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결심
그렇게 타이니의 눈앞으로 다가온 비단보.
그 위에는 투명한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투명한 유리구슬을 엮은 모양새로, 얼핏 볼품없어 보이기도 하는 목걸이.
하지만 타이니는 그 안에 담긴 대량의 마나를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적어도 6서클 이상의 순수한 마나가 담겨 있어! 허…….’
담긴 마나만으로도 극상급의 아티팩트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티팩트라 하면, 실력 있는 마법사나 장인이 마나 친화력 높고 귀한 재료로 몇 년에 한 개도 만들까 말까 한 대단한 물건이다.
하물며 이 정도로 엄청난 마나를 품고 있다면, 만든 사람은 세계 최고급 장인이나 마법사일 것이요, 투입된 재료도 인세에 보기 드문 보물일 것이었다.
“모험왕께서 쓰시던 아티팩트 중 하나, ‘마나의 목걸이’일세. 마음 같아서는 그분의 ‘초월무구’ 중 하나를 주고 싶지만, 그것들은 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서…….”
왕은 미안한 듯이 말끝을 흐렸지만, 당연한 이야기였다.
초월무구. 7서클, 초인급의 힘이 담긴 아티팩트를 언급하는 왕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타이니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배포가 크다는 것은 알았지만…….’
당연히 안 될 일이었다.
대륙 10대 기사로 이름을 떨쳤던 전생에도, 그가 가져 본 초월무구는 대미궁에서 얻었던 ‘녹턴’ 뿐이었다.
웨폰 마스터를 제외한 다른 10대 기사들도 고작 한두 개씩밖에 갖지 못했던 보물들.
오러유저와 챌린저 사이의 격차가 크듯이, 초월무구 역시 그 아래 등급의 아티팩트와 차원이 다른 효능을 보인다.
사용하려면 특별한 조건까지 필요로 하는, 일종의 영물화된 무구.
물론 녹턴만큼 특별한 조건을 요구하는 초월무구는 드물겠지만, 어쨌든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거기다 지금의 카룬을 세운 모험왕의 초월무구라니, 그 성능을 떠나 상징성만으로도 가치를 짐작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정말 준다 한들, 그런 것을 냉큼 받았다가는 카룬의 은인이 아니라 적이 될 판이다.
‘그러니 이것도 과해.’
실제로 이 목걸이만 봐도, 호위해 온 다른 기사들이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카룬에 공헌한 것을 잘 아는 기사들의 표정이 저럴 정도니, 이 아티팩트의 효용을 떠나 모험왕이 카룬의 기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도 너무 과분합니다.”
“……그러한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일세. 자네와 자네 동료의 부상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네.”
“아…….”
……이런.
과한 보상을 거절하려 한 말이었는데 왕이 확정해 버렸다.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싱긋 웃은 왕이 말을 이었다.
“마나의 목걸이에는 사용자가 뽑아내서 쓸 수 있는 마나가 내장되어 있다네. 설령 모두 소비하더라도 하루 정도면 다시 회복되는 물건이니, 자네가 가야 할 길에 큰 도움이 될 걸세.”
자신의 부상을 자세히 설명하기가 어려워 오버리바운드라고만 둘러댔었는데, 국왕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6서클급 마나를 하루 단위로 충전하는 아티팩트라면 당장 타이니에게는 과분한 물건.
하지만 보물은 보물이니. 직접 쓸 일이 없다면 동료에게 주면 될 것이다. 헨리 3세의 이 넘치는 호의를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타이니는 목걸이를 보며 자연스레 제나스를 떠올렸다.
‘제나스 경에게 줘야겠군.’
그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당장 내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나 돈은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넘긴다.
괴력의 기사 특유의 물욕 없는 행태는 전생에도 늘 주변 사람들에게 뜻밖의 횡재를 선물하곤 했다.
그리고 그게 그가 벌이는 과격한 행보에 대한 거부감을 다소 줄여 주었다는 걸, 타이니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것을 보며 기억해 주게. 우리 카룬은 언제까지나 그대를 기억하고 응원하고 있을 것임을. 먼 훗날 혹시라도 쉴 곳이 생각나지 않거든, 오르투스로 다시 돌아와도 좋네. 짐은 언제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 말에 담긴 호의만큼은 타이니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다만…….
