러 담아 어린애 머리통만 해진 주머니를 던졌다 받으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고, 그것을 지켜보던 제나스는 두통이 오는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

“광휘의 기사라는 이명에 똥물, 아니 핏물을 묻힐 작정입니까? 대체 이게 뭐 하는 짓…….”

“좋은 짓이죠! 쓰레기 청소도 하고 돈도 벌고.”

“허…….”

그 말에 제나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낙센의 뒷골목을 장악하고 있던 범죄 조직…… 벌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잡것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에 순식간에 피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자연히 그들의 뒤를 봐주던 에낙센의 기사 몇이 타이니에게 칼을 들이밀었지만, 놈들 역시 타이니의 손에 발목을 잡힌 망치, 혹은 그 망치가 찍어 버릴 못이 되어 으스러졌다.

‘그 기겁할 정도로 잔인한 수법을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는 둘째 치고.’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참극은 일순간에 자유 도시 에낙센을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니, 도시 지휘부가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감사 인사를 받았다.

“허허, 아까 시장의 어이없는 표정 봤죠? 왜 그런 거 같습니까?”

카룬의 재앙을 물리친 영웅, 광휘의 기사.

그 유명인사가 뒷골목 양아치들의 피로 칠갑을 한 채 나타났으니, 에낙센의 시장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타이니에게 고개를 숙였더랬다.

“쓰레기를 처리해 줬으니 고마워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제나스가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에요?”

물론 타이니 역시 바보가 아닌 바에야 그 의미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카룬과의 교역이 세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도시니만큼, 감히 광휘의 기사에게 대항할 생각도 못 했다는 것을.

하지만 타이니는 오히려 그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만약 시장도 얽혀 있다는 게 밝혀졌다면, 그자도 처리했을 겁니다. 일단 증거를 못 잡았으니 놔뒀지만…….”

카룬의 영향력이 이리 강한 도시라면 상층부까지 깨끗하게 청소하는 게 가능할 텐데.

“……시간이 없어서 아쉽네요.”

범죄 조직을 처리해 줬는데 결코 기뻐 보이지 않던 시장의 얼굴을 떠올린 타이니가 인상을 찌푸리자, 제나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다인가요?”

“예?”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의 인성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 제나스로선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다 한마디를 보탰다.

“타이니 군. 제대로 된 전후 조사조차 없이, 그것도 죄의 경중도 따지지 않고 극형에 처하는 것은 폭군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런 극단적인 조치는 사회를 오히려 혼란에 빠트릴 겁니다.”

나름의 진심을 담아 충고해 봤지만, 타이니는 쓴웃음으로 답했다.

“……그렇게까지 멀리 보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냥 눈앞에 쓰레기가 있으면 치우는 것뿐이죠.”

그 덤덤한 대답이 제나스는 더 우려되었다.

‘차라리 발끈했으면 생각을 바꿀 여지라도 있는 것일 텐데…….’

저런 반응이라면, 자신의 행위가 정말 당연한 일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힌 상태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폭군이니 뭐니 하며 나쁜 일처럼 비유하긴 했지만, 애초에 선한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곁에서 지켜보며 너무 극단적인 행동만 하지 않도록 조금씩 조율해 주면 될 듯했다.

그렇게 다짐하는데.

“……더구나 이번에는 자금도 필요했으니까요.”

타이니가 덧붙인 말에는 제나스의 표정이 다시금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돈주머니가 없어진 걸 안 다음에 벌인 일이었지.

허…….

“돈 때문이었다면, 그냥 시장에게 말을 살 비용을 받아서 출발하기만 했어도 지금쯤 다음 영지에 도착했을 거 같은데요.”

제나스가 입꼬리에 경련을 일으키며 이미 어둑해진 밤하늘을 가리키자, 타이니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렇겠네요?”

……그 생각을 못 한 거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잘못이 큰 터라, 제나스는 그저 연거푸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모르스의 종자가 카룬을 떠났다.”

암실의 탁자. 상석에 앉은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자 탁자 여기저기서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낙센!?”

“어디로 가려는 거지?”

“설마 황도는 아니겠지?”

“……놈이 아세리안으로 향한다면, 정말 우리 중에 첩자가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마지막에 나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암실이 일순간 침묵에 잠겼다.

오르투스의 일은, 그들로서는 정말이지 변수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결국 모든 일을 망쳐 버리고 말았으니, 그 계획을 세상을 향한 그들만의 출사표쯤으로 생각했던 모든 조직원들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 모르스 가문의 꼬마 놈…….”

“우리 중에 첩자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위대하신 분의 힘을 심장에 두른 우리 중에, 신세계를 바라지 않는 이가 있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되지 않나.”

“그래도 결코 속단해서는 안 돼.”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였는데 속단하지 말라니, 설마 자네……?”

“무슨……!?”

탁자에 소란이 일자, 상석에 있던 그림자가 거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조용! 그분께서 지금 생사를 오가고 계신다. 최악의 경우엔 그 분께 ‘그 시술’을 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정도로.”

“그럴 수가…….”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란 말이다. 알아듣겠나?”

그 말에 목소리를 높였던 그림자들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우리 중에 정말 첩자가 있다면…….”

“아직,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놈이 또 황도로 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그때는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겠지. 우리의 계획도, 서로에 대한 감시도……. 철저하게 다시.”

“그래야겠지.”

“모르스의 후예를 당장 정리하는 것보다, 놈의 행동을 지켜보며 내부의 썩은 곳을 도려내는 것이 먼저다. 반대하는 이가 있나?”

“동의한다.”

“물론 동의하지.”

