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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78화 (78/500)

78화. 또 3개월 뒤

후으읍.

심호흡 소리와 함께, 커다란 워해머가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푸른 마나를 머금은 채로 허공을 강타했다.

파아아아앙!

가상의 상대의 머리 부분을 강타한 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멈춰 선 망치.

그 끝을 바라보는 ‘청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좋아, 회복했다!’

성물 후마니타스의 압축 결계를 사용한 후유증에서 비로소 벗어났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무려 3개월이라는 시간.

마음은 급한데,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초조해하던 나날들.

영혼과 육체의 괴리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소소한 성과라도 얻지 못했으면, 정말로 괴로운 시간이 될 뻔했다.

“으…… 진짜 길었다.”

타이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손을 들어 눈높이와 연무장의 무기대를 비교해 보았다.

3개월 동안 거의 두 뼘 가까이 쑥쑥 자라, 이제는 170cm 가까이 된 키.

이제 열네 살이 된 현생의 나이에 비하면 제법 큰 키였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보통 기사는커녕 일반 성인 남자들보다도 작았으니까.

물론 아직 다 자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젠 클로이랑 비슷하려나?’

키에 비례해 늘어난 체중과 근육, 그리고 마나는 3개월 전에 비해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거야 어느 곳에 머문다 한들 많이 먹고 훈련만 잘했으면 이루었을 변화다. 폭식과 성장의 비전(?)은 이미 몇 번이고 비슷한 성과를 보였으니까.

‘진짜 성과는…… 이거지!’

틱.

가볍게 손을 튕기자, 연무장에 널려 있던 작은 돌 조각 중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나를 다루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기사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잔재주.

하지만 지금 떠오른 돌멩이에는 눈곱만큼의 마나도 작용하지 않고 있었다.

마나와 호응하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른 힘.

그것을 보는 타이니의 표정이 묘해졌다.

‘영혼의 힘이라……. 이런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영혼과 육체의 괴리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느끼게 된 기묘한 힘.

힌트는 3개월 전, 크라켄 사건 때 우연히 얻게 되었다. 당시 몇 번이고 전력을 쏟아붓고도 멀쩡했던 자신의 상태에 의문을 가진 것이 그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제나스의 경우, 탈진 상태에서 두 차례나 비기를 쓰면서 겪은 두 번의 오버리바운드(Over-Rebound)의 대가로 무려 3개월이나 자리보전해야 했다.

챌린저급 기사가 마나를 한계 이상으로 쥐어짠 탓에, 신성력으로도 치료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서 요양만 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에 비해 경지가 낮긴 하지만 훨씬 더 무리했다.

크라켄에게 새끼의 사체를 던질 때부터 전력을 짜냈었고, 그 이후로도 날아가는 성물을 쫓아가 후셀을 박살 낼 때 한 번, 크라켄을 설득할 때 한 번, 흑마도사와 싸울 때 두 번…….

거의 전신의 힘과 마나를 쥐어짜 네 번의 오버리바운드를 겪었다.

그런데도 후유증이 남지 않은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사실, 제나스 경 이상의 타격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런 그가 겪은 후유증이라고는, 성물의 특이 능력을 강제로 끌어내며 겪은 영혼과 육체의 괴리뿐.

처음에는 그것도 전생에서 초인의 경지에 달했던 영혼 덕에 가능한 것인 줄 알았지만, 영육의 괴리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완전히 상관없진 않지.’

몸의 경지에 비해 너무나 강력한 영혼이 후유증을 최소화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영혼이 가진 힘이 마나와 육체의 힘을 대체한 거야.”

제 입으로 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전생에 생명의 힘을 쥐어짤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말도 안 되는데, 이게 현실이다. 허…….”

지금 스스로 체감하고 있듯, 영혼의 힘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비록 체력과 마나가 바닥났던 그때와 달리 의식적으로 낼 수 있는 힘은 굉장히 미미하기만 했지만.

게다가 오히려 경지가 낮았기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영혼의 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9단계, 오러마스터의 경지가 영혼을 다루는 것이라는 전설이 사실일 수도…….’

전생의 경지를 넘어설 단서가, 이 영혼의 힘에 있을지도 몰랐다.

“설령 재앙을 막는 일이 조금 잘못되더라도, 내가 오러마스터나 그 이상의 강자가 돼서 군단장들과 마왕의 골통을 직접 깨 버리면 된다.”

다짐하듯 뱉어 낸 말과 함께, 타이니는 다시 눈을 빛냈다.

‘지금의 내가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물론 바라는 대로 다 이뤄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타이니는 연무장을 박차고 나가 내성을 향해 달렸다.

* * *

우우우웅.

자리에서 눈을 감은 채 좌선(坐禪)하는 남자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은빛 마나가 그 주변을 바람처럼 휘몰아치다가 서리처럼 내려앉는 순간.

남자의 눈이 번쩍 뜨임과 동시에 가라앉은 마나가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 제나스는 눈앞에 멀뚱히 서 있는 청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남이 마나연공을 할 때 다가오는 건 큰 결례입니다, 타이니 군.”

서대륙의 고대 기사들에게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마나회로의 비전들과는 달리, 동대륙에서 전래된 ‘마음을 다스리는 법(心法)’을 기초로 발전한 마나연공법은 수련 시 외부의 자극을 극도의 위험 요소로 여긴다.

극단적으로는 수련 중에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피를 토하고 중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 마나연공법의 약점 중 하나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웃음기 어린 제나스의 말은 그 사실에 기반한 타박이었다.