“그래, 언제 떠날 텐가? 내 거하게 환송식을 해 주고 싶네만…….”
호의가 너무 과해서 말리기가 힘들었지만 말이다.
* * *
“이걸 저에게요? 허어! 너무 과합니다, 타이니 군.”
처음에는 그렇게 거절하던 제나스도, 거듭된 설득에 결국에는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타이니 군이 이걸 쓸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돌려주겠습니다. 재능을 보아하니,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니까요.”
‘……설득 한번 힘드네.’
제나스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원래 받는 사람이 싫다고 하면 더 이상 강권하지 않는 것이 타이니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어쩌면, 저것 하나만으로도 제나스 경이 죽을 일이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문득 현생에서 경험한 것과는 사뭇 달랐던 검제의 성정과 그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젊은 천재의 죽음이 그런 검제를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재수가 없긴 하지만.’
벌게진 눈으로 첨탑 위에서 자신을 제압해 허공으로 내던지던 사이코를 떠올리니, 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반면 말과 행동에 과함이 없고 차분하기만 하던 전생의 검제는 정말 대하기 어려운 고결한 귀족 그 자체였다. 뒷골목 출신인 자신이 본능적으로 거리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서로 목숨을 구해 준 적은 있어도, 사이좋게 대화를 나눠 본 것은 죽기 직전의 순간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검제를 떠올린 타이니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차라리 지금의 검제가 낫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타이니의 마음속에는.
“아니면, 내가 오러유저가 되는 날 바로 돌려드리지요. 어느 쪽이 더 빠를지 내기할까요, 타이니 군?”
이 자신만만한 천재가 정말로 마왕군을 상대할 수 있는 든든한 전력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도 듬뿍 담겨 있었다.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서라도 바로 출발하시죠.”
“……지금이요?”
타이니의 말에 제나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둑한 하늘에 떠오른 그믐달은 희미하기만 했고 별빛조차 흐릿했다. 내일 날씨가 썩 좋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타이니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이요.”
“……왜죠?”
“도망치기 딱 좋은 날씨니까요.”
이어진 말은 제나스를 더 어이없게 만들 뿐이었다.
“도망……이요? 왜?”
“음, 안 가셔도 괜찮습니다. 내일 있을 거창한 환송식에서 다시 머리를 붉게 물들이고 제 시종으로 변장한 채로 8시간을 버티고 싶으시다면 말이죠.”
끝내 왕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한 타이니의 패배 선언.
그 뜻을 단번에 납득한 제나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렸다.
“당장 출발하죠.”
“예.”
카룬의 왕실을 구한 최대 공신 둘은 그날 카룬 왕성의 성벽을 타 넘었다.
그리고 제나스는, 도망친 지 정확히 30분 후부터 그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우, 우욱.”
수면 위를 바람처럼 달리는 거대한 늑대.
그 위에 타이니와 함께 올라탄 제나스는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맹수의 등허리에서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왜 인간이 오크와 달리 거대 늑대 같은 맹수를 길들여 타지 않는지, 그는 이번 체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끄으으.”
“참으세요! 참으라고요!”
“처, 천천히…….”
등 뒤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에 타이니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것도 마나가 소모된단 말이에요! 바다를 헤엄쳐서 건널 생각이에요!?”
배로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를 월랑의 공간 밟기로 질주하는 것은 타이니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공 밟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물결 밟기도 꾸준히 마나를 소모했으니까.
하지만 기사(騎士), 즉 말을 탄 무사들의 수장인 제나스는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차, 차라리 그게, 나을…….”
속도가 빠른 만큼 거의 0.1초 단위로 위아래 50cm를 왕복하는 경이적인 상하 운동은, 챌린저급의 기사에게도 견디기 힘든 멀미를 선사한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좀만 참아요!”
“우, 우웁.”
“어, 어어!? 차, 참아! 참으라고!”
“끄으으으읍.”
“서, 설마!?”
“우웨에에에엑!”
“고개 돌려어어어어!”
젠자아아아아아앙!
밤바다 위로 한 청년의 절규가 울려 퍼진 다음 날.
카룬 왕성은 갑자기 사라진 귀빈의 소식으로 난리가 났다.
과분한 환대에 잘 지내다 갑니다. 훗날 다시 좋은 인연으로 찾아뵙기를 바라겠습니다. 타이니 올림.