“……동의.”

“나 역시 동의한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암실은 다시 침묵에 잠겨 들었다.

* * *

“여전히 날씨가 좋지 않군요.”

“크라켄이 나타났을 때와 돌아갔을 때, 그 전후의 며칠은 이것보다 훨씬 안 좋았답니다.”

제나스가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타이니가 슬며시 말을 보탰다.

에낙센의 최고급 여관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예상치 못한 숙박에 하룻밤을 써 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두 사람은 고작 날씨 때문에 일정을 미룰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황도로 가겠습니다. 도시나 마을에 들리는 것도 최소로 하고요. 각오 됐습니까?”

“물론이죠.”

황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가서 만사에 대비하자.

아무 계획이 없으면서도…… 아니, 아무런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더욱 서두르는 일행이었다.

그들의 결심은 이내 비바람을 뚫고 한나절이 넘도록 달리는 질주로 이어졌다.

파바바바박.

두두두두두.

바람처럼 질주하는 늑대와 기수. 그리고 그 앞에서 은빛 바람을 휘감은 채 더욱 빠르게 질주하는 기마.

제나스의 뒷모습을 보는 타이니의 눈빛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마력질주를 저 정도 수준까지……. 역시 대단해.’

마력질주.

기마에 마나를 불어넣어 말의 본래 능력치를 훨씬 넘어서는 기동력과 지구력을 부여하는 재주로서, 익스퍼트급 이상의 기사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마나스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신수나 영물처럼 특별한 혈통을 이은 말이 아니라면, 마나로 간접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수준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에낙센의 시장이 구해다 준 말은 그런 전설의 혈통 따위는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일반적인 기마의 전력 질주보다 3배는 빨라. 그것도 한나절 내내 달리고 있는데 말이야.’

평범한 말이라면 이미 피를 토하고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엄청난 질주.

제나스의 속성 중 하나가 바람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재주였다. 말의 몸 상태를 속속들이 파악하면서 섬세하게 마나를 조율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일 테니까.

게다가 마나를 저 정도 수준으로 섬세하게 다루는 기사는 대륙 10대 기사 중에서도 몇 없었다.

‘역시 재능이 넘쳐. 검제가 위험에서 빼돌리려고 할 만해.’

그리고 타이니는 그런 그를 데리고 오히려 위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려 하는 중이고 말이다.

‘부디 이것이 조금이라도 나은 선택이기를.’

제나스의 가능성을 확인할수록 그의 마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히이이이이잉!

좀처럼 그치지 않는 비바람을 뚫고 한나절의 질주를 끝낸 뒤.

그들은 저물어 오는 해를 배경으로, 비가 그친 관도의 옆 숲속 공터에서 노숙을 준비했다.

신분답지 않게 익숙하게 움직이는 제나스와 전생에 집보다 길에서 잔 적이 더 많았던 타이니는 금세 준비를 끝냈다.

타닥타닥.

애써 모아 놓은 마른 낙엽 침대에 모닥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제나스는 앞으로 예상되는 일정에 대해 말했다.

“이런 속도로 움직인다면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게 가능할지 몰랐는데, 역시 정령은 대단하군요.”

“……그러는 경의 기마술이야말로 놀랍습니다. 실제로 저보다 앞서 나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 가며 웃고 떠들길 잠시, 제나스가 타이니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악마추종자들의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까?”

“예?”

3개월 동안 곁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갑작스러운 말에 타이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니 군이 각하께 악마추종자들의 계획을 말씀드렸다고 들었는데요?”

하지만 다행히 생각의 정리는 빨랐다.

그는 제나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애송이는 아니었으니까.

“아, 필레스 영지의 영주를 죽이면서 놈들의 계획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 피라미가 크라켄을 동원한 국가 전복 계획까지 알고 있었다고요? 그리고 그런 위험한 계획을, 암호도 아니고 공용어로 적어 놓기라도 했나요?”

“……제가 그 영주에게 꽤 잘 보였거든요.”

“네??”

황급히 변명하면서도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헛소리였으니까.

‘그냥 말해 버릴까?’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얄밉게 이죽거리는 검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 신전에 새어 나가면 너 화형, 크크.

상상일 뿐이었지만, 왠지 열이 받았다.

‘……관두자, 아직은.’

함께 사선을 넘으며 쌓아 온 유대감과 신뢰가 있었지만, 만약 비밀을 공유해도 될 만한 사람이었다면 검제가 먼저 말했을 터였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타이니는 그의 능력과 판단력만큼은 신뢰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제나스 경. 혹시 2황자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 일단은 억지로 말을 돌렸다.

“갑자기? 흠…….”

제나스는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순순히 질문에 응해 주었다.

“뭐, 2황자님도 평판은 참 좋으시죠. 황태자님과도 사이가 좋다고 소문이 나 있고.”

그러나 그 대답이 예상외였다.

“예?”

전생의 소문으로는 2황자가 황실의 비극을 일으켰고, 그 자리에서 같이 죽었다고 들었다.

물론 소문일 뿐이었지만.

그 얼간이 때문에 아스란 제국이 개판이 됐다.

그러지 않았다면 인류 연합군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다른 동료들, 특히 그 상황을 직접 겪었을 검제가 딱히 부인하지 않았기에 사실에 가까운 얘기라 생각했는데…….

“사이가 좋……아요?”

생각해 보면, 현생의 검제도 그 말에 의아해하긴 했었다.

“예, 아스란 황실에서 보기 드물게 사이좋은 형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뭐지?

‘헛소문이었나?’

생각과 많이 다른 이야기에 타이니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