하지만 타이니는 마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3개월간의 불가피한 동거 덕분에 제나스와 꽤 친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발렌티아 마나연공법은 굳이 앉아서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싸우면서도 회복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검제가 그러면서 싸우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어디서 약을 팔아.

그런 뜻을 담아 던진 농담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말에 제나스의 눈이 슬쩍 커졌다.

“호오, 나도 최근에 회복하면서 깨달은 방법을 너무 태연하게 말하는군요. 대체 각하께서 타이니 군한테 어디까지 알려 주신 겁니까?”

쿨럭.

아, 그게 경지에 따라 다른 거였어……?

“……크음. 흠, 흠. 오해를 피하고자 말씀드리자면, 저는 발렌티아 마나연공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거야 보면 알아요. 아무튼, 타이니 군은 볼 때마다 신기하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가도, 가끔은 엉뚱한 비밀을 알고 있기도 하고…….”

그 뜨거운 시선에 할 말이 없어진 타이니가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어, 음. 그런데 왜 제나스 경은 중력의 비전을 배우지 않으신 겁니까? 검제…… 큼, 각하께서 그리 베풂에 인색하신 분은 아닌 것 같은데.”

화제를 돌리기 위한 것이 분명한 엉뚱한 질문에, 제나스는 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면 또 나이에 걸맞게 귀여워 보였던 것이다.

“블루윙에 들겠다고 각하를 찾아 뵀을 때, 전 이미 익스퍼트였습니다. 그럼 대답이 되었나요? 그리고 저는 차가운 바람이 결코 중력에 뒤지지 않는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아……. 하하. 예, 그럼요. 그렇겠지요……. 어, 음. 아무튼 제가 찾아온 이유는…….”

또다시 어색한 화제 전환.

답답했던 제나스는 결국 망설이는 타이니를 대신해 먼저 입을 열었다.

“……드디어 타이니 군의 문제를 해결한 거겠지요. 마음도 정한 걸 테고.”

“……예.”

“좋습니다. 그럼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가요?”

제나스는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로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 아니, 아직은 앳되지만 어엿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망설이며 어색한 딴청을 부리는 것을 보면 짐작은 갔지만, 짐짓 마음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야 주군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처지지만 그 작전의 주도권은 바로 눈앞의 청년에게 있는 만큼, 그 결정에 따라 자신의 행로도 결정될 테니까.

그리고 기다림 끝에 나온 대답은.

“황도로 가야겠습니다.”

역시나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 * *

“그러한가……. 결국 그대가 떠날 날이 온 게로구나.”

“송구합니다. 전하.”

옥좌에 앉은 젊은 왕, 헨리 3세는 한쪽 무릎을 꿇은 검은 머리 기사를 서운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왕국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 광휘의 기사, 타이니 모르스.’

3개월 동안 선왕의 장례식과 자신의 즉위식 외에 어떤 공식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천재 기사.

웬만하면 그를 카룬의 품에 안고 싶었지만.

“악마추종자들을 뿌리 뽑겠다라……. 굳이 선왕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보내 줄 수밖에 없는 목표로군.”

왕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놈들을 작살내러 간다는데,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 자네가 죄송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나와 왕실이 한없이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판에……. ‘그’ 역시 같이 가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좋다, 그리하라.”

젊은 왕의 호쾌한 답변에 타이니가 다소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다소 귀찮은 실랑이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너무 쉽게 답변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타이니의 반응에 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뜻에 따라 각국에 놈들이 노리는 것이 성물이라고 통지를 넣었다. 얼마나 호응하고 준비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놈들의 음모에 재를 뿌릴 정도는 되겠지.”

“……감사합니다, 전하.”

전생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잇따른 사고와 재앙을 거쳐 성물이 하나씩 의문스럽게 사라질 때도, 그것이 누군가의 수작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적었던 것이다.

성물의 상징성과 필요성이 퇴색된 탓이 제일 컸고, 사고의 주체가 각기 다른 데다가, 몇몇 사고는 악마추종자와 상관없어 보이는 명백한 원인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혹자는 성물이 연달아 사라진 사건을 두고, 더 이상 효용이 없어진 성물들이 스스로 사라진 것 아니냐고 말했을 정도였다.

당시 사라진 성물들을 진심을 다해 찾았던 건 엘븐하임의 엘프들뿐.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무려 크라켄까지 동원된 대재앙이 벌어졌고, 그 내막에는 성물을 노리던 악마추종자들이 있었다.

이제는 설령 악마추종자와 관련 없어 보이는 원인으로 성물에 대한 사고가 생기더라도 다들 그 뒤를 조사하게 될 것이며, 각국은 성물의 보호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헨리 3세의 조치는 효과가 있을 터였다.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미소가 나왔는데, 헨리 3세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하, 고작 말 몇 마디 전한 것으로 어찌 도움을 주었다 생색을 내겠는가. 선왕께서 한 약속만으로는 내 성에 차지 않으니, 그대는 떠나기 전에 내 선물을 받아 주게.”

“……예?”

“무기는 충분하고, 한창 크고 있는 그대의 신체 때문에 방어구 아티팩트도 당장은 의미 없다 들었네. 하지만 이 물건은 좀 다를 거야. 그대에게도 말이지. 들라 하라!”

웃음을 지으며 손짓하는 왕.

“예, 전하.”

그그그긍.

그 신호에 대전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기사들이 들어왔다.

리암 폰 피터슨이 물건이 놓인 비단보를 소중히 들고, 다른 기사들이 그를 호위하듯 에워싼 모습.

그 예상치 못한 광경에 타이니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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