“하하, 참으로 소탈한 젊은이란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리암 경?”
방 안에 남겨진 쪽지를 보며 헨리 3세가 웃음 지을 때.
리암 역시 그 곁에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참 대단한 젊은이지요.”
느닷없는 환송식 탓에 기사들에게 밤새도록 군례를 준비시킨 그의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으니, 그의 미소에는 진심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맙네, 타이니 경.’
한편 카룬의 왕과 왕실 기사단장이 그토록 감탄하던 젊은 기사와 그 동료는, 항구 도시 에낙센의 부두에서 바닷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 쏟아지는 비까지 맞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뭐야 저 거지새끼들은? 죽으려고 환장했나, 이 날씨에…….”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대나무 우산을 치켜든 항만의 사내가 해변에 널브러진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가 황급히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쉿, 갑옷 안 보여? 가죽 갑옷! 옆에 무기도 있잖아, 인마. 눈이 나쁘면 입이라도 좀 조심해.”
“……소탈하신 용병님이셨군.”
빗줄기 속에서 부두의 사내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타이니는 늘어져 있던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이 정도 빗물이야 평소의 그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지만, 지금은 몸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후욱, 후욱.
“쿨럭.”
기침을 하니 목구멍 안쪽에서 짠물이 튀어나왔다.
새삼 뻗쳐 오는 울화에, 옆에 널브러진 동료를 노려보는 타이니의 시선이 한층 살벌해졌다.
“이, 이게 무슨 개고생…….”
처음에는 등에 묻은 토사물을 씻어 내고자 일부러 잠수했었고, 나중에는 죽어도 월랑을 타지 않겠다는 제나스가 기어이 헤엄을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해 주었다.
마지막에 제나스가 기절했을 때 월랑을 소환해서 달리지 않았으면, 지금쯤 부둣가에 시체로 떠올랐을 수도 있었다.
자연히 타이니의 눈초리는 살벌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깨어난 제나스도 자신의 잘못을 아는 듯 슬쩍 붉어진 얼굴을 차마 들지 못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멀미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상황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어허험, 험. 이제는 황도로 가서 어찌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타이니 군.”
“말을 돌리…….”
“이 정도 속도라면, 황도 아세리안에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공녀의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그렇겠지요.”
말을 돌린다고 치부하고 흘려듣기에는 너무 중요한 이야기에, 타이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저를 비롯한 블루윙의 극소수 정예, 그리고 황실 기사단의 정예만이 결혼식의 호위를 담당하겠죠. 타이니 군이 간다 해도, 다른 귀족이나 시민들처럼 제한된 마법 영상으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광휘의 기사라는 영명도 제국에선 먹히지 않을 것이다. 제나스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공작 각하께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애초에 황도로 오지 말고 엘븐하임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분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타이니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 봤으니까.
“설마, 그것도 생각 안 해 보고 황도에 가자고 한 겁니까?”
“……가면서 생각해 보자고요, 일단.”
“허?”
“일단 늦지 않게 도착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라, 제나스는 황당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라면.
“……어? 어어?”
갑자기 품속을 뒤지던 타이니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
“설마……?”
순간 무슨 문제인지 짐작한 제나스 역시 황급히 자신의 품속을 뒤졌지만…….
없었다.
“허…… 돈주머니!”
“경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끈으로 묶어 두기만 한 가죽 주머니가, 일반인 기준으로는 초인이나 다를 바 없는 기사들이 파도 속을 미친 듯이 헤엄치는 와중에 멀쩡히 달려 있는 게 더 이상할 테니까.
“……이런.”
제나스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말은 꼭 구해야 했다.
자신은 다시 그 정령의 등 뒤에 탈 자신이 없었으니, 시간에 맞춰 황도에 가려면 말을 타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 나 때문이군요……. 하, 이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허…….”
살면서 연달아 이런 추태를 보인 적이 있었던가.
치솟는 자괴감에 제나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타이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돈이야 구하면 되죠.”
“예?”
“아, 모르시나? 도시에는 보통 이런 때를 위한 돈주머니들이 준비돼 있거든요.”
“무슨……??”
이게 무슨 개소리지?
제나스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지만, 타이니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시죠. 근데,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죠.”
제나스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날, 비 오는 에낙센의 뒷골목에는 낮부터 피바람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